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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람에게 Aug 01. 2023

사랑하는 이유

001

언니는 나 사랑해?


사랑하냐고? 당연하지.


당연하지에 뭔가 어이없음이 담겨있네.


그치, 물을 걸 물어 이런 느낌.


(키보드 타건 소리)


내 말을 받아적는 거야?


응. 어떻게 알았어?


막 치는데. 취재야 이거 혹시?


응, 그래서 좀 천천히 말해줘야 돼. 아무튼 말해봐 왜 사랑하는지.


비밀인데, 그건.


언니 예전에 편지 썼던 거 기억나? 언니 기념일 편지 때 적은 거 있잖아, 날 사랑하는 이유.


사랑하는 이유 너무 많지.


다섯 가지만 추려봐.


응, 가장 큰 파이를 차지하는 이유를 진지하게 고려해서 답해볼게.


응.


솔직히 거기 쓴 건 기억 안 나거든. 시시각각 내 맘은 변하기 때문에. 똑같이 말할 순 없지만 요즘 내가 느끼는 널 사랑하는 이유는, 첫 번째는 눈빛인 것 같아. 눈빛이...


처량해?


아니, 맑은데 탁함이 전혀 없어. 그만큼 맑아. 맑은데 슬픈 눈빛이긴 해.


그러니까 처량한 거잖아.


근데 내 눈빛에서 마음이 읽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가 눈에 드러나는데 그게 예뻐보여. 배고프면 배고픈 눈빛이고.


어?


배고프면 배고픈 게 보여. 네가 나를 좋다고 하면 그 좋은 게 눈에 읽히고.


그게 표정은 아니야?


그게 표정은 아니고 눈에서 읽혀. 눈이 맑은데 뭐가 담겨있다고 해야되나. 난 그게 좋은 것 같고. 두 번째는... 너는 이건 좀 연민일 수 있는데. 네가 그랬잖아 연민이 사랑의 시작이라고. 난 이게 가장 강력한 감정 중 하나 같거든. 안타깝고 불쌍한 게 아니라 아린 마음이잖아, 그 사람을 향한. 너는 포텐이 엄청 많단 말이야. 잠재력이 많아. 그걸 걱정이 덮고 있는데, 그걸 끌어내주고 싶은 연민이 생겨.


그게 연민이야?


응, 그런 안타까운 감정 중 하나지. 정말 다 잘하고 밝으면 한없이 밝을 수 있는 사람인 거 같은데 내 눈엔. 네가 가지고 태어난 불안같아. 사람은 다 기질이 다 다른데, 기질 중 하나가 불안 같아. 불안이 잠재력을 막고 있는 것 같아.


그게 사랑하는 이유야?


응 그게 사랑하는 이유면서 사랑해서이기도 하지. 그 불안을 걷어주고 싶어. 세 번째는 되게 솔직하고 감정에 솔직해. 걱정이 많은데 멍청해. 눈치가 없는 것도 포함인데 순수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는 그거거든. 그 모습을 한 단어로 말하면 사실 솔직함이긴 해. 잘 모르는 솔직함. 그게 귀여워.


이게 진짜 사랑하는 이유 같다. 뭔가 사랑하는 이유 하면 예뻐서, 이런 것들이 나오는데. 이건 진짜 사랑하는 이유 같아.


나 지금 되게 진지하게 대답하고 있어. 그리고 네 번째는, 생각이 깊고 그리고 그 깊은 생각을 같이 얘기할 때 재밌어. 그게 또 나랑 완전 일치하지 않아서 재밌어.


맞아.


우리는 똑같이 생각하는 부분도 많지만 아닌 부분도 많거든. 난 그 논쟁이 된다는 게 재밌어.


맞아. 재밌어. 이제 다섯 번째가 남았어.


진짜 대망의 다섯 번째가 남아서 기대 돼?


응.


근데 어떡해? 예뻐서. 미안한데 그거 못 빼. 사실인데 어떡해.


그러면 사실 예쁘다라는 건 굉장히 주관적인 거잖아. 어느 부분이 예뻐 보이는 건지 얘기해봐.


