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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AN Jul 18. 2023

#003. 연애의 시작

DIY FAMILY



우리 연인관계로 만나보지 않을래?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생활영어가 부족한 내가 유명한 비유나 인용구를 몰라 문장 그대로 이해하는 걸까?

만난 첫 날 고백이라니, 금사빠도 이런 금사빠는 없을 거야.

알고보니 얘도 또라이였고, 지금까지 다 또라이짓을 위한 빌드업은 아닐까?


깊은 생각으로 이 남자의 제안에 대해 고찰해보고 싶었지만, 

지금 내 옆에는 사슴같은 눈망울을 반짝이며 대답을 기다리는 당사자가 누워 있었다.




결국, 우리는 그날 밤부터 연인 관계가 되기로 했다.

결혼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동거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연애하는 건데 만난 기간이 중요할까? 하는 생각이 결국 내 안의 싸움에서 이겼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 이상한 이태원에서의 밤을 시작으로 연인이 되었다.






당시의 나는, 바로 전 두 번의 연애를 연락 문제로 말아먹은 후였다.

그들은 나의 위치와 매 식사 메뉴, 앞으로의 자잘한 계획들을 실시간으로 중계받길 원했고, 

나는 이 지대한 관심이 집착으로 느껴져 엄청난 거부감을 느꼈다.


이번에도 같은 이유로 말아먹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곧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자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근무했고, 

특히 주중에는 아침 8시쯤 출근해 밤 10시, 늦으면 12시까지도 잔업을 해야 했다.

의심 레이더를 잔뜩 장착한 초기에는 느린 답장과 조용한 휴대전화에 불쑥불쑥 의심이 튀어나왔지만,

만남을 지속할수록 그냥 바쁜 사람, 나처럼 연락을 귀찮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연애를 하면서도 이렇게 구속감 없이 편안할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우리는 주로 토요일에 만나 일요일까지 함께 지냈다.

남자의 자취방은 30년이 넘은 구옥 다가구 주택의 반지하 층으로, 그리 쾌적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남자의 방은 꼭 내 방인 것처럼 친숙하고 편안했다.

점차 나의 주말은 남양주에서 인천으로 차를 몰고 가 하루를 머물고 오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2021년을 지나 2022년,

찬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에서 겨울을 지나 

새순이 움트는 봄까지 그 일상은 계속되었다.


주중에는 각자의 일상을 보내고, 

주말에는 주중에 열심히 모아둔 이야기 보따리를 공유하는.

가끔은 남자가 좋아하는 너드스러운 주제로 토론하기도 하고,

또 가끔은 불안정한 심리를 가진 나를 남자가 토닥여 주기도 하고.


더 이상 인간관계에 상처받고 싶지 않았기에 언제나 부정하며 우리는 가벼운 사이라 매일 곱씹었지만,

나는 매 주말마다 한 뼘씩 이 남자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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