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디자이너를 '디자이너'로 만드는가?
<공각기동대>라는 단어를 아는가?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꽤나 유명한 작품이다.
풀이하자면 ‘단단한 껍질 같은 공격용 슈트를 입은 특수부대’를 의미하는 공각기동대는 코믹스, 애니메이션 그리고 실사영화로 까지 제작된 일본의 인기 SF 시리즈이다. 특히나 1995년 제작된 오시이 마모루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유명한데, 미래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매력적인 시각 연출로 사이버펑크의 정수를 보여주는 영화로 평가받는다.
공각 기동대 세계관은 사이보그화가 일상화된 근 미래를 그린다. 한 부위를 대체하는 것을 넘어 온몸을 전자 기계로 바꾸는 게 가능하며, 이를 통해 탈 인간급의 신체능력과 특수기술을 지닐 수 있게 된 시점이다. 그러나 해킹으로 인한 기억 조작 범죄와 비윤리적 행태가 만연한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 하나. 과연 사이보그화의 단계 중 어디까지를 '나'로 정의할 수 있을까? 몸의 한 부분을 바꾼다 해도 나 자신이 ‘나’ 임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뇌 전부가 기계로 대체된다면,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첨단 인공지능에 가까운 존재일 것이다. 다만 그 경계선이 뇌의 50퍼센트를 채우는 순간일지, 혹은 남은 0.1퍼센트의 부분마저 대체될 때인지는 모르는 노릇이다.
작품의 세계관에선 후자를 정설로 바라보며, 제거해서는 안될 조금의 뇌를 인간성의 본질로 본다. 그리고 이를 '고스트'라고 부른다. 고스트는 작중에서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자 정체성의 산물이며, 무엇보다도 지켜야 할 성역으로 간주된다. 작품의 부제이자 진제목이라 할 수 있는 'Ghost in the Shell'은 이러한 진의를 표현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작의 주인공 쿠사나기 모코토는 몸의 거의 모든 부분을 기계로 대체한 사이보그로서, 고스트가 진정 자신의 안에 존재하는지 의문을 품는다. '본연의 나는 사이보그화를 거듭하던 어느 시점부터 죽어버렸고, 오직 전자와 기계로 구성된 모의 인격이 자리 잡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이는 컴퓨터에서 태어난 자아 '인형사'와의 대결에 심화되어, 고스트가 실체 하지 않는 허상이라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인간성에 대한 주인공의 문제의식은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화두로서, 청자들에게 '의식, 고스트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의 여지를 남긴다.
고스트의 존재에 대한 물음은 나에게도 작중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는 머릿속 하나의 상념으로 이어졌는데, 바로 '디자이너'에게로의 대입이다.
디자이너의 고스트는 무엇일까?
고스트란 무언가를 형성하고 정의하는 최소한의 기준이자 핵심 본체로 인식되는 존재이다. 예컨대 컴퓨터의 CPU, 콩나물 국밥의 콩나물, 애플의 사과 로고처럼 말이다. 그러나 디자이너의 경우는 쉽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무엇을 갖춘 상태여야 디자이너를 '디자이너'라 부를 수 있을까. 툴을 다루는 실력? 완벽한 디자인 이론? 모두 중요하지만 이들은 DNA일 뿐 고스트는 아니라 느껴졌다.
이처럼 알쏭달쏭한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 극단적인 상황을 규정해 보았다.
20년 후, 공각기동대와 비슷한 수준의 과학 발전이 이루어진 시점.
'AI가 대체가능하다면, 효율을 위해 그 직업은 인간이 선택할 수 없게 한다'라 는 법안이 의결되었다.
첫날, 만화가와 화가에 대한 통제가 확정되었다. 손도 못 그리고 형태나 투시가 어색한 과거와는 달리, 기술의 발달로 AI가 모든 형태를 그리는 게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작가들은 모두 기획자로 변모한다 선언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디자이너들이 심의에 오르게 되었다. 사용하는 프로그램부터 실물 제작까지 모두 AI가 알아서 진행하는데 사람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의회에게 디자이너의 '고스트'를 내세워 그 필요성을 역설해야만 하는 상황, 당신에게 발언권이 주어졌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말할 것인가?