미안한데 너 객관적으로 예뻐. 내 주관이 별로 필요가 없는데? 남들도 다 예쁘다고 할걸.


그렇구나. 안 돼.


그러면 그건 있어. 그거는 말할게. 입술이, 탐스러워. 그니까 입술이 잘 도톰하게 잘 튀어나와 있는데 웃을 때 입이랑 치아가 보이는 게 예쁘고, 눈이 쌍커풀이 두껍지 않고 끝에가 쳐졌는데 진돗개 쌍커풀 진 것 같기도 하고, 그게 너무 귀여워. 예뻐.


너무 웃겨. 나는 언니의 표현이 너무 웃겨. 누가 사람 쌍커풀 보고 진돗개를 얘기해.


그치, 그렇게 싹 들어간 게 귀여워. 그리고 웃을 때 눈이 접히는 것도 귀엽고. 인디언 보조개도 귀여워.


다 귀엽다고 하네.


예쁜 건데 귀여움이 점점 커지고 있으니까.


근데 귀여워 하는 건 왜 귀여운 걸까? 나는 이게 사랑인 거 같거든.


맞아 귀여움이 완전 주관적인 거지. 난 너 머리통도 귀엽고 잔머리도 귀엽고 다 귀여운데.


근데 나도 언니 귀여워.


이제 너 말해봐. 너 이렇게 말할 수 있어?


이게 나는 말하면서 쓸 수가 없다?


핑계 좋다. 키워드만 적어두고 나중에 쓰면 되잖아.


안 돼. 이게 뭔가 지금 실시간으로 정리하는 느낌이 좋아. 나중에 쓰게 되면 내가 지금 말하는 그 무드 자체가 안 담길 거 같아.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게 느려도 기다려 봐. 그럼 나도 다섯 가지를 얘기하면 돼?


응.


어렵네. 생각 좀 할게.


탑 5야.


첫 번째는 긍정적인 가치관이야. 같이 지내면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사람. 방방 뛰고 시끄러운 거 아니고 차분한데 하는 생각들이나 가치관이 긍정적이고 웃는 게 티 없이 맑아서 기분 좋아지는 그런 에너지야.


그렇게 조건이 까다롭진 않구나? 인티제들의 사랑이란.


근데 이런 사람 잘 없어.


긍정적이면 되는 거 아니야, 그냥? 조용한 긍정이면 되잖아.


아니야, 이게 어떤 느낌이냐면.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래 내가 지금 상당히 어려운 작업을 해냈다고. 사랑으로 해낸 거지.


그, 내가 언니한테 반한 순간 얘기해줬잖아.


그 계단?


그때 언니 무슨 생각으로 그랬다 했지?


내가 너무 요란하게 그러면 더 그럴 것 같아서.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그냥 나만의 위로 방식이야. 괜히 큰일이라고 난리법석을 떨면 더 힘들어지잖아. 그래서 대수롭지 않은 듯 넘기는 게 좋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자세한 건 말하기 싫은 걸 수도 있으니까. 네가 그렇게 거짓말을 한 순간 말하기 싫다는 거니까.


근데 나는 그게 좋았어. 그게 내가 어디서 맞아서 온다는 게 굉장히 창피한 일처럼 느껴졌던 거 같아. 그게 맞기 전까지는 뭔가 말로 폭력적인 이야기를 듣는 건 내가 존중받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닫기가 어렵다고 해야 되나. 근데 맞는 건 내 눈으로 보이잖아. 그러니까 말하기 싫었지. 나는 되게 크게 받아들이잖아. 그래서 어쩌면 언니나 다른 사람들이 이걸 걱정하는 것보다 오히려 스스로가 더 나를 더 연민의 눈빛으로 보고 불쌍하다고 여겼을 거란 말이야. 그래서 나는 이런 걸 덜어내고 싶었어. 근데 언니랑 얘기하게 되면 내가 지금껏 겪어온 거, 겪는 거, 겪을 거까지 다 가벼워지는 느낌인 거지. 근데 이게 나는 능력이라고 생각해.


나의 매력을 알았다.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는 뜻이구나.


