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처음 받아본 악플의 기록
얼마 전 이런 기사를 보았다.
임윤찬의 최근 공연에 대한 리뷰로, “Is he the Lang Lang of his generation?”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본문을 읽기도 전에 “웬, 랑랑?”이라는 불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리고 꽤 많은 피아니스트들은 랑랑의 연주에 어느 정도 의구심을 지니고 있다.
차라리 그 표정과 몸짓을 꺼버리고 들으면 가끔은 들을 만할 때도 있다. 그의 하이든 소나타에서 느껴지는 위트에, 이 피아니스트가 외적인 욕심을 버리고 음악으로만 승부하면 어떤 특정한 장르에서는 더 많은 음악인들에게 사랑받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될 때도 있었다. 반면 그의 프로코피에프 소나타 7번 같은 것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울렁거림을 유발했다. 장엄한 전쟁 소나타가 지니고 있는 의미는 모두 버려지고, 오로지 피아니스트 자신만 존재하는 연주. 연주자 자신이 음악보다 훨씬 더 앞에 세워져 작품이 가진 의미는 가차 없이 버려졌음이 극명한 연주를 들을 때, 나는 그 연주자를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다.
이것을 취향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애매한 지점이다.
이런 식의 음악적 접근이 어떤 가치가 있기에 그에게 이토록 어마어마한 외적인 성공과 대중적 인기를 보장하게 되었는지, 내키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가 만들어 내는 소리는 그 연극배우 같은 표정과 몸짓에 의해 항상 과장이 되어 있다. 그가 그런 연주를 함으로써 전하고자 하는 것, 또는 얻고자 하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심한 과장을 자주 본다. 기교이든, 음악이든 말이다.
기어이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그런 허황된 몸짓이 청중으로 하여금 그 연주를 ‘보게 하여’ (듣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감탄을 자아내고, 탄성을 끌어내고, 인기를 얻어감으로써 클래식 음악의 팬층을 확산시키는데 기여한 바는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감동과 감탄 중, 그가 청중에게 기대고 있는 것은 분명히 후자이다.
임윤찬의 연주는 랑랑과 완벽히 대척점에 있다.
그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피아니스트가 작품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그 자신을 온전히 바침이 전해온다. 그의 손가락이 얼마나 빠르던, 그의 소리가 얼마나 크던, 그런 1차적인 감탄을 단박에 뛰어넘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있다. 최신식 청소기가 크고 작은 온갖 것들을 순식간에 빨아들이듯 청중을 흡입한다. 가끔 그의 인터뷰를 읽고 있자면, 고작 열여덟 해를 살고 저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그에게 ‘천재’ 말고 뭐 다른 타이틀은 없나, 학계에서 곰곰이 생각해 부여해 줬으면 좋겠다 하는 맘이 든다.
그래서 이 기사의 제목을 보았을 때, 어떻게 이런 제목이 가능한가 했다. 본문을 읽어보았지만, 어떤 관점에서 임윤찬을 랑랑과 관계시켰는지는 한 줄도 나와있지 않았고, 마지막 문장만이 제목과 동일했다. 어디에 댓글 달고 그런 것을 안해보았는데, 그날은 왜였는지, 제목에 동의할 수 없음을 표현한 평범한 댓글을 달았다. 그런데 매우 뜻밖에, 나의 댓글에 ‘한국인의 황당한 인종차별주의를 일깨워 주는 훌륭한 제목입니다’라는 비아냥 섞인 대댓글이 달렸다.
생애 처음 받아본 악플 비슷한 것에 어리둥절하여, 이 상황을 좀 생각해 보고자 했다.
내가 랑랑의 연주를 좋아하지 않는 배경에는 그가 중국인이라는 것은 아예 안중에도 없다.
임윤찬의 연주를 경외함에, 그가 한국인이라는 것은 한 번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 사람의 사고 회로는 어떤 경로를 거쳐 나의 댓글을 무려 인종차별로 결론 냈을까? 랑랑의 음악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댓글이 불편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반성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훌쩍 뛰어 인종차별로 가버리는 통에, 이 사람의 사고 경로를 궁금해할 책임감이 그다지 생기지 않아 생각을 중단하였다.
랑랑의 연주가 점차 달라지고 있다는 말도 듣는다. 나는 요즘 특별히 그의 음악을 들어보지 못해 느낄 기회가 없었으나, 나이가 들고 삶을 살며, 감탄에 머물던 연주자가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음악을 소비하고자 하는 모두에게 득이 되는 일이다. 그의 최근 연주를 일부러라도 찾아 들어보아야겠다. 나의 댓글이 랑랑의 최근 변화를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심한 실수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누군가의 비틀어지고 왜곡된 사고 속에 졸지에 얼토당토않게 인종차별주의자로 비추었다는 당황스러움을 지속하는 것보다, 랑랑 같은 빅네임의 연주가 묘기에서 음악으로 변해가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 편이 훨씬 의미 있는 일일 테니까 말이다.
그전에 마음속 일었던 잠시의 소란을 뒤로하고 임윤찬의 쇼팽을 먼저 듣는다.
참내, OO of his generation이라는 말은 처음부터 얼마나 어리석은 말인가. OO 자리에 누가 온다 해도 옳지 않다.
그는 이미, 18세 그 이름만으로 충분한, 이 시대의 임윤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