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형 인간의 특징 중 하나는 미래를 미리 대비하고 싶어 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 결과가 꼭 같게 나오진 않는다. J형 인간이지만 맥시멀리스트인 경우에는 코스트코처럼 부피가 큰 대형 창고 매장을 좋아하고 그곳에서 물건을 사면서도 거리낌이 없다. 하지만 똑같은 J형 인간이더라도 미니멀리스트는 같은 품목을 두 개 이상 사서 쟁여 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같은 타입에 분류되더라도 꼭 그 결과가 같으리라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한편 J형 인간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함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인다. 큰 행사를 앞두고 해야 하는 리스트를 작성하는 것까진 비슷할 수 있으나 그것을 실행해 가는 방법, 속도, 목표치에 따라 결과값은 큰 폭으로 다르게 설정된다. 특히나 큰 계획이어서 변수가 많고 나 혼자만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신경 써야 할 사람들이 더 있다면 변수의 종류가 많은 만큼 케이스의 다양성은 무궁무진한 셈이다.
그렇다면 공통점은 있을까. 적어도 ‘계획’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그 ‘계획’을 향해 나아가려는 마음가짐 정도는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대비할 수 없는 미래라 할지라도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 대비를 하고 싶어 하는 그 속성 정도는 말이다.
나는 전형적인 J형 인간이다. MBTI를 모르고, 비슷한 성질의 사람끼리 분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를 때부터 나는 내가 누구인지는 알았다. 나의 한계 중 하나는 융통성이 없는 부분인지라 없는 융통성을 만드는 방법을 배우는 것보다 융통성이 없어도 대처할 수 있는 상황을 미리 예견하는 것을 더 편안해하였다.
하루의 일과가 잠-식사-학교 정도로 요약될 수 있는 학생 때는 이런 나의 속성과 생활 방식이 어느 정도 잘 맞았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당장 대학교에 갔을 때만 해도 나의 하루를 내 마음대로 짤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발표 과제들이 있을 때만 해도 팀원들과 일정을 맞추고 만나서 역할 분배를 하고 또 다음 만남을 잡아야 했다. 동기들과 시간을 내어 틈틈이 놀러 다니기도 해야 했고, 그 와중에 나 혼자만의 오롯한 시간을 가져야 했기에 한정된 하루라는 시간 안에서 우선순위가 실시간으로 변하기도 하고 때론 갑자기 끼어든 일정이 그 우선순위를 엉망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런 대학 생활을 지나 사회생활로 가니 다시 루틴을 가져올 수 있었다. 어렸을 때처럼 생활 계획표를 작성하진 않지만 머릿속에서는 늘 일정한 파이 그래프가 그려져 있어 그 안에서 쳇바퀴 같은 생활을 하면서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혼 그리고 이어서 육아의 삶은 나의 루틴을 어김없이 깨버린다. 이제는 챙길 사람이 나, 아이, 그리고 남편, 때론 부모님들까지 있다 보니 계획을 염두에 두고 있어도 실행에 옮기는 것은 또 다른 일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 보니 나는 때때로 계기를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우리 집은 늘 엉망이에요.” 어느 날, 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아이를 보고 이마를 부여잡았다. 아이의 장난감이 어느 정도 이상으로 늘어나면서 거실은 발 하나 제대로 디딜 틈 없이 복잡한 공간이 되었다. 그곳은 아이의 공간이니 놔두더라도 집 안의 다른 공간들은 신경을 써야 하는데 퇴근 후 아이를 하원시키면서 저녁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것에만도 이미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라 아이를 재우고 비몽사몽 한 상태로 다른 집안일을 손에 잡히지도 않지만 잡으려는 마음조차 들지 않는 현실이다.
그렇다 보니 어쩌다 한 번씩 집에 손님이 오는 날은 나에게 좋은 계기가 된다. 완벽하게 집안을 정리하진 못하더라도 그간 미뤄뒀던 정리를 해야겠다는 계획을 실행할 수 있게끔 동기부여가 되기 때문이다. 때론 찬 바람 혹은 뜨거운 태양이 그 계기가 되기도 한다. 늘어놨던 옷들을 한데 정리하고 또 다른 옷들을 꺼내놓으며 한 계절을 보낼 수 있도록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키게 하니 말이다.
벌써 만난 지 15년 차가 되어 가는 친한 동생의 얼마 남지 않은 결혼식도 나에겐 비슷하게 좋은 계기가 되었다. 겨우내 붙은 군살들에 대한 고민도 있고 건강 관리도 해야겠는데 참, 하는 즈음에 몸 한구석이 고장 났다. 이러나저러나 함께 준비할 겸 식단 관리도 운동도 다시 열심히 해보려고 하는 중이다. 마음가짐은 거의 내 결혼식이나 다름없지만 사실 나는 계기를 잡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뿐이다.
한편 이러한 계기들은 다분히 수동적이다. 그럼에도 잘 붙들고 실행에 옮겨 삶을 조금이라도 더 부지런히 살아가면 뿌듯하고 좋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실행이 오래가지 않고 잠시잠깐에 멈추는 경우가 부지기수이기에 능동적으로 계기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이 된다. 능동적 계기란 무엇일까. 이루고자 하는 것을 설정하고 그것을 계기로 만들되 수동적 계기처럼 미루지 않고 즉각 나를 움직일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일 텐데.
작심삼일이란 말이 사자성어로 굳어진 이유는 이러한 능동성의 한계 때문이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작심삼일을 계속 반복해 가면 1년을 채울 수 있다는 말이 우습지 않게 들린다. 심호흡은 크게 해야겠지만 작게라도 실행한 일들을 이어가다 어느 순간 돌아봤을 때는 시작하지 않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결과물을 발견할 수 있게 되니 말이다.
비록 며칠간 열심히 새벽을 깨워 출근 전 운동에 성공하고 폭식하는 저녁을 맞이하더라도 에이, 망했어 하고 집어던지지 않을 수 있는 이유를 찾기에는 나이 듦은 꽤 유용하다. 작심삼일로 끝나도 괜찮다는 것을 이젠 안다. 실패가 실패로 끝나지 않게 다시 시작하면 그뿐이며, 혹여라도 그것이 다시 실패로 끝나더라도 의미를 달리 붙일 수 있는 여유를 가져도 괜찮은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난 이렇게 오늘도 긴 변명문을 혼자서 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