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꿈을 앗아간 '80시간 노동'의 민낯
2년 전, 어느 대형 베이커리 브랜드의 한 지점에 '팁 보틀(tip bottle)'이 놓였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설왕설래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도를 넘는 ‘팁’에 미국인들은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고물가 속에서 고통받는 미국인들 사이에 과도한 팁은 원망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팁플레이션(Tipflation)’이라는 신조어가 생기고 관련 ‘쇼츠 영상’과 인터넷 ‘밈(Meme)’도 바이럴되었다. 그때 캐나다 영어 선생님과 팁 문화에 대해 대화를 나눴는데,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해줬다. 그는 학생 시절에 식당에서 서빙을 했었는데, 손님들이 남긴 팁의 전부를 사장이 가로챘다는 이야기였다. 그가 강조하길 팁 문화는 ‘손님에게 죄책감을 주면서 직원 주급의 일부를 손님에게 전가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한국은 반찬도 무료로 주고 부족하면 더 주기도 하고 심지어 팁도 없다면서 좋다고 했었다.
나도 그러한 팁 문화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부정적 확산에 편승하여 미국의 팁 문화를 슬그머니 한국에 심으려는 베이커리 브랜드의 행태에 매우 불쾌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실력(Capability) 이하의 태도(Attitude)를 가진 타자에게는 호감을 갖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그때 그 브랜드의 빵을 사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실은 나는 오랜 기간 줄을 서서 음식을 사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기도 하다. 그런데 앞으로도 그 브랜드를 찾을 일은 더욱 없을 것 같다. 언젠가 자신의 매장을 가지는 것이 꿈이었던 청년이 이 베이커리 회사에서 주 80시간 가까이 가혹하게 일하다가 과로사로 세상을 달리했다.1) 청년의 값진 열정을 싸게 사서 배를 불린 자들이 누굴까 생각하니 피땀으로 반죽되었을 그 빵을 먹고 싶지 않았다.
‘자기합리화’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리고 사람은 항상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실수를 하고 실패를 하면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사람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전자는 실패의 원인과 책임을 상대방(또는 피해자) 탓으로 돌리며 자기합리화를 한다. (갑자기 나의 부끄러운 과거가 스쳐 지나갔다.) 후자는 실패 속에서 자기 합리를 하는 자신을 마주하고 반성하며 잘못을 인정한다. 그리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남이 하면 온당치 못하다고 비난하면서 내가 하면 예외적이거나 정당한 일이라고 말하곤 한다’. 또는 사실관계를 은폐, 축소 및 호도하여 사람들이 사건의 본질을 외면하고 부수적인 것에 매달리게 한다. 부산에서 예고 여학생 3명이 학교의 카르텔로 스스로 생을 달리한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의 청문회에 출석한 교장은 자신의 부재 중에 일어난 사건이라며 억울해했다. 심지어 자신이 있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주장했다.2) 이 주장은 자신의 책임을 교묘하게 축소하려는 회피성 발언이었다. 본래 학교 전반을 운영 및 감독할 책임은 교장에게 있는데 이도 부정하는 발언이었다. 허망하게 죽은 이 청년 제빵사의 유족에 따르면 14개월 동안 4곳을 옮겨 다녔고 그때 불리한 근로계약서를 작성했다고 한다.3) 이에 대해 해당 베이커리 회사는 지문 인식 기기 오류를 이유로 80시간 근로기록 제출을 확인할 수 없다며 사실상 유족의 주장을 거부한 셈이었다. 이 얼마나 잔인한 합리화인가? 이렇게 인간의 개별성 속에 숨은 ‘자기합리화’는 인간성을 끝없이 추락시킨다.
사실 내가 소비 저항을 해도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세간의 관심도 줄어들 것이다. 다시 고객의 대기 줄이 코너를 돌고 돌아서 길게 늘어서고 매장 안에 사람들은 화려한 빵에 눈을 떼지 못하며 북적일 것이다. 인플루언서들은 새로 출시된 빵을 여러 각도로 촬영하고 그 중에 베스트 샷을 경쟁하듯 게시할 것이다. 그렇게 다시 '바이럴(viral)'이 되면 이 베이커리 회사는 더 많은 점포를 내며 승승장구할 것이다. 물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과도하게 머무르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의 본성과 진화를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인간은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연관성에 따라 공감이나 관심의 정도와 수준이 다를 수밖에 없다. 타인의 억울한 죽음보다 당장 칼에 베인 내 손가락이 더 아픈 법이다.
하지만 이런 비극의 반복을 방관한다면 언젠가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같은 비극에 노출되지 않을까? 젊은 청년 제빵사와 여고생 3명처럼 우리의 아이들이 못된 어른들의 욕심에 숨 막혀 죽어간다면 그러지 못하도록 저항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 빵을 잔인한 합리화와 청년의 희생으로 반죽된, 씁쓸한 상징으로 기억할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 브랜드 빵을 사 먹지 않을 것이다. 비록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이 정도의 작은 거부일지라도, 우리의 작은 소비 하나하나가 거대한 시스템에 균열을 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 저항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의 작은 용기가, 누군가의 억울한 죽음을 막아내는 벽이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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