응. 근데 이게 그냥 릴렉스가 아니야. 내가 진짜 실없는 게 필요해. 그러면 뭐 개그프로그램 봐도 되고 웹툰 봐도 되고 내 인생을 가볍게 할 수 있는 것들은 차고 넘치잖아. 무슨 차이일까?


안정감?


조용한 바위같아.


바위는 원래 조용한데.


아니 바위라고 굳이 표현한 건 그 조용함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옆에 계속 있을 것 같은 거?


안 움직일 것 같다. 그 자리에... 우직함인가 그럼?


그치. 맞아.


맘에 들었어, 첫 번째 이유.


평가하세요?


(웃음)


두 번째 이유는, 결혼감이어서.


그게 이유를 말해야지. 왜 결혼감인지.


나는 언니랑 처음 통화할 때부터 언니가 결혼감이라고 생각했었잖아. 가치관 맞는 게 제일 큰 거 같아. 언니가 말했던 것처럼 평생의 반려자를 찾는 사람을 보기가 힘들잖아. 이거는 요즘 트렌드인 것 같은데 만남이 점점 가벼워져. 이게 물론 좋지 못한 변화라는 건 아닌데 예전에는 그냥 남녀의 결혼 같은 것도 이혼하면 큰일날 것 같은 그런 문화가 있었잖아. 근데 그런 게 가벼워지고, 결혼을 안 해도 되고, 내가 더 소중해지고 하다 보니까 단순히 만남 자체가 떠나보내도 무리 없는 관계가 되는 거지.


그건 나도 동의해. 나도 네 말대로 마냥 부정적이라고 생각은 안 하는데 그만큼 가벼워진 것 같아. 쉽게 헤어질 수 있는 사람이니까 진중함 없이 아무나 만나고 보는 사람들도 많아지는 것 같아.


근데 나는 이게 내 사랑 전선에서까지는 그러지 않았음 좋겠거든.


그치, 그만큼 신중하게 골라서 오래 만나야 되는 건데. 결과가 먼저 바뀌면서 앞도 바뀐 느낌.


나는 스스로 내가 생각하기에 정이 많아.


너 정 정말 많아. 여려. 마음이 착해. 내가 정이 없어.


언니가?


정 없어. 정 많아보이지. 정 별로 없어.


근데 또 보이기에는 내가 정이 없어보이는데.


너는 정이 아니라 관심이 없는 거지.


언니한테도 그래 보여?


아니 나한텐 그렇지 않아. 너의 관심 안에 들어오는 게 힘든 거지.


아무튼 그래서 나는 뭔가 그 관심 안에 들어온 사람이 일련의 이유로 날 떠나고 싶어할 때 난 그게 제일 힘든 거 같아. 근데 남들은 쉽잖아. 1년 만난 사람이랑 10년 만난 사람이랑 다르잖아. 근데 나는 10년 만난 사람이 훨씬 좋거든. 설렘 자극이 아니라 쌓아온 시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래서 나는 시간이 갈수록 더 헤어지기 힘들어지고 헤어짐의 한계선도 되게 높아져. 지금 당장 연애가 날 괴롭게 해도 이 관계를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 단순한 일로 헤어짐을 생각하지 않는 건데. 다른 사람들은 연애를 하면서 조금만 안 맞는 부분이 있어도 지금 헤어지는 게 시간 세이브라고 생각하잖아.


유리한 것만 취하려고 하는 것 같아. 연애의 좋은 점만 취하고 싶은 거지.


갈등 대처에 있어서도 느끼는 거 같아. 나는 그냥 내가 만나온 사람들이 화가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화가 많으니까 어떤 말도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내가 반대로 화가 잘 나지 않는 사람이어서 모진 소리를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단순히 싸우고 난 다음을 생각하는가 아닌가인 것 같아. 그 사람들은 좋게 말하면 싸우는 그 순간 감정에 충실한 거지. 나쁘게 말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화내는 거고. 난 다음이 있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거고. 근데 언니랑 싸울 때는 언니가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나와 헤어지려고 싸우는 게 아니라는 게 말투에서 묻어나. 애초에 화가 나는 것도 날 너무 좋아하니까 서운해서 그러는 거고, 앞으로는 이랬으면 좋겠다는 걸 많이 말하잖아. 앞으로라는 건 우리에게 다음이 있다는 거거든.


