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독여진 도시락
1.
퇴근 무렵,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퇴근길에 마트에 들려서 도시락 재료를 사느라 늦을 것 같으니 먼저 저녁을 먹으라고 했다. 그러겠다고 전화를 끓었는데, 왠지 모르게 내 도시락을 싸주려는 건가 내심 기대되었다. 하지만 집에 도착한 아내는 묵직한 장바구니를 건네며 말했다. “내일 아이 점심 도시락 싸야 해. 급식 파업이래”. 순간 살짝 김이 빠져버렸다. 도시락을 싸는 일은 번거로울 수도 있지만, 아내는 의외로 비장했고 아이는 신났다. 아내는 눈과 입맛을 다 사로잡을 도시락을 만들겠다는 의욕으로 들떠 있었고, 아이는 친구들과 도시락을 먹을 상상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도시락 하나가 이렇게 기분 좋은 집안 행사가 될 줄이야. 나 어릴 적에는 경험하지 못한 풍경이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국민학생이었던 시절에는 이런 호사를 누릴 일이 드물었다. 아버지의 박봉으로 네 식구 살기가 빠듯한 시절이었다. 기름진 고기, 잘 구워진 햄, 김을 넣어 돌돌 말린 계란말이, 참치캔. 구운김 같은 도시락 반찬은 가끔이나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종종 점심시간에 집으로 돌아가 밥을 먹고 다시 학교로 돌아오곤 했다. 그마저도 지겨우면 아버지에게 받은 100~200원으로 학교 앞 분식집에서 떡볶이와 핫도그로 점심을 해결했다. (그땐 떡볶이 한 접시 떡이 딱 7개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정이 친구 사귀는 데 걸림돌이 된 적은 없었다. 동네 또래들의 형편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수도권 외곽의 작은 단층 아파트에서 우리가 서로를 가르는 일은 없었다. 운동장이 있고, 공이 있고, 친구들만 있으면 충분하던 시절이었다.
2.
6학년이 되어서야 반 친구들과 보이지 않는 '급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당시 담임 선생님은 6명씩 조를 만들었는데 나는 반장과 같은 조였다. 반장은 가벼운 곱슬 머리에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살짝 피부가 까무잡잡하던 녀석이었다. 키와 체격도 컸다. 옷도 제철마다 브랜드 옷(부르뎅 아동복 같은 브랜드)을 입었고 공부도 잘해서 수학/과학 경시대회에서 상을 받곤 했었다. 하교 종이 울리면 책가방을 운동장 조회대에 던져놓고 공을 차던 나와 달리, 그는 어김없이 학원으로 향했다. 녀석에 비해 나는 많이 부족했다. 덜렁대고 까불었다. 어린이 잡지(자연과 어린이)나 인물 전기를 읽는 게 더 좋았다.(전기는 아버지가 방문판 매원의 꼬드김에 넘어가 구매한 토인비에 같이 껴서 팔던 전집으로 어린이용이 아니었다.) 옷은 목이 늘어난 라운드 티셔츠와 작은 구멍이 송송 난 파란 체육복 바지였고, 축농증 때문에 자주 코가 나왔다. 그 때문인지 나의 ‘마니또 친구’를 하고 싶은 여학생은 없었다. 누가 내 ‘마니또 친구’가 되었는지 아는 것은 매우 쉬웠다. 책상에 엎드려 울거나 나를 째려보는 여학생을 찾아보면 되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조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는 것이 힘들었다. 내 도시락에는 한 동안 오이김치가 빠진 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익어서 시큼한 오이김치 말이다. 그 시큼함이 친구들의 입맛을 돋우었을 리가 없었다. 햄과 소시지, 계란 후라이 와 제육장조림, 어묵과 과일 등으로 가득 찬 친구들의 반찬통에 비해 신 오이김치는 매우 초라했다. 아무도 손대지 않던 오이김치. 나도 먹지 않았다. 대신 친구들 반찬을 탐했다. 며칠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반장과 조원들은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자신도 먹지 않는 반찬을 싸오면서 친구들의 맛있는 반찬을 축내는 아이를 누가 달가워 했을까? 그러 던 어느 날, 반장은 나를 학교 뒷편 교회 담벼락을 불러냈다. 손을 봐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섭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그런 날이 올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반장은 담벼락에 자기 가방을 거칠게 던졌다. 나를 친구들 앞에 세워두고 그동안의 내 잘못들을 인민재판 하듯 늘어놓았다. 나는 울면서 ‘내가 잘못했어’라고 했다. 반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이 번쩍 거리더니 왼쪽 뺨이 벌겋게 불타듯 타올랐다. 그리고 곧 바로 아랫배에 둔탁한 충격이 밀려왔다. 발에 차인 것이었다. 곧 몇 대를 더 맞고 나는 흙바닥에 쓰러졌다. 반장은 “맞을 만 했지? 까불지 마라”라는 말을 남기고 교회 반대편 공원으로 가버렸다. 나는 흙으로 더럽워진 티셔츠 소매로 눈물을 닦고 책가방을 힘없이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반찬통의 오이김치를 배수구에 몽땅 버렸다. 집에 가서는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3.
회사에서 오후 일과에 여념이 없는데 아내에게서 문자가 왔다. 아내가 만든 도시락이 흥행만점이었다는 소식이었다.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은 아이는 행복에 겨워 매일 도시락을 먹고 싶다고 했다. 아이의 어깨가 들썩였고, 기분은 잔뜩 올라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행복했다. 부모가 되어보니 내가 누리지 못했던 순간을 자식이 누릴 때면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밀려온다. 어쩌면 아이가 나의 과거 상처를 치유해주는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내 안의 오래된 빈자리가 이렇게 채워졌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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