생각만 해도 살 떨리는 순간이다. 하지만 말해야만 한다. 나는 어째서 AI로 대체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디자이너의 고스트를 '객관 속의 주관'을 가지는 능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언뜻 모순된 보이지만 이는 디자인의 핵심 이치를 꿰뚫는 표현이라 생각한다.
디자인은 때로는 정답을 가지고 있는 학문이다. 사람들에게 선택받는 편한 구조, 일리 있는 배치, 아름다운 형태는 모두 기본적인 조형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근거 없는 효용은 없기에, 디자이너들은 여러 이론을 기반으로 최대한의 인원을 만족시킬 수 있는 형태를 설계해 나간다.
이는 특히나 타이포그래피, 조판술 분야에서 강조된다. 글꼴을 고르고 자간과 행간의 간격을 설정한 후, 제목과 문단을 배치하는 조판 과정은 읽기 규칙과 효율성 모두를 구현해야 하는 난이도 있는 디자인 작업이다. 그 과정에서 디자이너들은 유사성과 연속성, 폐쇄성의 원리 등 '게슈탈트 이론'을 근거로 섬세히 작업에 임한다. 예상 독자를 고려해 판독성과 가독성 모두를 잡아내야 하는 이 과정에서 대다수의 지지를 받는 '정답'이란 분명히 존재한다. 이 같은 경우 AI가 유감없이 성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디자인에는 정답이 없다. 디자인은 조형만으로 이루어진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디자인은 사람 중심의 경험을 재단하여 인간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이다. 조형은 기본이고 더 나아가 '공감'을 구현해야 한다. 굳이 설명하 않아도 마음에 팍 꽂히는 디자인, 계속 기억에 잔상처럼 남는 디자인, 메시지가 기억에 남는 디자인처럼 본능과 육감, 개인의 선택이란 단어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많다. AI가 흉내 낼 수 없는 그 절묘한 스토리텔링으로 취향을 충족하는 것이 디자이너가 충족해야 할 니즈이다.
예컨대 레트로 디자인이 그러하다. 레트로는 과거의 형태를 차용하여 기성세대의 향수를 자극함과 동시에 새로움으로 신시대의 눈길을 사로잡아버렸다. 그들이 조형적으로 완벽한가? 전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완벽하지 않기에 더 각광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정답'이란 없으며 취향에 따른 선택만 존재할 뿐이다. 레트로 무드를 조판 과정에 담는다면 기존의 판독성과 가독성은 조금 해쳐지겠지만, 오히려 일부 마니아층에게 더욱 사랑받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이처럼 디자인은 정답이 있기도, 없기도 한 모순적인 작업이다. 치밀하고 변태적인 계산을 요구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은유 한 방, 개성이 더 뛰어난 효과를 발휘할 때가 있다. 결국 사람과 그 니즈는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자이너는 '객관 속의 주관'을 기른다. 정답이 정해진 분야라면, 어떠한 반박이 있더라도 입장을 단호히 하며 그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를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반대로 정답이 없다면, 본인만의 사고방식, 시선, 그리고 취향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주관적인 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슬기롭게 말하며 상대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능력을 통해 디자이너는 진정한 인간 행복을 추구할 수 있게 되며, 그 과정에서 쌓는 경험치로써 디자이너의 눈, 소통, 공감 능력을 자신만의 성역이자 AI와의 차별점으로 갖게 된다.
눈 : 무엇이 좋고 옳은 건지 아는 것은 물론, 최신 기술과 사회 동향까지 바라볼 수 있는 능력
소통능력 : 추구하는 바를 디자인 언어로 풀어내며 정반합을 이뤄낼 수 있는 능력
공감 능력 : 최선의 경험, '취향 저격'에 대한 인문학적 이해의 능력
디자이너의 고스트가 '객관 속의 주관'을 가지는 능력이라면, 이를 통해 어떤 작업을 해야 할까? 20년 후, 고스트를 지닌 존재로서 무엇을 통해 AI와 차별점을 둘 수 있을까. 바로 '진짜' 작업이다.