알아줘서 고맙네.


세 번째, 발상이 독특해. 언니가 얘기한 것처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논쟁이 되는 부분의 연장선인 것 같은데. 내 말을 경청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언니가 하는 말들이 너무 웃겨. 나라면 정말 안 할 상상. 언니는 생각이 베이스가 긍정적인 방향이잖아. 나는 염세적인 베이스야.


주관적인 거네.


뭐가 주관적이야?


내가 웃기다는 거.


아 맞지. 대중적인 개그 포인트는 아니니까. 근데 나는 웬만한 사람보다 언니가 웃겨.


잘 맞는 거네, 우리가.


맞아, 그렇다고 볼 수 있겠다. 근데 나는 시를 가르쳤었잖아. 시의 표현법에서 낯설게 하기라는 표현이 있거든. 우리가 기본적으로 비유를 할 때 관습적으로 많이 드러나는 표현들이 있단 말이야. 눈이 시련이고 그런 거. 근데 진돗개 같은 쌍커풀. 되게 독특하잖아. (웃음) 이게 낯설게 하기 같아. 전혀 연결지점이 없을 거 같은 부분을...


역시 난 시인이네.


그래, 언니 시인해. (웃음)


네 번째 이유는 뭐야?


네 번째, 모난 부분이 없어. 둥글둥글하고 예민하지 않은 사람이야. 가족 영향도 있는 것 같아. 내가 보기엔 굉장히 가정적인 집이라. 왜냐면 내가 동생 봤을 때도 모난 부분 없고 둥글둥글한 사람 같았거든.


너무 물러터진 것 같진 않아?


아니. 언니가 스스로 상대방의 마음을 잘 안다고 했잖아. 그런 사람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어. 여우 너머에 있는. 타인의 성격을 잘 캐치하거나 속마음을 알아챌 때. 그런 부분들을 빠르게 캐치하고 거리를 두는 건 물러터진 거랑은 거리가 멀잖아. 그래서 그렇게 보이진 않는 거 같아. 나에겐 한없이 다정하고 타인에겐 거리를 두는 그런 모습 같아 보이기도 하고.


정답이야.


의식하고 그렇게 하는 거야?


의식은 아니야. 마지막은 뭐야?


다섯 번째 이유는, 잘해. (웃음)


잘하는 것도 이유가 돼?


응 이유가 돼. 근데 이게 잘한다는 게 테크닉... 적인 부분도 물론 있긴 있지. 뭔가 할 때도 배려가 묻어나고. 내가 설렜던 게 할 때 머리 부딪히니까 머리 뒤 손으로 받쳐주는 거. 통화로 말하니까 민망하네.


그럼 내가 막하면?


그래도 나름대로 좋아할 거 같아. 단순히 다정한 관계여서 좋다기 보다는 그런 느낌 있잖아. 배려하는 모습은 나를 되게 소중하게 느껴서 그렇게 하는 거라는 느낌이 들고, 막 대하면 하고 싶어서 흥분했다는 섹시함이 느껴질 수도 있고. 그런 느낌이 좀 들지 않나?


근데 그게 사랑하는 이유야?


이게 큰 것 같긴 해. 육체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날 사랑하고 있나, 체크하는 포인트가 되는 거 같아.


할 때 사랑한다는 게 느껴져?


느껴져. 이것도 하나의 스킨십이라고 생각해 보면. 할 때 떨리잖아. 난 아직도 떨리거든. 할 때 나랑 동시에 언니도 같이 긴장 상태에 있다는 게 느껴질 때가 있어.


언제?


뭐, 숨쉬는 박자감이나 속도감? 언니가 느리게 다가올 때가 있거든.


행동이 느린 거야?


아니, 예를 들면 뽀뽀를 할 때 빠르게 쪽 다가오면 귀여운 느낌이 들고 천천히 다가오면 무드가 잡히잖아. 그런 속도감에서 언니가 긴장하고 있고 집중하고 있다는 게 느껴질 때가 있다는 거지.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같이 호흡하고 있다고 느껴지니까 진짜 스킨십 같다고 느껴졌어. 육체적인 만족감이 아니라.


