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 여름방학과 겨울 방학은 어김없이 시골 할머니댁에서 보냈다. 그곳엔 손녀를 사랑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강아지, 외양간엔 소가, 닭장엔 닭들이, 주변엔 온통 논밭과 산으로 둘러싸인 그곳이 나는 너무 좋았다. 간혹 심부름으로 혼자 밭에 가야 할 때, 조금 무섭긴 했지만 다람쥐나 꿩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기도 했다. 짐도 있으면서 혹시나 보면 냅다 쫓아가야겠다 생각했던 것 같다. 짐이 없을 땐 무서워서 강아지를 품에 안고 가기도 했다. 발버둥 칠만도 한데 나름 봐주는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 여러 가지 추억이 공존하는 시골의 기억을 사랑한다.
겨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다. 30년 전만 해도, 강릉에 눈이 한번 오면 어른의 허리 정도 높이까지 쌓이곤 했었다. 넓어 보였던 마당에 눈이 가득 채워지면 나는 신이 나서 동생과 함께 다이빙 놀이를 했다. 러브스토리의 영화처럼 뒤로 눕듯이 눈에 풍덩 파묻히는 느낌이 신이 났다. 할아버지는 마당과 집 주변으로 걸을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해 눈을 치워 놓으셨다. 동생과 나는 논으로 뛰어나갔다. 사람 발자국이 없는 새하얗고 넓은 논과 길들이 보였다. 우린 까르르 웃으며 논으로 뛰어가 뒹굴고 발자국을 찍으며 놀았다. 눈이 쌓인 높이가 상당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계단식 논을 따라 내려가며 작은 새들의 발자국, 토끼발자국들을 보며 산까지 올라가 헤집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니 유년시절의 체력은 정말 다이내믹하다.
한창 놀다 집으로 들어오니 아궁이에 장작이 타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께 달려가 고구마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군고구마를 해 먹는 건 아마 친척오빠나 어른들이 하는 모습을 보고 배웠으리라. 그저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포대자루에서 고구마 큰 것과 작은 것 대여섯 개를 가져왔다. 부지깽이로 빨갛게 타는 장작 사이를 헤집으며 고구마를 던져 넣고 장작과 불쏘시개로 덮어놓았다. 작은 의자를 가져와 깔고 앉아 불멍을 시전 했다.
신고 놀던 축축한 운동화를 벗어부뚜막에 올려두고, 할아버지의 커다란 고무신을 대충 신었다. 가마솥 안에는 물을 넣어 불이 활활 타오를수록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장작이 새빨갛게 타는 모습이 너무 예뻤다. 빨간 루비라는 보석 같아서 지켜보는 순간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불도 쬐고 불멍도 하다 보면 잠이 쏟아진다. 차가운 겨울공기와 내 앞의 따뜻한 불의 온도가 함께하는 순간이었다.
슬슬 장작이 다 타고 붉은빛이 꺼지며 회색의 재가 폴폴 날릴 때, 부지깽이를 잡고 고구마를 찾는다. 새카맣게 폭 타버린 고구마를 보며 이것이 돌덩이 인가 싶지만, 잠시만 기다려 보시라. 목장갑을 찾아 끼고 반으로 똑 가르면 샛 노란 밤고구마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입가에 웃음이 지어진다. 살짝 한입 베어문 군고구마는 너무 뜨겁고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앗 뜨뜨~~” 하면서 탄부분을 떼어내다가, 장갑을 벗고 얼굴에, 옷에 검댕이를 묻혀가며 군고구마를 해치웠다. 먹성이 좋다 보니 이걸로 부족했지만, 이따가 밥도 먹어야 하니 참아야 했다. 나는 가끔 심심할 때 할아버지나 할머니께 아궁이에 불을 피워달라고 했다. 불멍도 하고 고구마를 굽는 그 시간이 좋았다. 그래서일까 군고구마를 먹는 순간은 평화롭고 잔잔하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몇 년 후 집이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음이 참 이상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공사를 통해 집을 밀고 빈 터만 남았다. 잡초만 무성해진 그곳이 봐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 머물기도 했던 곳, 젊을 땐 고향이 생각나지 않는다. 나이 들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다른 사람의 말이 신기했는데 이제야 그 말에 공감할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 언젠가 나는 저 땅을 다시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집을 짓고 창고도 만들고 닭장도, 마당과 아궁이까지 새롭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고향을 만나고 싶은 내 바람이다.
도시에서 생활하면서 이젠 아궁이를 찾을 수 없다. 그 시절의 느낌을 재현하기 위해 직화구이 냄비에 고구마를 구웠고 요즘엔 에어프라이가 군고구마를 만들어준다. 이제는 잘 숙성된 고구마 종류만 찾으면 된다. 아무래도 밤고구마보다는 호박고구마의 맛이 끝내줬다. 겨울이 되면 박스째 사놓고 종종 구워 먹었다. 이제는 인터넷만 들어가면 많은 쉽게 구할 수 있다. 동생이 일하는 곳 근처 마트에 군고구마를 팔고 있었다. 굉장히 달고 맛있는데 고구마의 크기도 컸다. 사장님이 고구마를 잘 고르신 걸까, 맥반석 끼계가 잘 구운 걸까 고민하며 한입 베어문다. “음~쏘 스윗~!” 이거지 이 맛이야. 완전 꿀고구마다.
도시에서 지내는 겨울 동안 사 먹은 군고구마 중에 단연 최고였다. 자주 가진 않지만 근처에 가게 되면 한 봉지씩 사 먹는 편이다. 맛이 좋아 빨리 품절이 될 땐 아쉬움을 안고 다음날 더 일찍 사러 간다. 떠오르면 먹어줘야 한다. 무시했다간 며칠 내내 생각나기 때문이다. 고구마로 느끼게 되는 소소한 설렘이 좋다. 한입 먹을 때마다 떠오른다. 유년시절의 즐거운 기억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