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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죰 Mar 16. 2019

'더 리더' 영화 속 주인공과 똑 닮았던

글은 싫어했어도, 내 글을 통한 세상을 좋아했던 그 사람

그는 글에 밝진 않았지만 세상 사는 이치는 누구보다 빠르게 파악한 영리한 청년이었다. 떠나오기 전 함께 보던 드라마에서 풋풋한 주인공의 첫 모습을 보고 '청포도 같다'라고 표현한 걸 보고 너무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정말 첫인상에 여름 청포도처럼 푸르고 윤이 나는 사람 같았다. 나중엔 비록 조금은 무뚝뚝하고 피곤한 원래 모습을 찾은 것 같다만, 처음에는 생기가 가득 넘치고 항상 나에 대한 것이라면 모든지 아이처럼 궁금해하던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습이 아득한 먼 과거처럼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한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자락 즈음에 제일 좋아하는 학교 앞 전경이 보이는 카페에 그를 데려갔다. 어둑한 저녁이 훤히 보이는 공간에 켜켜이 쌓여있는 책과 옛 축음기는 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그렇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얘기가 나오다 보니,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가 생각났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그것도 여자가 훨씬 더 많은) 주인공 여자와 남자의 나이를 초월한 불같은 육체적 사랑은 그저 미끼고, 사실은 인간의 악함과 도덕성에 대한 심오한 주제를 전달하는 주제의식 깊은 영화다.


줄거리를 설명하는데 그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게 내 눈을 빤히 응시하며 내 얘기에 집중했다. 나는 신이 나서 아는 지식과 감상을 총동원해서 영화의 주제의식을 전달하려 애썼다. 영화는 흥미진진한 전개로 가다가 문자를 깨우친 여자의 자살로 마감하고 만다. 마지막 비극적 결말을 말해버리고 나니 원체 물기가 많은 그 눈망울에 눈물이 그득 고였다. 그는 "너무 슬픈 거 아니야?" 말하고 고개를 돌려 재빨리 눈물이 찬 얼굴을 감췄다. 물론 그도 당황했겠지만 나도 처음 겪어본 경험이었다. 나를 스쳐 지나간 사람 중 단 한 명도 내 입을 빌려 말한 영화 줄거리에 바로 눈물이 고일만큼 감수성 있는 사람은 살면서 본 적이 없었다.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의 여자 주인공은 비록 문맹이어서 스스로 글을 읽진 못했지만 남자가 생생하게 말로 전달하는 문학에는 진심으로 울고 웃는 사람이었다. 결국 영화는 비극으로 끝나지만, 이 줄거리를 내 입을 통해 듣는데도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걸 보니 그가 '더 리더'의 케이트 윈슬렛과 꼭 빼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글을 가까이하진 않았지만, 항상 내 글은 열심히 읽어주었고 항상 칭찬했다. 심지어는 나는 글을 그저 취미로 끄적거리는 사람인데도 나중에 작가를 하라고 내게 유일하게 등 떠미는 사람이었다. 그는 문학과 뉴스와는 담을 쌓은 사람이었지만 항상 주변 사람과 세상사 안타까운 소식은 그저 듣고 넘기지 못하는 감수성 풍부한 사람이었다. 가끔은 그렇게 글을 멀리하는 그가 싫어서 책을 읽으라 잔소리하곤 했다. 그런데도 내가 추천한 책은 항상 열심히 읽었던 그. 다만 나는 다시 그런 그를 만날 수 없어서, 그런 사람을 앞으로 만날 수도 없을 것 같아서 오늘도 어둠과 적막이 내려앉은 밤 베갯잇으로 눈물을 훔치며 애써 울음을 참는다. 멀리 떠나온 이곳에서 보낸 한 달의 시간에는 그와 함께하지 못한 슬픔이 새로운 추억 사이에 알알히 박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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