교감 같은 거네?


맞아. 더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껴지는 거지. 손 잡거나 키스하는 것처럼 가까워지는 단계가 보여지는 하나의 스킨십같아.


나는 너랑 하면 정신을 놓게 돼. 뭔가 마약하는 거 같고 온 몸이 둥 뜨는 것 같은 느낌이 있어. 집중력 너머에 있는 그 뭔가.


언제야, 그게? 시작할 때부터?


응 시작할 때부터.


근데 이게 사랑하는 이유가 못 된다고 생각한 건 아니야?


이게 뭔가, 사랑하는 이유라기 보다는 사랑의 결과처럼 느껴지긴 해. 사랑하는 이유보다는 더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요소가 되는 느낌이지.


근데도 기각하지 않았네.


너라는 사람이 그걸 좋아하는 걸 어떻게 하겠어.


(웃음)


만약에 우리가 연애하고 있는데 했는데 네가 만족스럽지 못해. 그럼 사랑이 줄까? 어쨌든 그걸 사랑하는 이유로 뽑았다는 건 어느정도의 파이를 차지하고 있다는 건데 그 부분을 충족시켜주지 않는다면 그 부분이 빠지겠지? 그럼 100% 사랑할 걸 98%를 사랑할까?


아니. 내가 아까 얘기했지만, 테크닉적인 부분에서의 만족감을 얘기하는 건 아니야. 내가 말하는 여기서의 잘맞음은 속도나 이런 걸 얘기하는 게 아니고, 할 때 언니의 모습인 거잖아.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라던가, 나한테 하는 행동이라던가. 교감으로써의 스킨십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서 좋은 거지. 그래서 아마 이 다섯 번째 이유가 사라지려면, 언니가 나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사랑하는데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정말 사랑하는데 할 때만 배려가 없어.


안 그럴 거 같은데.


그럴 수 있잖아.


왜?


왜인진 모르지. 그렇게 배웠어, 그냥. 아니면, 너무 조심스러워서 다 물어봐. 베개 각도는 어때? 괜찮아? 다리는? 살짝 뻗을까?


아, 너무 웃겨. 후자는 상상이 조금 되긴 한다. 근데 이게 어떻게 보면 내 생일 날 언니의 확장 버전 아니야?


무슨 소리야. 물어보진 않았어. 아니야. 잘 모르고 포기한 거지.


너무 웃겨, 귀여워. 아니 어찌됐든 조심스러워서 안 한 게 맞잖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막 그럴 순 없어.


뭘 그럴 순 없어.


아니 그냥 그렇게 할 순 없으니까. 조심스러운 건 맞지. 근데 물어보는 건 주체가 없는 거야. 독립적이지 못하고.


괜찮은지 확인을 했어도 그 너머로 나아가기 위해서 항상 질문이 필요한 거야?


어떻게 지금 키스할까? 가슴 더 만질까, 다 물어봐.


아 진짜 싫다. 근데 만약 그 정도로 물어보면 나한테 그렇게 하길 바라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볼 거 같아. 사람들은 항상 본인이 받고 싶은 대우를 상대방에게 하는 경우가 있잖아. 배려있게 말을 하는 사람은 타인이 본인에게 그렇게 말을 해줬으면 해서 그러는 거고.


그럼 하지 말라고 하는데 계속 하는 건 내가 그렇게 했으면 해서? 자꾸만 다 물어보는 건 너도 그렇게 질문 받길 원해서 그러는 거야?


아니 근데, 질문을 하는 건 그냥 내 성향인 거 같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건 내 성향이 맞는 거 같아.


일단은 무슨 말을 해도 왜가 따라오는 거 같아. 난 처음에 네가 자꾸 왜왜거려서 싫은 건 줄 알았어. 딴지 거는 줄 알았어. 너무 당연한 것도 왜냐고 물어보니까 싫어서 그런 건 줄 알았어, 초반에. 근데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더라고.


