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각, 거리, 가구의 추위 등
목발의길이도세월과더불어점점길어져갔다.
신어보지도못한채산적해가는외짝구두의수효를보면슬프게걸어온거리가짐작되었다.
종시제자신은지상의수목의다음가는것이라고생각하였다.
설움의 시를 지은 다음 다시 표정을 가다듬고 책상 앞에 앉아 이상 시 전집을 펼쳤다. 그렇게 빨리 괜찮아졌느냐고? 그럴 리가 없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되뇌면 언젠가 괜찮아진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긍정을 지향하자. 방황 말고 사유를 지향하자. 지금 소설을 쓰면 늘 쓰던 종류의 자기 위안적 소설이나 쓰게 될 것 같아서 과감히 소설에 대한 미련을 접고 이상 앞에 앉았다. 이상이 꿈에라도 나와 나에게 오감도를 좀 설명해주면 좋겠다. 인간이란 존재가 식물과 같다고 생각한 이유를 슬쩍 알려주면 좋겠다. 시론을 좀 남기시지 그랬어요! 속으로 몇 번이나 투정부렸다.
됐다. 이상은 여태 단잠에 빠진 채라 그의 독자들에게 자신의 작품 세계를 찬찬히 설명해주는 친절을 베풀지 못하지만, 나를 포함한 연구지망생들은 선행 연구자들의 해석과 설명을 통해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나는 600쪽이 넘는 이상 시 전집을 읽으면서 권영민 교수의 해설에 기대어 조금씩 이상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애초에 나는 이상을 수필과 소설을 통해 좋아하게 된 케이스이기 때문에, 시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겨우 일회독을 끝낸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꾸준히 재독하면서 이상 시 문학에 대한 나의 시야를 넓혀가야 할 것이다. 조심스레 다문 입술에서는 어떤 말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권영민 교수의 설명을 통해 이상이란 사람이 추구하고자 하였던 문학 세계의 전모를 어렴풋하게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아직 배움이 여물지 않았으므로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으로 넘기고, 나는 오늘 이상의 미발표 일본어 시 몇 편을 감상해보려고 한다.
이상의 시는 일본어 글쓰기의 영역에서부터 출발하였다고 한다. 이상 시 전집 뒤편에 수록된 권영민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그대로 옮겨보면) 이것은 일제강점기에 정규 학교 교육 과정에서 습득한 일본어 글쓰기의 결과이기도 하고, 식민지 지배 제국의 언어를 통해 전유하게 되는 새로운 문학적 상상력의 도전이기도 하였다. 정규 학교 교육 과정에서 조선어 글쓰기를 자유로이 배울 수 없는 억압적인 시대 상황으로 인해 이상은 습작 단계에서는 일본어로 된 시를 많이 썼던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그가 문단 진출을 이루고 본격적인 문필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자연스럽게 모국어 글쓰기로 회귀하였다는 점이다. ‘검정콩 푸렁콩’의 맛깔스러운 발음을 사랑한 뼛속까지 조선인 이상. 이상의 조선어는 애처로운 흙 냄새가 나기보다는 도시적인, 미래적인 향기가 난다.
미발표 일본어시라고 했으면서 위에 인용해둔 시의 전문은 조선어로 되어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당연히 번역이 되었다. 임종국이 시인의 사후 시인의 사진첩 사이에 잠들어 있던 미발표 일본어시 9편을 발견하였고, 1956년 『이상 전집』을 펴내면서 그 9편을 번역하여 일본어 원문과 함께 실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들을 모두 우리말로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이 글을 열어본 사람들이 나의 문장보다는 먼저 이상의 시를 접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글의 시작부터 바로 시를 인용해두었는데 「척각」이라는 시이다. 척각은 '외짝다리'라는 뜻이다. 시적 화자는 외짝다리의 불구자이기 때문에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하고, 수목과 같이 자라나는 생장의 힘을 억제하지 못하여 새로이 신발을 사서 신을 때마다, 신을 수 없는 한쪽 신발은 구제될 수 없는 존재의 잉여처럼 산적해간다. 쌓여간다. 살아갈수록 슬픔이 쌓여가듯이. 살아갈수록 쌓여가는 신발의 거대한 무덤은,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시인의 산적된 절망의 크기처럼 와닿는다.
