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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Dec 08. 2024

어쨌든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운문과 산문 사이


여자가 남자의 허망한 폐허에서 살게 된 날 여자는 점쟁이의 예언을 기억하고 있었다 산통을 겪는 우주의 머리칼을 조용히 넘겨주던 손이라며 자신의 손을 여자에게 오래 보여주던 다정한 얼굴의 점쟁이 늙은 점쟁이 그 노파는 여자에게 노래를 흥얼거리는 습관을 잃어버릴 거라고 했다 그리고 오래된 습관을 유괴당하듯 상실하는 아픔은 알을 도둑맞은 붉은머리새의 망연한 심정을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그런 다정한 걱정까지


노래를 흥얼거리는 물빛 습관만을 도둑맞은 것이 아니었다 옛날에는 그러니까 남자에게 오기 전에는 시름에 겨워 우연히 기댄 창가에서 자주 보름달에 사는 선녀가 목욕하는 장면을 보고는 했는데 응어리 같은 안개가 보름달을 가려버렸다 언제부턴가 보름달의 천진한 보조개에 고인 연못에서 말없이 몸을 씻던 선녀의 하이얀 등줄기를 오래 바라보던 밤들 이제 선녀의 고단한 마음을 이해하게 된 여자의 앞에 풍랑의 침묵처럼 교교히 타오르는 검은 영혼 한 개 그런데도 웃음을 알고 쉰 고사리를 그리는 솜씨가 좋았다 죽은 것들을 그리는 솜씨가 좋았다 눈알 빠진 개구리 같은 거


봄의 아우성, 포물선의 곡예 흐드러지는 미류나무의 밤에 여자는 카펫 위에 시체처럼 누워 간곡한 욕망을 음송하는 남자를 추슬러 목욕이나 하자고 나긋나긋 꼬드겼는데 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아 거두며, 수많은 비밀을 봉쇄한 목소리로, 나랑 사는 거 재미없지? 했다 여자는 어린 시절부터 되풀이한 흥얼거림의 물빛 가사를 잊어버린 혀끝의 아릿한 낭패감과 더는 우연히 훔쳐볼 수 없는 선녀의 통곡 같은 등줄기의 요염함을 떠올리며 멍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폐허의 숨결이 아릿하게 휘어지며 눈에 띄지 않는 벽면에 금이 갔다 황홀한 표정의 벽지가 찢어져 내렸다 남자는 여자에게, 아무리 재미 없어도 당신이 나를 목욕시켜주는 것은 안돼 그건 누가 사랑을 휘두르냐의 문제니까 말이야, 사뭇 진지한 안개의 어조로 어스름하게 경고하는 것이었고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사납게 고요한 눈빛에서 분노의 기지개를 보지는 못했기에 애써 끌어올리는 미소로 상황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잃은 것이 있는 자만이 사나울 수 있다, 죽어가는 별이 말해주었다 눈알 빠진 개구리가 기어다니는 기묘한 밤의 잠 속에서 여자는 어지러운 꿈을 꾸는 밤이면 거울 앞에 오랫동안 앉아 잃어버린 휘파람의 시를 불러내는 입술의 노력을 멀겋게 관망하다가 어린 날의 산호빛을 매끄러운 붉음으로 천천히 덮었다 사악하고 애잔한 붉음, 붉음은 그런 색이야, 귓가에 속삭이던 관능과 경건 사이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그 목소리에서 끝이 부서진 오래된 지붕과 무너져도 무덤 같은 모양으로 버티는 비릿한 토담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천천히 스르르 잠의 세계로 미끄러졌다 터질 듯이 붉은 입술, 고요한 바람, 한 사람의 목욕물이 된다는 것


한 사람의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종이가 된다는 것, 특별한 악효가 없는, 그러나 곁에 있으면 안심이 되는 알약이 들어있다고 믿어지는 약봉지가 된다는 것, 한 사람의 한 사람이 된다는 것