그걸 언제 깨달았어, 진짜 궁금해 한다는 걸?


시기는 기억이 안 나. 근데 그냥 왜냐고 물어보는 애구나 알게 됐지 점점.


(웃음) 나는 그냥 왜냐고 물어보는 애야?


카톡방에 왜 검색하면 다 너일 걸.


언니는 자주 하는 말 없나?


곤란하다는 말?


근데 곤란하다는 말도 내가 왜냐고 하는 것만큼 많이 하진 않아.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지 많이 쓴다. 근데 나 그럴 수 있다고 하면 또 왜냐고 물어본다? 진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럴 수 있다고 하는 건데. 근데 난 좋아. 그냥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왜냐는 질문을 들으면 왜 그랬을까를 생각하게 돼. 왜냐면 모든 행동에는 사실 이유가 있잖아. 이유를 다 생각하지 않고 그냥으로 퉁치는 버릇이거든. 근데 왜냐는 걸 한 번 물어봐주면 고민을 하게 되는 거 같아. 대답은 해줘야 하니까.


난 왜 그럴까?


넌 그냥 그런 사람인 거지. 그게 궁금할 게 있나? 본인이 왜 그러는지 궁금해 하는 네가 참 웃겨.


그러면 잠자리에서 자꾸 물어봐도 그냥 그런 애인 거네.


그치. 왜 물어보겠어. 물어보니까 물어보는 거지.


나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사고 과정에서 자꾸 궁금해하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


잘 모르니까 그러는 거 아닐까?


그러면 나는 물어볼래. 왜 자꾸 질문하는지. 왜 자꾸 질문하는지 물어보고 그게 만약에 언니가 말하는대로 잘 몰라서 그러는 거야. 그러면 3개월 정도를 물어볼 때마다 답하고, 이게 좋다고 대답을 해줘. 그러면 물어볼 필요가 없어지잖아 점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이 줄어들지 않아. 그러면 이게 배려하는 느낌이 들어서 습관적으로 물어보는 건지 조심스럽게 확인을 하고, 하지 말아달라고 할래. (웃음)


근데 이유에 외적인 건 없네?


(웃음) 있었으면 해?


아니, 그냥.


그냥, 뭐?


아니, 그냥 없네. 사실을 직시한 것 뿐이야. 그냥 없네. 외모는 상관은 없구나.


아니 상관있지. 근데 나한테 외모라는 건 통과의례야. 사람들이 상대방을 볼 때 제일 처음으로 보는 건 외적인 면이다 보니까 그 이후에 내가 사랑에 빠질 수 있도록 그 사람한테 집중하게 되겠지. 근데 외모를 가지고 사랑할 수는 없지.


왜? 외모를 가지고 왜 사랑할 수 없어? 사랑에 빠지는 건 외모 때문 아니야? 만약에 네가 이런 모습이 아니면 난 다른 사랑의 이유를 찾지 못할걸? 찾지 않을 거고.


그러니까. 아니 근데 잠깐만 나 여기까지만 치고. (키보드 타건 소리) 근데 진짜 재밌지 않아? 나이거 나중에 제본해서 우리 집에 둘래.


그럼 갱지로 해줘, 제본.


갱지? 갱지가 뭐야? 왜? 약간 이런 종이를 좋아해?


아니 그냥 없어 보이게. 핸드메이드 느낌 나잖아. 돈 냄새 안 나고.


왜 돈 냄새가 안 나야 돼?


자급자족의 세계는 돈 냄새가 나면 안 되니까?


아니 근데 내가 취미로 내 걸 만드는데 좋게 만들고 싶잖아. 내가 자급자족이고 이걸로 돈을 벌 게 아니라면 꼭 허름하게 만들어야 돼?


아니 그게 약간 본샌데? 레트론데, 레트로.


(웃음) 무슨 얘기하고 있었지? 사랑에 빠지는 건 외모 때문이다. 그니까 언니한테도 외모가 통과의례인 거야. 외모 때문에 나를 알아가려고 한 거지. 이것 때문에 사랑에 빠진 게 아니지.


아니야, 난 외모 때문에 사랑해.


