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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Oct 24. 2024

동경으로

소설

* 해경과 유정이 여성 인물로 나옵니다.




  거리엔 안개가 자욱했다. 해경은 안개 끼인 날을 좋아했다. 안개 속에 있으면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은 불행의 날을 향해 난 지루하고 지루한 길이었다. 안개 속에 있으면 오히려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후회를 하기 위해 뒤를 돌아봐도 보이는 것이 없고, 다가올 미래를 두려워하려고 해도 공포의 대상이 보이지 않았다. 해경은 며칠 전부터 마음 속으로 유정의 집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빈손으로 가기는 뭐해서 가는 길에 배 십 전어치를 샀다.


  자신을 위한 마코 두 갑도 샀다. 안개처럼 자욱한 가난을 풍기는 누옥들이 늘어선 좁은 골목은 악취가 진동했다. 해경은 유정이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것이 순간 기가 막혔으나 곧 자신도 비슷한 사정이라는 생각에 헛웃음으로 마무리했다. 집집마다 문은 닫혀 있었다. 겁에 질린 것처럼. 안에 사람이 사나 의심이 갈 정도였다. 유정의 망해가는 육신이 기거하고 있는 집도 더럽고 추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해경은 어두컴컴한 집 안에서 유정을 만날 수 있었다. 유정은 자신 못지 않게 야윈 모습이었고 눈가엔 마르지 않은 눈물이 눌어붙어 있었다. 해경은 유정에게 배 십 전어치를 건네어주며 각혈은 여전하냐고 물었다. 여전하다는 대답이었다.


  치질은 여전하냐고 물었다. 여전하다는 대답이었다. 유정아, 나는 드디어 신념을 잃었어.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만한 희망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내게는 폐병균과 나를 먹여 살린다는 이 군, 그리고 술 뿐이야. 해경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유정에게 죽자고 할 생각으로 왔어. 유정은 해경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해경의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 멍한 반응에 답답함을 느꼈는지 해경은 다시 유정에게, 유정이만 싫다지 않으면 오늘 밤에라도 즉시 치러버릴 작정이야 하고 조금 힘을 주어 말했다. 유정은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제 저고리 고름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더니 태산목처럼 깨끗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진작 모든 희망을 잃었어. 너는 그걸 오늘에야 잃었단 말이야? 그 말에 해경은 은근히 화색이 도는 얼굴로 유정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 유정의 엷은 소맷부리에 담뱃재가 떨어졌다.


  “너와 나. 시인 가운데 쌍벽, 소설가 가운데 쌍벽. 천재 여류 시인과 천재 여류 소설가의 찬란한 정사! 어때, 끌리지 않나?”

  “글쎄, 잘 모르겠어.”

  “패기가 없군.”

  “이게 패기의 문제인가. 패기가 있다면 죽는 쪽이 아니라 사는 쪽을,”

  “이렇게 살아서 뭐하냔 말이야. 너와 나는 끝났어. 불행의 끝까지 왔다고. 아직도 모르겠어?”

  “네 꽁트식 화술은 이제 질려. 솔직하지 않은 동무와는 말하고 싶지 않아.”

  “흥.”

  “솔직히 말해봐. 내가 처음이 아니지, 그런 거지?”

  “무어가.”

  “네가 함께 죽자고 한 이가. 정말 나에게만 제안했어?”

  “아니.”

  “거봐.”

  “두번째면 어떻나? 세번째면 어떻고.”

  “당연히 달갑지 않지. 누구였나?”

  “궁금하지두 않으면서.”

  “궁금해.”

  “옛 애인.”

  “이 군이 아니라?”

  “이 군은 모르지.”

  “뭐라 거절하든? 거절당했으니 내 차례로 넘어왔겠지.”

  “약혼녀가 있다고.”

  “그래서 못한다디?”

  “얘 그만하자. 소설 쓸 때 너와의 만남을 넣으려 했는데 이래가지곤 쓸 수가 없겠어.”

