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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방울 Sep 18. 2022

15 레몬과 콩가루

십여 년 전, 호주에 3주간 머물렀던 적이 있다. 당시 초등학생, 중학생이었던 나의 두 아이와 중학생 조카까지 아이들 셋을 데리고 떠난 여행이었다. 대외적인 명분은 아이들 교육이었지만, 그 여행을 가장 원했던 사람은 나였다는 걸 가족 모두가 알았고 또 고맙게도 묵인했다. 나는 어느덧 고된 일터로 변해가던 나의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기왕 벗어날 거라면 최대한 멀리 가고 싶었다.   

   

아이들이 영어 수업을 받는 낮 시간에 나도 영어 수업을 받을 수 있는 골드코스트의 어느 어학원을 선택했고, 어학원에서 조금 떨어진 조용한 마을에서 홈스테이를 하기로 했다. 60대로 보이는 이탈리아 출신 타일공 아저씨와 호주 토박이 아줌마의 집이었는데, 두 분 다 인상이 좋고 푸근했다. 수영장과 정원이 딸린 2층 집은 아름다웠다. 부부가 1층에 살았고, 우리 가족이 2층의 방 두 개를 썼다.      


타일공 아저씨는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늦은 오후부터 저녁식사 시간까지 수영장 주위의 타일을 새로 붙이는 작업을 한두 시간씩 더 하곤 했는데, 타일은 한 장만 보았을 때도 예뻤지만 조그만 타일들이 만들어가는 커다란 그림은 더 예뻤다.      


저녁시간에는 모두가 한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했다. 타일공 아저씨는 호주 사람들이 손이 크고 투박해서 손재주가 없기 때문에, 이곳에서 타일을 붙이는 것과 같은 섬세한 일들은 거의 이탈리아 사람들이 한다고 했다. 그는 일은 힘들지만 벌이가 상당히 좋아서 호주에서의 삶에 나름 만족한다고 했다. 내가 번역 일을 한다고 했더니 평생 번역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며 신기해했다.       


어느 날 아이들과 집으로 돌아와 보니 수영장 건너편에서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타일 붙이는 일을 돕고 있었다. 주인 아저씨가 자기 아들이라고 소개해서 나도 가볍게 인사했다. 다음 날 아침 주인 아줌마 조가 우리 넷을 태우고 어학원에 데려다주는 길에, 아버지와 아들의 기구한 사연을 들려주었다.      


어제저녁에 내가 인사했던 그 아들은 타일공 아저씨의 외아들인데, 그 아들은 타일공의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란다. 그런데 그 외아들이 아저씨의 두 번째 부인과 눈이 맞아 어느 날 도망을 쳤단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타일공 아저씨가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아저씨의 두 번째 부인과 연인이 되어 도망을 쳤고, 우리를 어학원에 데려다주는 조는 세 번째 부인이라는 거였다.       


“그런데 그 아들이 왜 돌아왔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내가 물었다.  

“막상 도망쳐 보니 생활이 어려웠겠지. 같이 도망친 여자는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고 자기도 일을 해야 하니까 아버지한테 일을 좀 달라고 돌아왔어.”

“그래서 일을 주었어?”

“응. 어쨌든 아들이니까.”     


그 순간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이야기가 만약 내가 번역하는 소설이었다면, 얼마나 개연성 없는 스토리라고 생각했을까. 아무리 소설가라도 그렇지, 너무 제멋대로 얘기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항상 느끼는 거지만 현실 속 이야기들은 언제나 소설을 뛰어넘는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살뿐이다.      


수업이 끝나고 휴게실에서 간식을 먹고 있을 때, 늘 그랬듯이 조가 우릴 픽업하러 왔다. 그날 돌아가는 길에는 조는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를 들려주었다. 조가 타일공 아저씨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삼십 년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는데, 아내에게, 아니, 아내와 아들에게 배신당해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가 애처로웠던 조는 그동안 저축해놓았던 전 재산을 털어 두 사람의 크루즈 여행을 예약했고, 두 사람은 함께 여행을 했다. 평생 일만 하고 살던 타일공 아저씨에게 조가 첫 여행을 선물한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두 사람은 결혼했고 지금 더없이 행복하다고 했다.      


그날 오후에도 아버지와 아들은 수영장 근처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타일을 붙였지만 저녁식사 시간이 되자 아들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시치미를 떼고 아저씨와 평상시처럼 아저씨가 궁금해하는 한국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아저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참, 우리 얘기 들었지? 내 아들 얘기.”

“응. 정말 유감이야.” 

“뭐 살다 보면 다른 사람이 좋아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 사람이 왜 하필 내 아들이었냐 그거지. 그게 좀 힘들었어.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 나도 좋은 여자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니까. 삶이 네게 레몬을 주면, 레모네이드를 만들어야지. 뭐 어쩌겠어?”

나는 그가 행복해서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했다. 

‘레몬? 그게 레몬이었다고? 그 정도면 레몬을 준 게 아니라 똥을 준 거 아닌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을 겪고도, 타일공 아저씨는 그 일을 이미 지나간 고통의 시간으로 얘기하고 있었다. 불과 2년 전의 일이었는데도. 마치 아무리 거지 같은 일이 일어나도, 자신의 행복을 깨뜨릴 순 없다는 듯이. 자신의 행복은 그 정도로 견고하다는 듯이. 


그들의 집에 잠시 머물며 내가 보고 들은 것만으로 그들의 삶을 다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 두 사람의 사랑과 행복은 가식으로 보이지 않았다. 함께 있을 때 두 사람은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그윽했다. 


 타일공 아저씨는 식사 때마다 정원의 조그만 나무에서 빨간 고추(아마도 페페론치노)를 한 개 따 와서 가위로 조그맣게 자른 다음 거의 모든 음식에 넣어 먹었다. 이 매운 고추가 모든 음식을, 심지어 술까지도, 조금 더 맛있게 만든다면서. 나는 왠지 그 모습이 아저씨가 삶을 대하는 방식 같다고 생각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인생을 조금 더 ‘맛있게’ 만들 방법은 있었다.       


호주에서 머문 3주 동안 참 많은 걸 보고 느끼고 배웠다. 나는 남미 출신 청년들이 주를 이루는 반에서 수업을 받았고, 불가리아 출신의 번역가 지망생과 번역에 대한 많은 얘기를 나누었고, 그곳에서 나를 제외한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동갑내기 일본인 여자와 친구가 되었다. 아이들은 중국인 학생이 절대 다수인 반에서 수업을 했고 느린 인터넷 속도와 더운 날씨에 불평했지만 열기구도 타고 돌고래에게 먹이도 주고 코알라도 안아보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의 그 어떤 경험도, 타일공 아저씨가 자신이 겪은 일들을 담담하게 얘기하는 방식처럼 충격적이진 않았다. 


그 뒤로 삶이 내게 레몬이 아닌 똥을 주는 것 같을 때마다, 나는 타일공 아저씨를 떠올리며, 이것도 보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레몬일 수 있다고, 혼자 조용히 우겨보곤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혼자 만들어본 속담도 떠올려 본다.  


“집안이 콩가루면, 콩국수를 만들어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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