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빗방울 Aug 27. 2022

06 넓어지거나, 깊어지거나

            

의도한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혼란이 걷히면서 산재해 있던 모든 일들이 어느 한 지점으로 수렴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번역 일을 평생 직업으로 선택한 순간도 나에겐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내 생애 첫 번역이라는 운명적 사건은 광고회사에 다니던 시절에 일어났다. 우연한 기회에 회사 사보에 미국의 광고잡지에 실린 기사를 번역하게 되었는데, 번역이라는 걸 난생처음 해보았는데도, 그냥 이거다 싶었다.      

마치 퍼즐이 맞추어지듯이, ‘허튼짓’이라고 생각했던 그간 나의 모든 행적의 쓸모가 드러났다. 늘 이야기를 좋아했던 나, 호기심이 많았지만 학자가 될 정도로 학구적이지는 않았던 나,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나, 자료를 수집하고 조사하길 좋아했던 나, 낯선 이국의 문화를 동경했던 나, 영어를 좋아했던 나, 다양한 사람들을 폭넓게 만나며 대화를 즐겼던 나. 두루 널리 사귀었던 외국인 친구들.       


문학을 좋아한다면 평생 좋아하면 된다고,  굳이 전공까지 할 필요가 있겠냐고, 막상 문학을 전공하면 문학이 싫어질 수도 있다는 담임선생님의 다소 현실적인 조언을 깊이 받아들이고 문학과 상관없는 문헌정보학(당시 도서관학)을 전공했던 나는 어학과 문학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그때까지의 나의 배움은 그 방면으로는 전무했지만 나는 아무 근거도 없이 번역이 나의 길임을 확신했다. 그래서 퇴근 후에 출판사를 돌아다니며 문자 그대로 번역 일을 구걸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경력을 쌓으려면 경력이 필요했고 가는 곳마다 번역 경력을 요구했다. 나는 경력이 없으니 제발 경력을 쌓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작은 출판사의 편집장이 내게 샘플 번역의 기회를 주었고, 나는 수 없이 퇴짜를 맞은 끝에 마침내 첫 번째 소설을 번역할 기회를 얻었다. 


장래 희망이나 꿈을 묻는 질문에 수시로 시달리는 젊은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원대한 꿈이나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고 인생 전체를 알파벳 T를 그리는 과정으로 이해해 보라고. T의 가로선을 긋는 시간은 충분히 가져도 된다고. 세로 선을 긋는 시점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될 거라고.      


일찌감치 세로선을 긋는 사람이 앞서 가는 것도 아니고, 인생에서 T를 꼭 한 번 그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십 대 후반에 비로소 T의 세로선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것은 나 혼자만의 결정은 아니었다. 주변의 모든 여건과 상황이 맞물렸고 온 우주가 나를 도왔다. 그리고 그 순간 비로소 깨달았다. 그 이전 나의 삶이 T의 가로선을 긋는 시간이었다는 것을.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은 허투루 낭비되지 않는다. 

다만 넓어지거나, 깊어질 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05 파도의 의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