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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마르 왕자 May 22. 2024

 문제풀이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공부

지식을 활자속에 가두어 버린 시험은 평가이상의 의미가 없다! 

어릴 때 살던 곳은 좁은 산 아래 바로 바다가 닿아 있는 곳이었다.  산과 바다사이의 조그마한 땅은 비바람이 심하게 치는 날에는 파도가 크게 일어  물이 들어차 사람이 다니기도 불편해서 옛날에는 한적한 마을로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에게는 이보다 더 놀기에 적합한 공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자연은 훌륭한 놀이터를 제공했다. 하루는 산에 올라가서 친구들과 냇물과 계곡을 뒤지면서 가재와 도롱뇽을 잡고 또 어느 하루는 바닷가 방파제와 그 사이 바윗돌들 사이에 사는 게 들을 잡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으며 자전거를 타고 해변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갔다 오는 동안 나의 어린 시절은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쏜살같이 지나갔다. 


유년 시절은 무한히 주어진 시간의 혜택 속에서 그 어떤 일들도 무료함을 달래주는 귀중한 일들이었던 것 같다. 변변한 야구 장비 없이도 그냥 고무공 하고 방망이를 들고 야구 비슷한 놀이를 하면서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았고 공 주으러 왔다 갔다 하면서, 세이프나 아웃이냐를 두고 아이들끼리 티격태격할 때도 그런 것들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학교에 가서 시험을 치고 전교석차가 기록된 성적표를 받아 들었던 청소년 시절부터 우리에게 시간은 더 이상 공기와 같이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닌 늘 우리를 옥죄는 보이지 않는 감독관이었다. 끊임없이 성적을 발표하고 개인의 분발을 유도하는 한국의 중고교교육이 나의 뇌리에 남긴 추억은 사실 아무것도 없다. 시험공부를 하며 보냈던 시간들이 나에게 남긴 흔적을 찾으려 아무리 기억의 창고를 뒤져도 나에게 남아있는 기억은 야자를 위해 학교 앞 분식집에서 항상 '나디아'라는 만화를 시청한 후 야자를 했던 기억과  영어선생님이자 진학교육 담당이셨던 소위  시간표상에 'R복'으로 표시되어 있던 정영복선생님의 MLB리그에 대한 열렬한 강의다.


학력고사 혹은 수능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 필요한 능력은 시험에 나올 만한 내용들을 잘 학습하는 능력이다. 물론 시험은 배우는 내용을 단편적으로 혹은 구조적으로 잘 이해하는지를 다양한 층위의 문제들을 통해서 물어보지만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혹은 알려진 사실들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를 물어볼 뿐 이를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혹은 어떤 의문이 남아있는지는 묻지 않는다. 또한 수험생활에서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은 국어, 영어, 수학, 과학탐구, 사회탐구, 제2 외국어, 체육에 이르는 모든 과목에서 1등급을 받아야 하는 관리능력이다. 시험기간 친구가 불의의 사고로 죽거나, 부모님이 이혼하는 사건을 경험하면서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멘털을 가지고 오로지 독서실에서 시험공부를 하며 멀리 떨어진 시골에 사시는 외할머니의 부고소식에도 시험공부를 위해 장례식에 가지 않는 비정한 조손이라야 그 모든 과목에서 1등급을 받을 수 있다.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본인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억누르며 시험성적을 통해 드러날 자신의 열등감에 대한 깊은 불안을 억누르고자 시험성적에 매달려 살아가는 이들을 우수한 인재로 인정하는 세상을 중앙대 김누리 교수는 '야만의 사회'로 규정한다. 


이처럼 혹독한 시험들을 통해 단련된 아이들 이건만 학생들을 만나는 강의실은 왜 유쾌하지 못할까?  성공한 아이들은 깊은 불안을 내면화하여 자율이 아닌 타율적 주체성을 가지고 누군가의 채찍질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실패한 아이들은 깊은 열등감과 패배감에 젖어 자신의 재능에 대한 회의감과 무력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우리나라의 교육은 성공한 학생이든 실패한 학생이든 그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간 인재들이 엄청난 인내력과 자기 절제, 성실함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고 이는 사회에서 주어지는 어떤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 재능보다 더 중요한 요소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학생들이 과연 사회의 발전을 견인할 인재들인지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고 답한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앎은 모든 것에 대한 회의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주어진 사실에 대한 의심과 질문으로부터  우리의 지식은 재구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남대의 김상봉교수는 이렇게 묻는다. "운전면허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다고 과연 그가 운전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또한 김누리 교수는 시험은 공정한 경쟁이다라고 하는 주장과 시험능력이 우수한 사람이 능력 있는 인재라는 주장은 사실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 즉 이념에 불과하며 비판정신을 결여한 권위에 복종하는 시민만을 양성하는 일의 도구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대학에서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고 사회적 약자들이 처한 현실들을 고발하는 대자보는 사라진 지 오래이고 대학 도서관에는 각종 시험을 대비한 서적들을 펼쳐놓고 공부하는 학생들로 넘쳐나는 현실을 보면 그의 말은 진실에 근접한 주장이다.  사실 대학에 와서 학생들이 해야 하는 근본적인 일들은 중고등학교에서 암기한 사실들로 쌓아 올린 나약한 도서관을 무너뜨리고 모든 주어진 사실들이 근본적으로 참인지 자기 스스로 확인하면서 다시금 스스로 지식의 도서관을 짓는 일이다. 즉 사물의 본질이나 누구의 주장, 혹은 주어진 텍스트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통해서 새롭게 질문하고 또는 타인의 새로운 시각을 이해하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시각을 갖추는 일이야말로 대학에 와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교양이며 어떠한 전공을 불문하고 이루어져야 하는 교육이다. 


큰 아이가 다니는 학교생활을 슬쩍 들여다보면 학교에서 학습이란 것을 하고 있는지가 의문이다. 수학수업의 교재자체가 교과서가 아니라 전국연합평가기출문제집이다. 주요 과목마다 문제풀이 수업을 할 뿐 내용을 배우는 행위를 하지 않고 있는 이러한 현실이 말해주는 것은 학교가 이미 교육을 하는 곳이 아니라 성적인증기관으로 전락해 있으며 10대들이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다양한 경험과 체험을 하면서 자신들의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는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은 채 쉬는 시간마다 모바일게임이나 SNS의 쇼츠동영상에 빠져 자극적인 소재들에 탐닉하여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병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나친 사교육을 통해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주는 소중한 지적자극을 얻지 못하는 운동선수들만 가득한 교실을 누군가는 삭막하다고 표현한다. 아무런 지적 호기심이나 관심도 없이 오로지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에서 시험문제 몇 개 더 맞추려는 노력만 있는 교실의 풍경을 상상해 보면 고등학교에서 배운 습관을 대학에 고스란히 가져오는 듯하여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결국 시험을 통해 사람을 뽑는 제도에 대한 고민을 더는 미룰 수 없는 시점에 온 게 아닌가 싶다. 인공지능이 등장하는 시대가 곧 도래한 지금 많은 이들은 비판적 사고정신을 갖추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는데 우리의 학교교육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 배치사정표상의 상위대학들이 왜 명문대인지 질문도 한 번 던지지 않은 아이들은 대학에 입학해도 대학졸업장을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는 수단으로 보기 때문에 시험을 통해 다른 대학 혹은 의대에 진학하고자 반수나 재수를 거리낌 없이 선택한다. 이 모든 일들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 수능시험이라는 것이야말로 너무 역설적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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