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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 생각 Jan 06. 2024

빈집

그 생각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24




내 유년의 앞마당은 넓었다

한지붕 두가족의 집은

이래저래 넓었다

담장을 타고 올라간

살구나무 한 그루

 대문을 지키고 있었고

철 따라 열매도 익었다


뜀박질할 만큼 넓었지만

한약방 할아버지 주인

세사는 우리집도 텅 비어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넓은 앞마당은 내 차지였다

내 차지였던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집엔 아무도 없었으므로

외로움도 무서움도 내 차지였다

어머니는 극장 앞에 있는

식당집에 나가서는

내가 잠든 후에야 들어왔고

아버지도 다음날 깨어보면

술에 절어 있었다


어둑한 부엌에 들어가

가마솥에 넣어둔

여직 온기가 남아있는 고구마와

싸각싸각한 동치미 국물로

점심을 때운 뒤

살구나무에 올라가면

옆집과 건넛집이 훤히 보였다


나무줄기에 올라가

어두워질 때까지 기대 있거나

깜깜해진 후에도 내려오지 않고

어둠이 더할수록

실눈을 뜨고 바라보면

담벼락에 비친 나뭇잎 그림자가

무성영화처럼 어른거렸다


시멘트 옥상과 함석지붕들 너머

무심천에서 불어 온

소소리바람이

자줏빛으로 멍울진

내 눈물 사이를 지나가면

밤하늘 별빛은

내 키만큼 자라지 않았다


내 유년의 앞마당은

그리운 기억이자

기억은 어두운 아픔의 전부

곤궁의 기억, 서러운 전부였으니

그곳엔 아직 주인집 불 밝은

대청마루를 훔쳐보는

자라지 않는 아이가 있다



유년의 기억, 2024, Mixed media, 300mmX330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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