그럼 내가 못생겨지면 사랑하지 않을 거야?


못생겨질리가 없잖아. 예쁜데.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돼도 사랑하지.


그러면 더더욱 통과의례잖아. 사랑하는 이유가 아니라.


그렇게 되면 네가 말했던 거 하나가 변한다고 가정하면 사랑하지 않을 거야? 사랑하는 다른 이유들이 충분히 많으니까 하나가 변해도 다른 이유가 더 채워질 거란 말이지. 그러니까 얼굴도 사랑하는 이유가 되지 않나. 외모 말고 다른 사랑하는 이유들도 변할 수 있는 것들이잖아. 나는 얼굴이랑 성격이랑 같다고 보거든.


외모랑 성격이랑 어떻게 같아? 외모는 언제나 변하는 건데.


사람 성격도 자라면서 바뀌기도 하잖아. 그것도 그런데 나는, 사랑을 처음 시작할 때는 이유가 필요한데 나중에는 이유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거든. 얼굴을 보고 빠지고 알고보니 이런 면도 있네 하면서 더 빠지고. 너를 사랑하는 이유가 사라지는 거지. 너라는 사람 자체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의 조건이 너의 모든 특징들이 되는 거지. 시간이 지나면 네가 무슨 행동을 해도 네가 하면 사랑스러워지는 거지. 그러는 거 아닐까?


그러면 언니의 말은 외모도 성격도, 우리가 얘기한 모든 것들이 연료네.  외모도 성격도 바뀌니까 사랑하는 이유로 자리잡았던 부분은 바뀔 수 있는 거고. 그렇게 연료가 다 탈 때쯤 되면 다른 연료가 들어오고.


그치. 그래서 지금까지 말한 게 너를 사랑하는 이유라기보단 내가 생각하는 너의 가장 큰 장점. 가장 사랑스러운 점, 이런 거지. 사랑하는 이유는 이제 지난 것 같아. 네가 변해도 사랑할 거야. 네가 갑자기 진돗개 눈이 아니라 고양이 눈이 되거나 네가 갑자기 너무 티없이 해맑아져서 연민을 느낄 새가 없어져도 널 사랑하겠지. 그때는 다른 말을 하겠지, 나는 너의 티없는 맑음이 좋아 이러면서.


귀여워. 조건 없는 사랑이네.


조건이 없는 사랑 있지.


이제 시간도 늦었으니까 자야지.


이렇게 갑자기? 마무리는 지어야지.


음, 오늘 인터뷰 너무 즐거웠고요, 유선님. 굉장히 성심성의껏 답변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리고, 인터뷰비는 다음 주 중으로 입금 드리도록 할게요.


받아 적어 주세요. ****-***-****** 우리은행 정유선. 시간당 5만원이라고 알바몬에서 봤는데, 맞아요? 아 사실 저 나이 속였어요.


(웃음) 왜요?


25세 이상만 가능하다고 해서, 25세 이하여도 사랑에 대해 알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몇 살이신데요.


열아홉이요. 학교가야 되니까 입금은 빨리 해 주셨으면 좋겠고. 1시간 20분이니까 1시간 30분으로 쳐주실 거죠? 야간수당?


재셨어요?


네, 여기 통화 시간.


야간수당까지 야무지게 챙기네.


재밌었어.


나도 재밌었어. 사랑하는 이유가 필요 없을 수도 있겠구나 느꼈어. 아직 완전하게 이해하진 못했는데, 사랑받을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나도 언니가 변해도 사랑할 것 같은데 그 마음이 정말 사랑에는 이유가 필요 없어서 그런 건지 마음으로는 이해가 약간 부족하네. 만약에 사랑하는 이유가 다 사라져버렸는데 새로이 사랑하는 이유가 생겨나지 않으면 어떡해?


그건 그거야. 다섯 가지의 이유가 너무 좋아서 잃지 못하겠는 거야. 네가 꼽은 이유들을 보면 그 행동을 하는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걸 느낄 수 있는 행동이잖아. 그게 변한다면 그건 곧 너에 대한 사랑이 줄었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거 같아. 그래도 그럴 일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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