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산다 vs 나는 솔로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세대의 중고교시절은 개인의 정체성이나 개성이 중요하지 않고 집단적 정체성이나 규율이 더 강조되는 시기였다. 벌써 까마득한 시절의 이야기지만 내가 대학에 입학할 즈음에 다수의 학생들이 더 이상 개인의 행동을 강제하는 암묵적 관습과 관행을 따르지 않고 개인의 관심사와 욕망을 쫓아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세대적 현상을 일컬어 최초로 등장한 단어가 X-세대란 용어였다. 왜 이러한 X-세대가 출연했는가에 대한 다양한 사회학적 경제학적 분석이 존재하지만 대체로 이 시기가 공산주의 진영의 몰락과 냉전 이데올로기의 해체, 87년 민주항쟁의 결과 이루어진 민주적인 권력교체등으로 물질적으로 성장한 토대 위에서 자유주의(liberalism)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 이후 우리 사회는 점진적으로 삶의 개인적 방향성에 대하여 더욱더 모색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방향성의 급진적 결과물 중 하나가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저출산과 비혼의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결혼을 하던 때만 해도 결혼이란 일종의 통과의례로서 칸트식 정언명제에 가까운 사회적 명령과 같았다. 비혼이나 독신주의는 소소의 페미니스트들의 반항적 표제어로 이따금씩 소개되었지만 지금은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출산과 고령화는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문제를 던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소리로 시끄러운 동네를 거닐다 보면 생동감이 느껴지고 알 수 없는 희망에 편안함을 느끼는 반면 노인들만 있는 노인정이나 요양병원에 가면 왠지 모를 우울감이 나를 엄습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만 봐도 우리는 본질적으로 아이들에 대한 본능적 끌림을 가지고 있다.
비혼이나 독신을 선택한 개인들조차도 아이가 없는, 혹은 젊은 세대가 드문 노인들만 가득한 사회를 원하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을 할 것이므로 저출산 고령화를 이대로 방치하면 안 된다고 하는 사회적 결론은 이미 만들어져 있다. 저출산에 대한 여러 가지 사회적 해결책들이 제시되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추구해 온 개인적 자유주의의 흐름과 충돌하지 않는 개념적 접근이 수반된 정책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육아와 보육을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것이 아닌 공동체와 국가의 책임으로 전환하는 정책이 가장 효과적인 것이 될 것임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어떤 정치인은 나 혼자 산다와 같은 프로그램이 비혼과 독신을 부추겨서 저출산을 부추긴다는 주장을 편 적도 있었는데 이런 발언의 기저에는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것이 사회에 도움이 된다라고 하는 공공이익의 관점을 가지고 개인의 선택을 판단하고 더 나아가 그 행동을 제한해야 한다는 논리가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분명히 지난날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던 공공의 선에 대한 추구에 개인을 희생시키던 전체주의의 맥락과 일치하는 발언이다.
또한 우리가 나는 솔로 같은 짝짓기 프로그램의 열혈 시청자가 되어 솔로 탈출을 꿈꾸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즐겨보는 이유가 과연 공공이익을 늘리는 보이자 않는 손의 작용이라고 인식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런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만들어져 지상파와 케이플 채널들 모두에 생겨나는 것이 과연 방송통신위원회가 권장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프로그램들이 저출산문제를 해결하는 데 미약하나마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누군가(방송국의 사장님과 저출산 대책위원장??)가 있다면 그는 차라리 교육에 관한 예능프로그램인 티처스 같은 프로그램에 더 많은 애정과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젊은 세대는 매우 현실적이며 전체주의적 맥락에서 생산되어 나오는 여러 가지 담론들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가성비'를 중요시하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마무시한 집값과 사교육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는 개인들은 그냥 자신의 생존에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다.
아이의 재롱과 육아의 고통도 잠시 뿐, 아이가 유치원에 갈 무렵부터 시작되는 사교육에 대한 비용지출을 놓고 시작되는 현실적 괴로움을 과연 아이를 낳아본 적 없는 현재의 대통령이 공감할 수 있을까? 대다수 흙수저 부부들의 헬조선에서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 주는 확실한 저출산대책은 무엇보다도 일정한 자격을 갖춘 모든 학생들의 자유로운 지원과 무작위 추첨에 의한 대학입학이다. 즉 보다 구체적으로 수능에서 받은 점수를 기준으로 한 최저 기준치를 통과한 모든 이들이 원하는 대학에 지원하고 그 대학에서 추첨으로 전형자를 뽑는 방식이라면 값비싼 사교육을 받을 필요도 없으며 대치동으로 이사를 갈 필요도 없어지므로 여러 가지 얽힌 실타래를 푸는 획기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지원 시스템에서는 많은 이들이 몰리는 학과는 오히려 합격할 확률이 낮아지므로 의대나 법대에 들어가기는 여전히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한은총재가 우리나라 거시경제의 건전성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서울대에 제안했다는 것은 이 방법의 유효한 효과가 어느 정도 예상된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이 저출산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지만 시장주의가 침투해 있는 교육의 현실과 충돌하는 지점이 있는데 바로 학생을 교육수요자에 위치시키고 교육을 서비스화한 미국식 시스템을 우리가 차용하고 있는 점이다. 명문대에 입학하여 수학할 준비가 안 된 학생이 추첨으로 그 대학에 입학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지만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낙제가 되었을 경우에도 학생은 자신이 낸 등록금에 해당하는 정당한 교육적 서비스를 받지 못했다고 등록금 반환소송을 제기하거나 오히려 수업을 가르치는 교수의 능력에 대하여 문제제기를 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이런 소송에 놓이게 되면 소송을 제기한 학생보다 곤란한 상황을 겪은 곳은 대학이 될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학생은 개인적 신분보호가 되는 반면 대학은 공적인 기관이므로 이름이 공개되어 일단 언론에 좋지 않은 일로 노출이 되게 되니 말이다. 오늘날과 같이 미디어가 발달한 사회에서 이미지의 실추는 치명적인 오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대학은 가급적 이런 자격미달의 학생을 뽑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사고실험이 가져다주는 유용함은 결국 어떤 정책적 수단으로 오늘날 우리가 처한 저출산 고령화의 문제를 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에 대한 체감이다. 결국은 어떤 하나의 목표나 수단을 위해 전체가 경쟁하지 않도록 사회가 다양한 방향으로 열려있어야 해결될 문제다. 예를 들면 성공을 좋은 차, 좋은 집, 좋은 직장으로 단순화시켜서 획일적 평가잣대를 들이대지 않도록 아이들이 자랄 때 다른 가치관을 교육시키는 것이 중요하고 소위 명문대를 나오지 않더라도 혹은 의사나 변호사가 아니더라도 한 개인이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사회적 기여에 대하여 평가하는 방식으로 훌륭함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한다면 우리는 획일적인 진로- 자사고 혹은 특목고- 명문대 진학- 좋은 직업이나 직장에 취업-에 너무 많은 자원과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에 다양한 가치관들이 존재하고 상당한 지분을 유지하면서 지지받을 때, 예를 들면 미혼모가 남자 없이 국가의 도움을 통해 아이를 키우는 것이 폭력적인 남편을 두지 않고도 충분히 환영받고 지지 받을 때, 우리 사회는 저출산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