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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몰라 Dec 20. 2023

구두 그게 뭐길래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한 말

 초등학교 6학년 때 이사했다. 우리 집 거실 창문을 열고 바라보면 저 멀리 북한산이 보였고, 조금만 걸어 나가면 다리 아래로 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사한 집에서 학교까지는 버스로 40여 분 가야 했다. 외진 곳이기도 했고 그때는 대중교통수단이 별로 없었지만, 군인 자녀에 대한 배려로 군인 버스로 편하게 등교할 수 있었다. 늘 정해진 출발 시간에 맞춰 나가야 했기에 우리 집의 아침은 늘 분주했다. 

 그날도 똑같은 하루가 시작되었다. 세수하고 엄마가 차려준 밥을 허겁지겁 먹고 교복으로 갈아입은 후 버스가 서 있는 장소로 달려 나갔다.

 ‘오늘은 앉아서 갈 수 없겠다.’

 역시나 예상대로다. 나보다 부지런한 아이들이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난 버스의 중간 정도 위치에 서서 버스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렸다.

 “출발하겠습니다.”

 운전석에 앉아있는 병사는 버스의 문을 닫고 출발했다. 양옆으로 길게 줄지어 서 있는 옷 벗은 나무들을 바라보다 눈을 감고 살짝 열린 창틈으로 슬며시 들어오는 아침 공기를 느끼며 학교를 향해 갔다. 

 시골길을 빠져나와 도로 옆 낮은 상가들이 줄지어 있는 길을 지나치는 순간, 버스가 ‘끼익.’ 소리를 내며 급하게 멈췄다. 버스 옆에서 달리던 승용차가 속력을 내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버스 앞으로 끼어들어 와 멈춰버렸다. 그리곤 다시 혼자 사라져 버렸다. 급정거로 인해 난 손잡이를 놓쳤고 내 몸은 바닥에 툭 쓰러져 버렸다. 바닥에 붙어 있던 나를 깔고 올라선 누군가의 무게에 일어날 수 없었다. 제발 일어나라고 외치고 싶은데 ‘악.’ 소리조차 낼 힘이 없었다. 

 같이 탑승했던 군인 아저씨가 소란스러운 버스 내부 상황을 정리해주셨고 끙끙 앓던 아이들도 하나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들 괜찮았다. 나도 툭툭 털고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생각났다. ‘어젯밤 만든 구두!’ 한 손으로 손잡이를 더 세게 움켜쥐었고, 다른 한 손은 코트 주머니에 넣어 세탁비누를 조각해 만든 구두가 멀쩡한지 확인했다. ‘휴, 다행이다.’ 내가 만든 구두는 잘 살아있었다. 

 학교 앞에 도착했고 내릴 차례가 되었다. 스타킹은 다 찢어졌고 종아리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학생! 병원 가야 할 것 같아. 같이 병원으로 가자.”

 안전관리 책임자였던 아저씨가 내리려는 나를 막아 세웠다.

 “괜찮아요. 저 학교 가야 해요. 진짜 괜찮으니까 저 내려주세요.”

 어리석은 고집을 피웠다. 안 된다는 아저씨와 왜 안 되냐는 여학생의 길고 긴 실랑이는 여학생의 승리로 끝났다. 

 사실 많이 아팠다.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언덕 위에 있는 학교 건물로 향했다. 지나가는 학생들이 힐끔거리고 바닥에 널린 낙엽을 쓸고 계시던 미화 여사님이 휴지를 건네주시며 양호실로 얼른 가라고 재촉하셨다. 애써 웃었고 괜찮다고 했다. 힘겹게 교실에 도착했고 스타킹을 벗고 피를 대충 닦은 후 체육복 바지를 교복 치마 안에 입었다. 코트 주머니에 있던 구두를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려놨고 친구들의 작품도 구경했다. 그날의 오전은 무사히 지나갔다. 