―여인이출분한경우―
백지위에한줄기철로가깔려있다. 이것은식어들어가는마음의도해다. 나는매일허위를담은전보를발신한다. 명조도착(明朝到着)이라고. 또나는나의일용품을매일소포로발송하였다. 나의생활은이런재해지를닮은거리에점점낯익어갔다.
「거리」는 임종국이 찾아낸 이상의 미발표 일본어시 9편 가운데 내게 딱히 매력적으로 와닿는 시는 아닌데, 그래도 마지막 구절이 마음에 들어서 제외하지는 않았다. 이 시를 쓸 적에 시인의 마음은 재해지였나보다. 왜 사랑은 인간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걸까. 마음이 재해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이란 감정을 취하지 말아야겠으나 인간은 또 그렇게 살 수는 없다. 인간은 사랑이 필요하고, 특히 육체적 취약성에 노출된 병자의 마음은 더욱 간곡히 기댈 곳을, 혼자가 아닌 감각을 간구한다. 여인의 정체는 아마도 이상의 첫사랑인 연심이(금홍이)라고 보이는데 반드시 그런 단일적인 해석을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금홍이를 모티프로 두고 시인의 내밀한 시적 상상력이 빚어낸 가상의 여인일 수도 있는 것이다. 가상의 여인은 금홍이기도 하면서 금홍이가 아니기도 하다. 실재하는 인격으로서의 그 사람과 교묘하게 분리된 가상적 존재로서의 그 사람을 빚어내는 이유는 더 자유로운 미화, 더 자유로운 폭로, 더 자유로운 감정 교유 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에서 여인은 달랑 '여인이 출분한 경우'라는 구절 속에 등장하는 것이 전부이지만, 나는 이 여인에게서, 절름발이 남편과의 생활에 짓눌려 몸부림치던 「지비」의 아내가 겹쳐 보인다. 절름발이는 물론 비유적 표현이고 그는 이상이다.
(……) 아내는 날을줄과 죽을줄이나 알았지 지상에 발자국을 남기지않았다 비밀한발을 늘버선신고 남에게 안보이다가 어느날 정말 아내는 없어졌다 그제야 처음방안에 조분내음새가 풍기고 날개퍼덕이던 상처가 도배위에 은근하다 헤뜨러진 깃부스러기를 쓸어모으면서 나는 세상에도 이상스러운것을얻었다 산탄 아아아내는 조류이면서 원체 닻과같은 쇠를삼켰더라그리고 주저앉았었더라 산탄은 녹슬었고 솜털내음새도 나고 천근무게더라 아아
―「지비」 부분
「지비」의 아내와 「거리」의 여인은 겹쳐 보인다. 막을 수도 없고 막아지지도 않는 아내의 잦은 출분으로 인해 재해지가 되어가는 남편의 마음은, 그 안에 분노나 절망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용된 「지비」에서 드러나듯 미운 아내지만 그런 아내에 대한 짠한 마음과 고통스러운 자기 혐오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뒤섞이고 있지 않을까. 시적 화자의 '허위를 담은 전보'를 받는 수신인은 누구일까. 출분한 여인일까. 출분한 그녀가 수신인이라고 한다면 '명조도착'을 서두르는 의미가 전혀 없을 것이다. 내일 아침 일찍 여인의 무료한 데스크 위에 허위를 담은 전보를 올려놓은다 한들, 여인은 출분한 상태이기 때문에 화자의 전보를 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화자의 허위는, 여인과의 애정이 식어들어감을 숨기는 방향의 전보일까, 아니면 그럼에도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을 숨기고 식어들어가는 마음의 도해를 그려보낸 냉정한 온도의 전보일까. 어느 것이 그의 허위일까. 물론, 수신인은 여인이 아닌 제삼자일 수도 있다. 여인과의 망해가는 생활로부터 비롯되는 내적 방황과 피폐한 감정을 이성으로 누르고 괜찮은 척을 하는 것도, 명백한 허위의 실현이다. 허위를 담은 전보는 받는 사람에 대한 기만이기 이전에 자기 자신에 대한 기만이다. 「지비」도 슬프고 「거리」도 슬프구나. 두 작품을 놓고 보니, 아내로 인한 시인의 고통스러운 마음은 「지비」의 눈물겨운 마음에서 「거리」의 바싹 타버린 재해지 같은 마음으로 점차 이동하였다는 것이 문득 눈에 들어온다.