진짜 내 작업에 대한 갈망을 이야기할 때, 디자이너는 클라이언트에게 고용된 '을'이 아닌, 창작의 욕구를 발산하지 못해 애가 타는, 작업자로서의 자아를 열망하는 개인이 된다. 그 애탐은 나이와 경력을 넘어선 어떤 이상향을 향한 막연한 동경과도 같다. 1)
디자인의 중요성이 많이 강조되고 있지만, 관련 업계를 제외한다면 디자이너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최대한 싸게 부려 먹어야 하는 용역 업체' 또는 '예술을 어쭙잖게 흉내 내는 기술자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는 틀렸다. 디자이너는 자아를 불여 넣는 '진짜' 작업을 통해 세상을 향해 메가폰을 쥐고 소리칠 수 있는 운동가들이다. 여기서의 진짜 작업이란, 단순한 보정, 편집, 도면, 모델링이 아닌 자신만의 '고스트'를 담은 결과물이다. 차별화된 눈, 소통, 공감 능력이 기반된 작업은 그 자신을 제외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 그리고 그 목적성이 주는 울림 또한 AI의 결과물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들은 하나의 걸작으로서, 미래에도 영원불변한 가치를 가지는 타임리스 디자인으로 기록될 수 있다.
극장판 공각기둥대의 결말에서 쿠사나기는 '인형사'와 고스트 더빙, 즉 일체화를 통해 결합된다. 그리고 이는 인간도, 기계도 아닌 상위 종으로의 진화라는 결과로 낳는다. 그렇게 새롭게 태어난 (신) 쿠사나기가 그제야 온전함을 느끼고, 자유로이 네트 상으로 사라지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쿠사나기와 인형사의 합일은 '진짜' 작업이라는 이상향을 향해 도전하는 디자이너가 발전하는 AI 기술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보여준다. 바로 작업과정에서의 적극적인 활용이다. 나를 대체하여 쓸모를 잃게 만드는 존재가 아닌, 오히려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기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시각이다.
이는 프로그램 분야뿐만 아니라 아이데이션 과정에서도 적용된다. 문제를 이해하고 정보를 습득하며 정리하는 과정, 디자인 개념과 목표를 설정하는 과정, 구현을 위한 방법을 탐색하는 과정 등 모든 단계에서 적절한 AI 사용을 통해 효율성과 창의성을 증대시킬 수 있다. 가령 AI가 제시한 답안을 그대로 활용하는 게 아닌, 완성도를 위한 영감의 재료로서 사용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현재 Chat GPT, Midjounrey, Stable Diffusion 등 다양한 AI 기술이 실무 작업되며 이는 현실이 되고 있다.
정리하자면, 결국 디자이너는 '객관 속의 주관'이란 고스트를 정립하여 진정한 작업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하지만 고스트는 결코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디자이너의 덕목이라 할 수 있는 4가지 요소-손, 눈, 소통능력 그리고 공감 능력 중 어느 하나만 결여되더라도 고스트는 성취될 수 없다. 그렇기에 모든 디자인 학도들은 기나긴 수행에 들어선다.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거듭나기 위한, 단순한 Decorator에서 Designer로 진화하기 위한 고행의 길이다.
나의 브런치 공간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글들을 적으며 나는 내 취향과 시선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이를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와 같은 생각들 말이다. 이러한 작업이 나의 '진짜' 작업에 훌륭한 기반이 될 것이라 믿는다. 20년 후 위풍당당 의회를 빠져나올 나를 기대하며, '디자이너' 무미류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기를 다짐하며 글을 마친다.
1) 권준호, 디자이너의 일상과 실천, 183p, <진짜 내 작업>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