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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Dec 26. 2024

드라마 몇 장면


새벽 4 16분. 내가 자지 못하고 있는 건 하나 남은 전공 과제 때문이다. 이것도 다 내 지나간 일상의 기록이겠거니, 하고 요즘 클립으로 챙겨보는 드라마 몇 장면을 올려보려 한다. 대하사극 <정도전>. 모두가 아는 이유로 재방영의 가능성은 물 건너간... 아무튼, 이 드라마를 방영할 적에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아빠가 소파에 앉아 즐겨 보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 당시엔 사극이 무섭다는 이유로 보지 않았고, 그해 겨울부터 소위 말하면 뒷북 치기로 해당 드라마에 빠져들었다. 중3짜리 여자애가 보기엔 실로 엄청난 드라마였는데, 역사에 큰 관심이 없던 나도 이 드라마 덕분에 여말선초의 굵직굵직한 정치적 사건들을 외우게 되었고, 학교 역사 시간에도 여말선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반짝이고는 했다. 따분한 교과서에 내가 잘 아는 부분이 등장한다는 것. 그 나이엔 엄청 신나는 일이었다. 드라마 <정도전>은 내가 지극한 애정을 가지고 완주한 몇 안 되는 드라마 가운데 하나이다. 그 애정의 여운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드라마는 이것이 유일하다.


좋아하는 장면은 너무 많은데, 그걸 다 실을 수는 없으니 세 장면 정도 추려보았다.


첫 번째는 방금도 본 영상인데, 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삼봉을 제거한 뒤 피 묻은 칼을 들고 태조의 어전에 들이닥친 장면이다. 태조의 피 토하는 일갈과 그에 밀리지 않는 방원의 응수가 가슴을 이상스럽게 달군다. 옛날에는 방원이 마냥 권력에 눈이 돌아간 사람으로 보여서 싫었는데 다시 보니 일부 이해도 된다. 삼봉의 피가 형형하게 묻은 칼을 쥐고 천천히 쓸어내리는 이성계의 넋나간 표정이, 조금 쑥스런 표현이지만 일품이다. 참고로 다들 알겠지만 저때 방원은 자신의 배 다른 동생, 신덕왕후의 소생인 세자 방석을 죽인 뒤다.



https://www.youtube.com/watch?v=LPTSaej7yVg&t=234s


저 용상에 앉으믄 어떻게 되는 줄 아니?

어찌 되옵니까.

사람들이... 적으로 보일 뿐이지. 언제 모가지를 따고 용상을 차지할지 모르는 말이다! 지옥의 불구댕이지! 많은 사람들 마음 새애카맣게 타버리게 하는, 지옥의 불구댕이지!


불행해지고 싶지 않거든 용상을 쳐다보지 말라던, 용상은 자네에게 지옥이 될 거라던 이인임의 경고가 정말 충고였던 것일까. 다시 보니 옛날에는 잘 와닿지 않던 태조의 정신 나갈 것 같은 심정이 훨씬 잘 느껴진다.



용상이 지옥의 불구덩이라며 울부짖는 성계이지만, 과거에는 그에게도 용상에 대한 맹수 같은 집념이 있었다. 아마 <정도전> 클립 영상 가운데 이 영상의 조회수가 가장 높을 것이다. 중간쯤 등장하는 이성계의 뇌성벽력 같은 '야 정몽주!!!'에서부터 시작하는 무서울 정도로 완벽한 이성계 빙의 연기가 소름 돋는다. 유동근 배우는 아무래도 천재이신 것 같다. 이런 어마무시한 압도감의 몰아붙임에 밀릴 만도 하건만, 상대역 임호의 조금도 밀림 없는 완벽한 맞대응은 이 영상을 조회수 100만으로 이끈 관전 포인트일 것이다. 그는 정몽주 자체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QWQAmfkxpnM


'야 정몽주' 이후의 불꽃 튀기는 충돌 장면도 멋지지만, 다시 보니 앞부분 대사도 너무 좋다. (몇 년이 지나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저때 아마도 몽주가 고려 때려 잡으려는 삼봉을 먼저 때려 잡은 상황이었던 것 같다. 천출이라는 혐의로 잡혀 들어간 삼봉은 문초를 받고 있고, 이 두 사람을 가장 아꼈던 이성계는 저리 가슴으로 반응하며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를 시전한 것이다. 실제와 어느 정도 유사한지는 모르겠지만, 이 드라마에서 이성계는 냉철한 머리로 말하는 사람이 아닌 뜨거운 가슴으로 말하는 사람이라서 좋았다. 사람 냄새가 정말 진하게 풍긴달까. 상대적으로 포은이 냉철하고 비정해 보이지만... 포은 입장에서는 물불 가릴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성계, 삼봉, 포은의 관계가 둘과 하나로 갈리기 시작한 이후, 고려를 지키려는 포은의 싸움은 늘 너무 위태롭고 고독해 보여서 지켜보는 마음이 안타까웠다. 이런 거 보면 나는 고려편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드라마 테라피가 불가능한 사람이지만 막힌 가슴 뚫고 싶을 때 가끔 해당 영상을 찾는다. 내 마음의 답답함을 이성계의 고함이 다 뚫어준다. 큰 소리 내는 연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조상님 편애인 것 같다. 저 이후인지 이전인지 포은이 옥에 갇힌 삼봉을 찾아간 장면도 슬픈데 그건 올릴 수가 없는 관계로 생략했다. 참 정말 씁쓸하다. 이런 잘 만든 드라마를 마음껏 리뷰도 못하다니.



어쩌다 보니 영상을 올리는 순서가 거꾸로 되었다. 마지막 건, 위화도 회군 당시 개경 시가전을 하루 앞둔 밤에 정몽주와 이성계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시가전의 끝자락엔 최영 장군과 이성계의 일기토가 있고, 거기서 패배한 최영을 끌고 가려는 부하들에게 묵직한 목소리로 예를 갖추라고 하는 장면까지 새록새록 떠오른다. 막사 안에서의 이 대화 장면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한마디의 지지가 순간 장면의 모든 분위기를 바꿔놓는다. 이성계에게 가장 필요한 지지는 다른 누구도 아닌 포은 정몽주의 지지였을 것이고, 그것을 얻은 순간 가슴 한켠에 위로보다 투박하고 찡한 뭔가가 오지만, 그 눈가에 고인 눈물은 내일의 비극을 무를 수 없다는 죄스러움도 포함하고 있다. 다른 좋은 장면도 많지만,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이 영상을 마지막으로 글을 맺어야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5swug4380_Q


이 드라마는 사극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참 멋진 명작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몇 장면 다루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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