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빈스파 Sep 13. 2024

불효자는 빕니다

“아빠 오늘은 정말 제가 자랑스럽고 뿌듯해요. 학교에서 수학 숙제도 다 끝냈고 집에 와서 국어도 지금까지 두 시간이나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새벽 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아들이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와 같은 톤으로 누워 있는 내 옆에 서서 웃으며 얘기하고 있었다. 

엄마는 우리 아들 대단하다며 연신 따봉을 날려주었고 나는 엉덩이 한 번 툭 치며 “멋지구먼” 한 마디로 아들의 대견함을 칭찬해 주었다.    

 

아침 7시에 일어나서 계란밥으로 끼니 해결하고 7시 35분 등교, 학교 끝나고 6시까지 자습, 학교에 신청한 석식을 먹고 6시 30분 헐레벌떡 수학학원, 10시에 집에 와서 잠시 휴대폰 삼매경에 빠졌다가 11시부터 1시까지 또 국어공부.

아들의 오늘 하루 일과다.

고등학생의 일과가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참 살기 뻑뻑한 인생이 아닌가 싶다. 

    

이번 추석에 큰 아버지와 큰 어머니가 모두 편찮으셔서 가지 못한다고 하니 너무 크게 아쉬워하는 아들이다.

가족여행이나 모임을 귀찮아하거나 어떻게 해서든 빠지고 싶어 하는 게 보통 고등학교 남학생의 모습인데, 이 친구는 사시사철 가족여행을 소망하고 명절에 큰 아빠 댁에 가는 걸 염원하는 조금은 비정상적인 친구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 주전부리 사 먹는 재미, 큰 엄마가 해주시는 갈비찜과 각종 요리들을 맛보며 평소 집에서 먹어보지 못했던 상상 속의 음식들을 마음껏 해치우는 재미가 아들에겐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 것 같다.

100킬로에 육박하는 덩치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흡사 푸바오와 같은 모습으로 조잘조잘 수다 떨며 애교 부리는 아이를 어른들이 다들 예뻐하시는데, 이 친구도 본능적으로 그걸 알고 있다.   

   

그런데, 추석에 큰댁에 못 가는 대신 엄청난 변수가 발생했다.


어머니가 꿈자리가 뒤숭숭하다며 이번 추석에 우리 네 식구와 함께 성묘를 다녀오고 싶다는 것이다. 성묘가 뭐 문제가 되겠냐 싶지만, 문제는 조상님들이 계신 곳이 그야말로 험준하고 길도 없어서 야생동물과 벌레의 천국이라는 것이다. 

두 개의 산에 나뉘어 계신데, 계신 곳까지는 평소에 오르는 사람이 없어서 항상 길을 만들면서 가야만 했었고, 가끔 멧돼지의 흔적을 보거나 들개와 뱀을 마주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보통은 길이 워낙 험해서 남자들끼리만 다녀오는데, 그럼에도 긴 옷에 해충박멸 스프레이와 긴 장대를 필수장비로 들고 가곤 했었다. 


그런데 그 길을 어머니를 포함해 모두가 함께 올라야 한다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들도 그동안 빠지지 않고 성묘를 갔었지만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하고 내려간 경우가 많아서 그곳이 얼마나 대단한 결심을 하고 올라야 하는 곳인지를 잘 알고 있다. 날이 조금 선선해지면 좋으련만 9월에도 열대야가 지속되는 요즘 날씨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착하디 착한 아들놈이 요즘 불효를 무릅쓰고 소원하는 것이 하나 생겼다.     


‘태풍아 와라.... “

작가의 이전글 함께가 아니어도 좋은 여행, 함께라면 더 좋은 여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