생각이 많은 여자에게 봄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었다 여자는 남자가 사준 아름답고 무용한 화장품들을 죄다 뒷마당에 묻어버렸지만, 단 하나, 지극한 붉음으로 현혹하는 립스틱은 어지러운 꿈을 꾸는 밤을 대비하여 화장대 두 번째 서랍 안쪽에 숨겨두었다 곤하게 자라고 서랍을 닫아두었다 여자는 사랑에 대한 모든 역할을 남자에게 일임했으나 남자는 칼을 잡아본 적 없는 사람처럼, 사랑을 잘 휘두르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능숙하지 못한 솜씨에서 백조 같은 절제를 보았고, 남자의 어두운 눈동자 속에는 진통을 겪는 우주의 신음이 휘파람처럼 떠돌고 있었다 강하고 약하구나, 어리고 성숙하구나 여자는 숨소리 없이 숙면하는 남자를 눈에 담으며 읊조렸다 창가에서 영혼의 머리카락처럼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속삭임의 영혼처럼 조심스러운 바람이


누가 사랑을 휘두르냐의 문제니까 말이야, 담담한 비린내 나는 자존심의 한 경고가 여자의 구십 구가지 행동을 무력화시켰다는 것을 꿈에서 독거미를 유혹하는 남자는 알지 못했다 남자가 유혹하는 것들은 죄다 남자의 목숨을 잡아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죽음의 눈동자를 빛내는 것들이었다 여자는 남자가 무력화시키지 못한 남은 한 가지의 행동을 남자의 건조한 왼뺨에 나비같이 장난스럽게 저지른 후 은은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서서히 차가워졌다 입을 맞춘 후에 입술이 아릿한 것은 당신과 나의 인연이 한참 잘못되었다는 의미겠지 여자는 입술 가녘에 고인 고요한 사나움을 손끝으로 훑으며 따뜻한 목욕을 그리워했다 남자가 고요하게 눈꺼풀의 무게를 들어올렸다


당신이 입을 맞추는 바람에 꿈에서 독거미를 살해했어 잔인하게도 말이야

독거미?

그래, 원래 나를 죽일 녀석이었지 자기 새끼가 너무 오래 굶었다며 우는 걸 어떻게 외면해


독거미를 죽였어? 여자는 남자의 품에 들어가며 안개의 목소리로 무심하게 물어왔다 남자가 무너지지 못하는 천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거리자 여자는 마음이 가벼워진 듯 눈을 감으면서 잘됐다, 했다 어미가 죽었으니 새끼도 죽었겠네 잘 됐다 독거미를 잔혹하게 죽이는 당신의 무력은 얼마나 관능적이었을까 내가 그걸 보지 못해서 다행이다 여자는 무너지는 천장 아래 남자와 함께 깔려 새가 되는 꿈에 영원히 갇히는 상상을 발끝으로 휘젓다가 불현듯 발끝을 떼면서 눈을 떴다 상상의 온도는 목욕물의 그것처럼 따스했다 자신을 어둠 속에서 묵묵하게 응시하는 남자의 눈동자 속에서 여자는 오백 년 전 전생의 장면, 안개구름 자옥한 연못가에서 푸석한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목욕을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언뜻 본 것도 같았다 더러운 세월 같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남자의 등에는 신수의 발톱 자국이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었고 어깨를 거의 맞대고 있는 자신은 한 손에 죽은 꽃을 꺾어 들고 있었다 죄를 범해 지상으로 쫓겨난 하늘의 존재들 같았다 나비의 종아리보다 가는 속눈썹이 우주의 속마음을 간질이는 바람을 일으키는 1초 동안 여자는 오백 년의 세월을 다시 건너왔다 남자의 눈동자는 검은색일 뿐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졸음에 잠긴 얼굴을 바라보며 따뜻한 목욕이 하고 싶다고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여왔다 천국은 그 목소리에 앓았다 여자는 사랑이란 곡선적이고 물결 같은 것이라 휘두를 수 있는 물체의 모양의 갖추지 못했다는 생각을 씁쓸하게 되풀이하면서 미열을 앓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밤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아주 조금


당신의 사랑은 나의 사랑을 변하게 할까, 물의 목소리로 물었다 아마 많이, 똑같은 물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수증기의 포화는 역설적으로 달의 갈증과 별의 허기에 대한 노래를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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