아내더러, "이곳에 출구와 입구가 늘 개방된 네 사사로운 휴게실이 있으니 내가 분망중에라도 네 거짓말을 적은 편지를 '데스크'우에 놓아라" (「무제」) 라고 했었던 이상. 그건 거짓말을 담은 편지라도 읽고 싶은 미련의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그런 말마저도 재해지에 낯익어가는 마음이 지시한 '허위'의 표현에 불과하였을까.
건너뛰자. 나중에 또 다루게 될 기회가 오겠지. 단 한 편을 더 볼 수 있다면 「최후」가 적당하겠으나 괜히 변덕을 부리고 싶으니 다른 작품으로 해야겠다. 그러면 일단 「최후」는 아니고, 내가 무척 무척 좋아하는 「수인이 만들은 소정원」도 건너뛰고, 24세 때 맏아들인 자신을 낳은 어머니처럼 24세인 자신도 무엇인가를 낳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육친의 장」은 그 은은한 초조의 마음이 짠하기는 하지만 일단은 넘기고, 첫눈에는 희화적이었으나 부제로 붙은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가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뜻인 것을 알았을 때 뒤통수를 댕 하고 한 대 맞은 것 같았던, 아주 독특하고 문제적인 작품인 「내과」는 다음에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참고로 「내과」는 시인의 병원 체험과 관련된 작품이다. 겉은 빨간데 속은 하얀 사과처럼, 붉은 피에 물들지 않는 하얀 뼈를 가지고 있는 인간의 육체적 특성에 주목한 「골편에관한무제」도 재미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시인이 찾아낸 인간의 '식물성'이란 뭔지, 하이얀 것이 붉은 것에 물든다는 의미는 무엇이며, 물들지 않는 속성을 인간과 공유하고 있는 석류와 사과는 어떤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 더 많이 고민해봐야 한다. 「아침」은 시적 맥락이 「거리」와 유사하므로 이 글에서는 굳이 다루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화합하지 못하는 화자와 화자의 여인이 등장하는데, 「거리」보다 다른 작품(소설)과의 연관성이 짙게 드러난다.
이 시를 마지막으로 보고 나는 집에 갈 것이다. 앞에서 너무 많은 말을 해서, 뭔가 막 말하고 싶은 기분은 시들해졌다. 그냥 저무는 노을을 바라보듯, 쌀쌀한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식물의 부드러운 몸을 관망하듯 멍하니 시와 잠시 눈 맞추는 시간을 독자에게 제공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나도 그러고 있다. 시라는 것은 구구절절한 해석보다도 처음 눈맞춤의 순간 자신의 마음속에 흘러오는 감각과 인상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내가 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상의 숨은 시와 처음 눈맞춤을 가졌던 순간에 나는 짠한 마음을 넘어서 어떤 희망을 느꼈던 것 같다. 도시의 핏줄과 같은 네온사인에 네온가스가 흐르는 현상 자체는 브레이크에서 점점 발을 떼는 도시 문명의 발전을 연상시키기에 희망을 느끼게 하지는 않지만, 다만 무엇이 흐른다는 것, 그 부드러운 흐름의 이미지가 화자의 몸 속을 휘도는 수명의 흐름과 이어지며 나는 생의 은은한 위로를 느낀다. 시인은 아프다. 폐병쟁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그로 인한 울분은 때때로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하고 하늘을 향해 외치고 싶게 만든다. 그러나 어느 조용한 시간 시인은 자신의 몸 속을 휘도는 수명의 부단한 흐름에 가만히 귀 기울인다. 이 수명이란 놈의 흐름이 멈추지 않는 한,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다. 이리도 부단히 움직이는 수명의 흐름은 쉬이 그칠 것 같지 않다. 그칠 것 같지 않다.
밤마다 네온사인의 불빛을 밝히는 네온가스처럼.
시인은 가만히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유한한 운명 자체가 슬프기보다는, 각자의 유한한 운명에 도달하는 과정의 고단함이 짠한 것 같다. 그는 짠한 걸 넘어 조금 슬펐지만. 나는 「가구의 추위」를 읽으면 이상하게 체온이 적당스러워지고 희망을 향한 감미로운 기다림을 시작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난다. 그 시점에 나는 이미 희망을 얻은 것이다.
참고 자료
권영민, 『이상 시 전집』(민음사,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