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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마르 왕자 Jun 13. 2024

(배우는) 학습 vs (깨우치는) 공부

학습과 공부는 다르다! 

중앙대 독문과 김누리교수는 최근 그의 저서에서 '야만의 트라이앵글'이란 용어를 통해 우리나라 교육을 비판하였는데 그의 지적은 우리 아이들이 비판적 사고를 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을 논리를 동원해 글로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유의 결여에 방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가 대조적으로 제시하는 독일교육은 제국주의와 전체주의(나치즘)에 의한 침략과 파괴, 그리고 유대인들을 학살한 아우슈비츠의 역사를 반성하고 이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교육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양이자 동족 간의 비극이란 내전을 경험한 우리나라가 반성해야 할 역사는 세계사적 문명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채  '우물 안 개구리'에 머물렀던 시대적 뒤쳐짐의 역사이다. 


일본이 남기고 간 근대식 교육을 받아들이면서 절대적 빈곤을 벗어나기 위한 우리 교육의 방향은 서양에서 이루어진 200년간의 발전을 부지런히 학습하는 데  그 방점이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전의 비극을 통해 극단적 궁핍과 기아를 경험한 국가에서 지도자들이 취할 수 있는 방향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경제적 발전을 위한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교육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습득할 이공계인력을 양성하는 데 주안점이 있었다. (국가 주도로 별도의 국립대인 KAIST를 설립하고 KIST나 KIAS 같은 연구소들을 만들었으며, 병역특례제도를 도입하여 이공계인력에 대하여 국가가 특혜를  준 점들은  이 주장을 강력히 뒷받침한다.) 그래서 우리는 주로 이미 알려진 것을 배우는 학습에 죽자 사자 매달렸다. 활자화된 것을 배우고 암기하고 시험을 통해 확인하는 교육모델은 짧은 시간에 많은 지식을 오류 없이 습득하는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그 꽃을 피웠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교육은 이공계의 여러 전공들에서 서양의 유명대학들의 커리큘럼을 채택하고 그들이 쓰는 교과서들을 직수입하여 원서로 보거나 이 서적들을 번역한 번역본들을 강의에서 사용하면서 형식적으로 완결된 교과과정을 설계하였다. 그때 교과과정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왜 그들의 교육과정이 그렇게 설계되었는지 이유를 물었을까?  그냥 최고의 명문대학이 채택한 과정이니 당연히 최고의 교육과정이라고 믿은 것은 아닐까?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기를 돌이켜보면 그 시절 대학은 이제 막 탐구라는 것을 하기 위한 준비과정의 단계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시험을 잘 치른 혹은 학습에 재능을 보인 친구들을 데리고 탐구의 세계로 이끌 선배이자 멘토가 될 연구자들이 포닥을 마치고 막 모교로 돌아오던 시점이었다. 


최진석 교수는 그의 저서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통해 (인격적) 국가가 가지는 사유의 높이에 대한 흥미로운 견해를 제시하는 데 과학기술을 사용하여 세상을 통제하기까지 우리가 가져야 할 철학적 깊이(높이) 혹은 사유의 깊이(높이)가 존재함을 설명하면서 단순히 서양의 학문적 지식들을 배우는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의 도약을 통해  과학기술을 제어하는(controlling) 수준으로 올라가야 함을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여기서 높은 단계로 사유의 높이가 높아지기 위해서 필요한 수단이 바로 '곰곰이 생각하기'이다. 즉 남이 참이라고 주장하는 사실들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확인하고 오류가 없음을 검증함과 동시에 가능하다면 이 사실을 재해석하고 이 사실로부터 더 확장되는 지식을 얻는 과정을 우리는 연구라고 부른다(그는 그것을 철학이라고도 일컫는다).  


그러나 미시적으로 들여다보면  학습의 과정 중에도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 보기를 해야 할 때가 자주 여러 번 등장한다. 수학이란 과목만 놓고 봐도 처음 보는 문제를 풀기 위해 우선 문제의 내용, 즉 문제의 제시문을 이해하는 데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작은 아이를 보다 보면 성실하긴 하지만 어려운 문제를 풀 때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생각하기보다는 조금 생각해 보다 엄마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이때 엄마나 바로 나타나 문제의 답을 이야기해 주면 아이에게서 곰곰이 생각할 기회를 뺏게 된다.  우리나라의 교육이 위기라고 할 때 우리는 이 점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병원수만큼이나 많은 수많은 수학학원들은 어려운 수학을 도와준다면서 아이들에게 곰곰이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는 조바심 많은 학부모의 불안을 먹고 자라온 것은 아닐까?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결과를 무엇보다 중요시한다. 수학에 들인 시간에 비례하여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학원을 보내기 위해 동원한 재력에 비례하여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기에  수학문제를 곰곰이 생각하는 시간은 시간적 낭비로 느껴지는 걸까? 


다시 중앙대 김누리 교수의 문제제기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결국 곰곰이 생각하고 그를 통해 스스로 지식을 검증하여 획득하는 과정을 중요시하지 않고 학습에 투입된 자원의 총량에 비례하여 그에 맞는 산출을 가져와야 한다는 경제적 논리가 교육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이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된 역사적 맥락은 위에서 상술하였으며 우리가 보다 더 높은 수준의 철학적 시선을 획득하기 위해서라도 무조건 많은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운동'의 관점을 폐기하고 한 문제라도 개인에게 의미 있는 문제를 스스로 학습하여 스스로 사고하는 경험을 가질 수 있도록 수능입시에 맞추어진 획일적 교육목표를 수정해야 한다고 감히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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