 점심을 먹고 먼 산을 바라보다가 운동장에서 고무줄놀이하는 친구들을 발견했고 밖으로 나갔다.

 “나도 할래.”

 왼발은 땅을 지지하고 있었고 오른발은 친구들이 잡은 고무줄을 넘어서기 위해 하늘 위로 차는 순간이었다. 주저앉고 말았다. 두 눈에서는 투명한 액체가 주르륵 흐르기 시작했고 괜찮았던 내 마음은 괜찮지 않게 되었다. 부축해 주는 친구들을 의지하여 양호실에 갔다.

 “응급처치는 일단 해주는데 당장 부모님께 연락하고 큰 병원으로 가야 해. 지금 당장!”

 전혀 예상치 못한 양호 선생님의 한마디에 두려웠다. 학교 건물 중앙 복도에 있는 공중전화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언니야. 엄마는?” 

 엄마는 외출 중이라 했다.

 “언니가 아침에 교통사고가 났었는데 양호 선생님께서 병원에 가래. 엄마 돌아오면 학교로 오라고 해줘. 절대! 아빠한테는 전화하지 마.”

 동생에게 나의 상황을 전하고 교실 밖 운동장 계단에 앉아 엄마를 애타게 기다렸다. 저 멀리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달려가 안기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학교 근처 정형외과에 도착했고 엑스레이 촬영을 했다. 나의 다리를 이리저리 살펴보시더니 굵은 주삿바늘이 달린 주사기로 무릎에 고인 피 섞인 물을 빼냈다. 차갑고 하얀 석고로 나의 왼쪽 다리를 둘러 줬고 대학 병원으로 가서 추가적인 검사를 더 받으라는 담담한 말과 함께 소견서를 건네주셨다.

 “징징 탕탕탕 둥둥둥 툭 툭툭.”

 정밀 검사를 위해 MRI 촬영을 했다.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어둡고 좁은 터널 같은 곳에 갇혔다. 꽉 움켜쥔 두 손은 땀으로 흥건했고 시끄러운 소리는 내 머리를 울렸다. 소리가 멈추기를 기다렸다.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다. 무릎 부위 인대가 찢어져 뼈와 분리되었다고 했다. 앞으로는 스키나 보드처럼 무릎 관절에 무리가 되는 운동은 평생 할 수 없을 거라고 단호하게 전했던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지금도 또렷하다. 사고 이후 처음으로 무서움을 느꼈다. ‘평생’이라는 단어가 나에게 던지는 힘은 매우 컸다.

 병원 진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양복 입은 아저씨가 나에게 다가왔다. 보험사 직원이었다. 빈 하얀 종이를 건네며 교통사고 경위를 최대한 자세하게 적어달라고 했다. 내가 적는 이 글에 의해 운전기사였던 병사와 책임자로 동반 탑승했던 간부의 처벌 수위가 결정된다는 말이 부담스러웠다. 그때 당시 나의 판단으로는 그 둘에게는 죄가 없었다. 죄가 있다면 갑작스레 끼어들어 잠시 멈췄다 간 그 운전자와 병원에 가자고 하는 아저씨를 뿌리치고 도망치듯 학교에 간 나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나로 인해 누군가 처벌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정성을 다해 A4용지를 빼곡하게 채웠고 “이분들은 죄가 없어요.”라는 말로 끝맺었다. 

 그날은 나의 미술작품 제출이 중요했다. 밤늦게까지 조각칼로 벗겨낸 파란색 구두를 꼭 제출하고 점수를 받아야 한다는 나의 미련하고 어리석은 마음이 내린 결정이었다. 누군가 피해를 보게 될 거라는 생각을 전혀 못 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동생에게 아빠에게는 절대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진술서에 담긴 나의 마음이 잘 전달되어 일은 잘 마무리되었다. 누군가의 순간적 판단이 다른 누군가에게 이유 없는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길고 긴 나의 삶에서 선생님께 받는 점수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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