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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석 Jun 30. 2024

나를 너무 사랑하는 나의 사랑스러운 감정들을 위해

Inside Out 2

 - 어른이 된다는 건 기쁨이 줄어드는 거야.


 기쁨, 슬픔, 분노, 까칠(이후 역겨움으로 직역해 사용, 좋고 싫음의 분명한 의사표현), 소심의 자리에는 불안, 당황(동시에 부끄러움), 부럽, 따분이 앉아 있다. 하지만 원초적이고 단순하다고 생각하는 넷이 사라진 자리에 불안이 가득하다. 자라고 어른이 되면서 모든 일에 ‘단순하게’ 기뻐하기만 할 여유는 없어진다. 기쁨 뒤에 올지도 모르는 슬픔이나 분노, 역겨움에 대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해야 하고, 우리는 항상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때문에 불안해진다.

 우리는 9년 전 처음 만난 <인사이드 아웃>에서 배웠다. 기쁨만 가득할 수는 없다고. 슬픔을 억누를 필요가 없다고. 이번에도 같은 이야기다. 인간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진화 과정에서 많은 감정들을 쌓아왔다. 그것이 순리였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그것들을 표출하면 본능에만 충실한,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어린애 같은(미성숙한), 믿고 맡길 수 없는, 급기야 제 할 일을 해내지 못하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정말 그런 ‘취급’을 받는다.

 타인의 시선과 기대를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그런 취급을 받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행동한다. 그 주축은 바로 ’불안‘이다. 우리는 몸만 컸을 뿐 기쁨을 느낄 줄 안다. 기쁨을 잊은 것이 아니다. 기쁨에 무뎌질 뿐이다. 기쁘면 기쁠수록 그 이후에 올지도 모르는 기쁘지 않은 것들이 두려우니까. 기쁘지만 기뻐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우리의 불안이다. 그래서 기쁨은 불안을 완전히 알기 전까지 기쁨이 줄어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반은 틀린 말일지도 모른다. 불안이 너무 커져서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우리는 어딘가 불안하지만 기쁠 땐 기쁘다. 부끄럽지만 기쁘고, 지루해도 부러워도 괜찮다. 좋다.

 빙봉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기쁨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과거에 부끄러웠던 것, 잘못했던 것, 짜증 났던 것까지 전부는 아니지만 생각보다 많은 것을 기억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더 긴장하기도 하고, 틀리지 않으려 애쓰고, 피하려고 한다. 그것들까지 전부 모아서 ‘나‘라는 사람이 된다.

 사람은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을 더 잘 기억한다는 말이 있다. 더 선명하게, 더 오래 기억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때로는 발목을 잡을 때도 있고,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들기도 하며, 스스로를 놓아버리게 하기도 한다. 불안은 다른 말로 바꾸면 ‘자기 보호’다. 나쁜 것들로부터, 최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갖는 감정이다. 기쁘고 좋은 감정을 가진, 가질 나를 위해 기꺼이 싫은 것들을 안는 것이다.

 너무 다정해서 너무 개입하는 감정이다. 기쁨이 좋은 것을 더 좋게 만들어준다면, 불안은 나쁜 것을 더 나쁘지 않게 만들어준다. 결국 불안도 좋다면 좋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게 너무 부담스러워서 떨쳐내고 싶어 한다. 벗어나고 싶어 한다. 없으면 한다. 이렇게 사랑스러운데도.

 기쁨과 불안은 결국 ‘나중’과 ‘지금’이다. 지금 불안해하면 나중에 분명 기쁠 테니까 참는다. 지금의 기쁨과 나중의 불안을 생각하지 못한다.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다정한 불안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기쁨이 가는 곳에 슬픔이 가는 것처럼(초반 대사 참고). 그렇다고 전부 불안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쁨에만 맡겼다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9년 전에 이미 확인했다(꼭 가출한다는 건 아니고). 우리는 기쁨이의 머리와 눈동자 색이 왜 슬픔이의 색과 같은 지 이미 알고 있다.

 주인공 라일리의 엄마의 중앙 감정은 슬픔이고 아빠의 중앙 감정은 분노다. 그들이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는 데에는 수많은 기쁨과 슬픔, 분노, 소심, 역겨움, 불안, 부러움, 당황, 따분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어떤 일들에 의해 자리가 바뀔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혹시 모르지, 또 다른 감정이 더 있을지.

 한국어에 이미 감정을 설명하는 단어가 몇 백개가 있는 것처럼 인간의 감정은 어떠한 언어로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그런데 독일어는 별의별 단어가 있다). 그 감정들이 모두 모여 나의 신념을 이룬다. 그리고 거의 나와 가깝게 된다(신념만이 나라고 볼 수는 없으니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만, 좋은 행동을 하지 않고 미래에 좋을 행동을 할 수도 있다. 라일리처럼. 목표에만 몰두하다가 지금 내 옆에 있는 것들을 보지 못하기도 한다.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도 좋지만 그 길에 핀 꽃들을 구경하거나 잠깐 딴 길로 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사람들이 조언하는 이유는 그들이 아마 저 멀리에 있는 목표만 보고 달려본 적이 있어서일 것이다.

 나를 포함한 성인(어른인지는 잘 모르겠다)들이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울거나 몰입하게 되는 이유는 그 때문이지 않을까. 엔딩크레딧의 거의 마지막의 마지막에 제작진들은 관객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this film is dedicated to our kids.
we love you just the way you are.

 있는 그대로를 사랑한다고. 여기에서 아이들은 라일리 또래의 아이일 수도, 더 어릴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일 수도 있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연스러운 우리. 자연스럽게 감정을 표출하는 우리. 기뻐 날뛰어도, 슬픔에 젖어도, 멍을 때려도, 짓궂은 장난을 쳐도, 불안해 미쳐버려도 그런 우리여도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우리가 우리를 사랑할 수 있을 때가 이 사랑스러운 나만 바라보는 어리석은 감정들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때가 아닐까. 어차피 이들은 멀리 걷어차버려도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고야 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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