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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죰 Dec 28. 2018

스웨덴에서 만난 내 리틀 포레스트

도심에서 20분, 슈퍼마켓도 자동차도 없는 작은 섬에서의 사흘 - 1

강남역은 내가 한국에서 제일 싫어하는 장소다. 이곳은 자연스러움과 반대되는 모든 것의 집합이다.  푸르름을 조금도 볼 수 없는 빼곡한 빌딩숲과 차와 매연.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 특히 긴장을 놓는 순간 바로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가도 사과 조차 못하는 여유를 가진 사람들.


모든 것에 잠시 '일시중지' 버튼을 누르고 싶었다. 몇주 전 충동적으로 주문해버린 추석휴가 간 스톡홀름 비행기표가 손에 쥐어졌을 때 나는 도심에서 떨어진 '군도'(Archipelago) 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북유럽의 베네치아라고 불리우는 스톡홀름엔 주변부에 보트로만 연결되는 작은 섬들이 있어, 도심과 가까우면서 아주 단절된 생활을 할 수 있는게 장점이다. 이런 어떤 장소가 아주 완벽해 보였다.



#자동차도, 가로등도, 수퍼마켓도 없는 스토어홀멘 섬(Storholmen)


중앙역에서 10분 거리에 근처 섬으로 떠나는 항구인 'Ropsten'역으로 향했다. 역에서 조금 걸어가 다리 아래 선착장에서 고요한 물결을 응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흰 페리가 도착했다. 스웨덴 국기가 달린 하얀 페리였고, 배가 닿을때마다 멋진 금발 청년이 직접 닻을 세우고 내렸다. 페리를 탔는데, 혹여나 짐이 도난 당할까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워낙 사람이 드문 페리였고, 이 섬으로 향하는 관광객이 나밖에 없다는 안도감에 바깥 경치가 보이는 선미로 나아갔다. 펄럭이는 깃발 아래로 물살과 탁 트인 풍경이 멋지게 펼쳐졌다.



20분을 달려 도착한 섬의 이름은 Stor (큰) + Holmen(작은 섬) 이다. 크고 작은 섬이라니 이게 무슨 말장난인가 싶지만 실은 아주 아주 귀엽게 작은 크기다. 섬에 살고있는 인구는 백명 남짓, 크기는 에버랜드 부지의 3분의 1이 채 안되는 수준이다. 바다 전망이 눈에 보이고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부엌과 화장실이 딸려있지만 제법 단독주택 모양새를 갖춘 숙소였다. 무엇보다 스톡홀름 중심부에서 30분 거리로 가까운 편이지만 여전히 하루 6회 페리로밖에 닿지 않는 소외된(?) 섬이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속세와 단절을 원하지만 여전히 도시와 너무 떨어지면 불안감을 느끼는 내겐 최적의 선택이었다.


한쪽 면을 제외하고서 집의 모든 삼면은 창문으로 트여있었고, 덕분에 바깥 풍경이 원없이 실내에 담겼다. 해가 지고 뜨는, 바람이 불고 비가 부는 계절감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어 매우 만족스러웠다.



# 내 숙소 지킴이, 턱시도 고양이

온기가 있는 모든 생명은 의지가 되는 법이야! - (리틀포레스트 극 중)


리틀 포레스트 속에서 혜원(김태리)의 무섭고 낯선 시골 생활을 말랑하게 만들어준 주인공은 진돗개 '오구'였다. 리틀 포레스트에서 만난 내 반려동물은 에어비앤비 집 주인의 고양이 '트룰'이었다. 검은 털과 흰털이 멋지지게 조화됐는데, 오동통한 몸집 때문에 귀여움이 배가되는 고양이다. 트룰은 혼자 와있는 나를 아는 건지 머무는 내내 내 곁에 있었고, 나 역시도 고양이가 호기심 어리게 바깥을 탐색하는 모습을 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흔히 '개냥이'라고 불리는, 강아지보다도 더 친근한 고양이었다. 시차 적응이 덜 된 까닭에 새벽에 눈을 떠 테라스 밖을 보면 고양이가 소위 몸을 모두 웅크린 '식빵 자세'로 계단 위에 올라와 바깥 풍경을 응시했다. 잠이 들지 않는 새벽에는 테라스를 살살 긁으며 냐옹~ 하는 소리를 내 들어오고 싶다고 보챘곤 했다. 문을 열어주면 부엌으로 가서 냄새를 킁킁 맡았고, 그렇게 내가 준비했던 로스트비프는 모두 고양이의 몫이 되었다(!).


고양이 덕후 친구에 따르면, 고양이가 꼬리를 세우고 끝부분을 살랑거리는 것은 "친해지고 싶다"는 감정이라고 한다.


마지막 밤, 가로등이 없어 해가지니 까맣게 어둠이 내려앉은 섬에서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너무 무서워 핸드폰 전등에 의지하며 빠르게 뛰고있었는데, 집 근처에 다다르니 검은 물체가 튀어나와 심히 놀랐다. 고양이였다! 정말 동화 속 마법같이, 고양이는 밤길에 어두운 내 눈을 대신해 새까만 어둠을 헤집고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고양이는 정말로 천사가 틀림 없다(!)


아침이 밝고, 떠나기 직전이 되었다. 눈을 씻고봐도 하루종일 집을 지켜준 고양이가 온데간데 없었다. 집주인에게 고양이가 어딨냐고 묻자, "뭐, 호기심 많아서 쥐 뒤를 쫓고있을거에요" 라고 말한다. 어쩐지 쥐를 쫓는 모습을 상상하면 귀엽긴 한데 다시는 못볼 것 같아 눈물이 핑 돌았다. 작별 인사를 못하고 왔다는 설움에 그만 페리 안에서 펑펑 울고 말았다. 내가 동물 때문에, 그것도 3일 본 동물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감수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정말이지 온기가 있는 생명은, (가끔은 사람보다, 비교도 안될만큼) 의지가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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