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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영 Nov 05. 2022

메시지에 주목하기

자기표현에 대해

  어린이 책을 읽는 모임에서 책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한 시즌을 끝내는 시점에서 서로를 응원하고 축하하는 자리였다. 기분 좋게 모임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한 회원이 각 회원들에게서 받은 인상들을 표현했다. 순간 학창시절 롤링 페이퍼를 읽는 자리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나는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이 의아했다. 우리는 화상토론을 통해 몇 번 보았을 뿐이다. 그 때 받았던 주관적 느낌을 굳이 표현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 과정에는 개인의 섣부른 평가가 들어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예고 없이 일방적으로 타인에게 깊숙이 들어가는 것을 실례라고 여기기에, 그 상황이 더욱 낯설었다.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그녀가 맨 처음 나를 언급했기 때문이다. “00씨는 꼭 교수님 같았어요. 얘기할 때 ‘이렇죠?’, ‘그렇지 않은가요?’ 등으로 분명하게 표현해요.”라고 말투까지 흉내 내었다. 모두 까르르 웃었다. 각 회원들에 대해 받았던 느낌들을 신나게 발언한 후 그녀는 또 물었다. “혹시 기분 나쁘신 분 계신가요?”      


  우리는 일상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들과 빈번히 맞닥뜨린다. 여기에서 나는 두 가지 점을 이야기 하고 싶다. 이런 상황은 지목당한 당사자를 당혹스럽게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에겐 웃음을 준다. 유머는 모두 함께 웃을 수 있을 때 유머일 수 있다. 발언자가 서슴없이 말 하고 난 뒤에 기분 나쁜 사람 있냐고 묻는 것은 이미 배려가 아니다. 지목당한 사람은 별거 아닌 일에 감정을 상하는 옹졸한 사람으로 치부되는 이중고를 피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침묵하게 된다. 우리는 자신이 말하고 싶은 욕구 속에 타인에 대한 설된 판단이 들어가는 경우라면 발언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맞이하는 상황에서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라면 멈추는 지혜도 필요하다.      

  또 하나는 자기표현에 관해서이다. 내가 겪어본 바로는 한국사회에서 스스럼없이 자기표현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지 않다. 또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표현을 하는 사람에게 그리 호의적이지도 않다. ‘말 잘 하네.’, ‘똑 부러지네.’, ‘교수님 같이 말하네.’ 살아오면서 간간이 들어온 말들이다. 이런 표현들은 칭찬으로 보기 어렵다. 은근한 비꼼이 들어있다. 특히 남자 구성원이 많은 공간에서 여자가 발언할 때 그렇다. 연배가 높은 사람들 속에 상대적으로 낮은 이가 말 할 때도 그렇다. 발언자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지위가 그리 높지 않다고 여겨질 때도 그러하다. 발언의 내용보다 발언자가 뿜어내는 당당함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자기표현을 잘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말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할까? ‘말을 참 못하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네.’, ‘수줍은 초등학생 같네.’ 같은 평을 하지는 않는다. 표현하고 싶은 자기 욕구에 취해 행해지는 주관적 평가, 당당함을 우월감으로 받아들여 배척하는 경우, 두 가지 모두 자신도 모르는 새 폭력을 행사하고 있을 수 있다.      


  성별, 연령, 계층 등 말하는 사람이 가진 배경에 주목하지 않고 내용에 집중하면 표현에 대한 평가와 판단은 덜 중요해진다. 그가 하는 말이 타당한지, 주관적으로 치우친 의견은 아닌지, 타인의 생각도 고려한 주장인지 등에 귀 기울이게 된다. 인정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그것은 바깥에 있는 객체를 나의 주관을 배제하고 바라보는 것에서 비롯한다. 그럴 때 비로소 메신저가 아니라 메세지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2022.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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