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이야기 2, 마르셀 뒤샹
체스를 너무나 사랑해서였을까?
20세기 초, 예술을 마치 게임처럼 향유하며 에로티시즘에 잠식됐던 천재.
그는 혁신가로 예술가의 위상을 높였고 예술의 개념을 재정립, 미술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뒤샹에 따르면 회화는 속임수, 일종의 허상이다.
즉 회화가 보여주는 형태와 색은 진실과 무관하다는 것. 그래서 예술은 더 이상 재현이 아닌 일종의 정신의 구현으로 나아가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예술가는 왕이나 교회, 귀족의 후원을 받아
그들의 요구에 충실한 작업을 완수하던 기능인에서
작품을 명명하고 작품에 아이디어를 불어넣는 신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사진의 발명으로 미술계에는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급변하는 세계의 흐름을 탄 미래주의가 선언(1909)된다.
현대과학문명의 ‘속도와 역동성‘ 을 새로운 차원의 미로 계승, 구현하려는 움직임였던 것.
이렇듯 모던시대의 예술 양식들은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사회를 '예찬 혹은 비판'하며 빠른 속도로 등장과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뒤샹이 모국인 프랑스 보다 빠른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던 미국에서 더 활발히 활동하고 각광받았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도 모르겠다.
이 시기 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목도한 일부 예술인들은 전쟁의 광기에 대한 저항으로 기존체제와 전통미학을 부정하는 반예술운동을 펼친다.
그 가운데 미적 허무주의의 성격을 띤 다다이즘이 등장하는데 뒤샹의 초기 작업이 입체파와 미래파가 어느 정도 혼재된 형태를 띤 덕분에 그는 일찍부터 인정을 받아 뉴욕 다다의 중심인물이 된다.
그리고 이후 초현실주의에서 개념미술에 이르기까지 두루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이브클랭과 피에로 만초니와 같은 똘끼와 상상력으로 무장한 예술인들이 무제한의 도전과 실험의 장을 펼치는 데 있어 도화선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1917년 그는 뉴욕 독립미술가협회 전시회에
‘리처드 머트’라는 가명이 적힌 남성용 소변기를 제출한다. 이 사건은 작가가 전시를 위해 임의로 선택한 레디메이드가 어떻게 예술작품으로 탈바꿈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 예가 된다.
기성품을 구입해 본래 지니고 있던 제품의 기능적 의미를 상실시키는 엉뚱한 장소에 가져다 두면, 본래의 목적성을 상실하고 사물 자체의 무의미함만 남게 된다. 대량생산된 물건에 불과한 소변기가 작품이 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작가가 픽해서 전시장이라는 특정 공간에 둠으로써 무의미함만 남은 사물에 새로운 제목과 관점을 부여했다는 데 있다.
‘제작’에만 의존하던 작품의 탄생이 제작과 무관한
‘선택과 전시’만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작가의 ‘행위’ 자체가 작업의 ‘결과물’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고 작가의 ‘명명’만으로도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었다. 이 모든 과정의 핵심은 레디메이드를 예술품으로 만드는 작가의 아이디어다.
뒤샹을 포함한 다다이스트들은 이전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목적성이 결여된 자기 전복적 작업들을 줄지어 선보였고
뒤샹은 우리에게 익숙한 예술적 특성 - 미 의식, 작품제작, 고도의 숙련된 테크닉- 이 제거됐을 때
과연 미술은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진한 질문을 던졌다.
이 천재의 도발적인 예술언어는 시대와의 소통에 성공했는가?
적어도 그는 정체성에 위기를 맞고 길을 잃을 뻔한 예술계에 영감과 비전을 불어넣어 준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견고했던 전통 예술의 맥락을 뒤틀고
예술의 가능성을 무한으로 확대한 마르셀 뒤샹!
그는 시대에 앞선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 낸 진정한 예술가였던 것이다.
우리는 마치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창조주와 같은,
여장을 한 모습의 뒤샹을 기억한다.
기존 미학을 부정하고 작품 자체에 대한 정의와 제작의 목적, 미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진 그는
철저히 전복적 인간으로 20세기의 예술을 새로운 언어적 유희와 흥분으로 몰아넣은
부인할 수 없는 현대미술의 공헌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