  “꽁트식 소설에는 가능하겠지.”

  “그래. 돈을 벌기는 그런 소설이 좋아. 몇몇 동무에게 엄중한 경고를 받기는 했지만.”


  유정은 소맷부리에 떨어진 담뱃재를 툭툭 털고 병색인 얼굴을 들어 해경을 들여다보았다. 해경도 잠시 아무런 생각도 않고 유정의 병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정말 오늘 밤이라도 죽고 싶은 마음이 있어. 해경이 말했다. 유정은 알고 있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해경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죽는 건 무섭다고. 그럼에도 해경에겐 정말 오늘 밤이라도 이 삶의 불행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마음만이 있었다. 해경은 갑자기 자신이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안개가 자욱한 거리를 그녀와 나란히 걸으며 그녀에게 “영경 윤돈이 이렇다지요? 이런 날씨만 계속 이어진다면 정말 죽음의 유혹을 받기 쉽겠습니다.” 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해경은 기억할 수 없었다. 해경은 유정이 함께 죽어준다면 동경행을 포기하고 죽을 생각이었다. 어쩌면 해경이 유정을 찾아온 이유는 유정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해경은 망가진 폐 속으로 안개처럼 뿌연 연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이 군에게 이별을 고하고 영경 윤돈을, 아니 동경을 간다. 희망이 없음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희망이란 것을 찾아본다.


  해경은 잠잠한 유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유정은 울고 있었다. 해경은 모든 게 엉망이라고 생각했다. 저고리 고름을 움켜쥔 유정의 야윈 손등 위로 눈물이 똑 떨어졌다. 유정은 뒤를 돌아 앉더니 주섬주섬 제 옷고름을 풀어 저고리를 벗었다. 날개뼈가 하도 도드라져서 꼭 날개가 돋아나려고 하는 것 같았다. 해경은 담배를 들고 멍하니 유정의 등을 바라보았다. 시체 몸 같지? 유정이 말했다. 해경은 얼른 아니라고 답했다. 하지만 유정의 몸은 이미 생명이 꺼져가고 있었다. 마를수록 날개가 나려 한다. 이거 참 신기한 일이지. 해경아, 나는 이게 비상의 날개라고 믿어보련다. 유정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해경은 살고자 하는 유정의 의지가 아프면서도 부럽기도 하였다. 얼른 입어, 춥다. 해경은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응, 하고 대답한 유정은 저고리를 천천히 입고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런 말도 없었다. 두 사람의 얼굴은 지치고 슬퍼 보였다. 해경이 먼저 조금 밝은 얼굴로 나 동경 간다, 하고 말했다. 유정은 예상대로 말렸다.


  다시 보기 어려울 거야.


  해경은 슬픔을 감춘 미소를 지었다. 너무나 무모한 길이라고, 우선 몸을 돌보고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되면 가도 늦지 않는다고 유정이 거듭 만류했지만 해경은 듣지 않았다. 내 몸은 낫지 않아. 해경은 쓴 찻물을 삼키는 기분으로 말했다. 그러자 만류하던 유정도 잠깐 멈칫했다. 해경의 담담한 눈빛은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희망을 찾아볼게. 해경의 각오는 장난처럼 거짓처럼 들렸다. 그 믿음직스럽지 못한 약속에 아무도 웃지는 않았지만, 더는 심각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더는 심각한 분위기가 유지되지 못했다. 유정은 해경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죽지 마, 라고 말하려던 걸 서로의 처지를 깨닫고 몸조심해. 로 바꾸었다. 해경도 그런 유정의 마음을 느꼈다. 해경도 친우를 두고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비상의 욕망을 거스를 수 없었다. 얻은 것도 그렇다고 잃은 것도 없는 아름다운 만남을 뒤로하고 해경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저녁 거리엔 안개가 자욱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죽은 게 아니라는 말이 입안에서 자꾸 맴돌았다.









-왜 여성으로? 안 해본 거 해보고 싶었다

-이상 <실화> 내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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