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고 보내드린 교정원고에서 맘에 걸리는 게 있어서요. ‘fucked up’을 '구리다'로 번역한 부분, '개판'으로 통일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해 주셨는데, 제가 그냥 '구리다'가 낫다고 했을 거예요. 사실 제가 진짜 쓰고 싶었던 표현은, '제자랑 결혼하는 건, 좀 ‘양아치’잖아요.'였는데, 그건 좀 어렵겠지요?
‘양아치’가 안 된다면, 그냥 ‘개판’으로 통일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아침부터 구리다 개판 양아치가 담긴 메일 죄송합니다 ㅜ” (빗방울)
“일단! 양아치 넘 좋습니다!!”(중략) (편집자)
“아, 양아치가 되는군요! 그럼 양아치로 바꿀 수 있는 건 다 바꿔주세요!” (빗방울)
최근에 어느 편집자와 실제로 주고받은 메일의 일부를 그대로 ‘복붙’한 것이다. ‘양아치’가 통과라니! 나의 번역원고에서 ‘양아치’가 살아남다니! 그 순간 그동안 퇴짜 맞았던 수많은 ‘양아치’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고 벅찬 감동이 밀려들었다.
예쁜 말도 아닌 이 단어에 왜 그렇게 집착하나 싶겠지만 사실 이번 양아치 사건은 내게 큰 의미가 있다. ‘양아치’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동냥아치에서 파생된 말로 거지를 뜻하는 말’이 첫 번째 의미이고, ‘품행이 천박하고 못된 짓을 일삼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 두 번째 의미다. 대충 '깡패'를 지칭하는 말이었던 '양아치'는 근래에 그 의미가 조금씩 더해지고 빠지면서, 전혀 새로운 느낌의 비속어가 되었다.
같은 비속어라도 말의 무게는 묘하게 달라서, 말하는 사람의 나이와 성격, 주어진 상황을 세밀하게 고려해서 표현하지 않으면, 번역문에서 실감이 나지 않고 재미가 반감된다. 영어의 욕을 적절한 수위로 ‘찰지게’ 번역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내가 욕을 전혀 할 줄 몰라서가 아니다. 번역가가 실생활에서 욕을 찰지게 구사하는 욕쟁이 할머니라 해도 소설 속의 비속어를 어떻게 번역할지 여전히 고민할 것이다. 원문의 느낌을 정확히 살리기도 어렵거니와 문학번역에서도 사용할 있는 욕의 가짓수 자체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홀연히 등장한 ‘양아치’라는 단어에 나는 당연히 눈독을 들일 수밖에 없었고, 그 말의 어감이 적절히 가볍고 또 재미있어서 호시탐탐 그 단어를 쓸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위의 소설에서 양아치 짓을 한 사람은 대학 교수다. 그는 자신이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자신의 제자에게 접근했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나쁜 놈 정도로 보아도 무방하겠지만 결정적으로 그가 양아치성을 드러낸 대목은 따로 있었다.
소설의 여주인공은 고등학교 시절 교사로부터 지속적으로 가스라이팅과 성적 착취를 당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의 트라우마를 교수에게 털어놓았다. 교수는 진심으로 이해하고 위로하는 척 하며 자신의 제자인 여주인공에게 접근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왜 그를 고소하지 않았냐고, 함께 분노해주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자신도 어린 제자와 결혼했고 그 사실을 고의적으로 숨겼다. 그의 비밀을 알게 된 여주인공이 그에게, 숭고한 척 하는 당신이 어린 제자랑 결혼한 것도 완전 ‘fucked up’ 아니냐고 조롱한다. ‘fucked up’의 사전적 의미는 엉망, 혼란 상태이지만 처음 그 대사를 읽는 순간부터, 나는 그 교수를 표현하기에 ‘양아치’보다 더 적절한 단어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단어들은 다 어딘가 뭉툭하게 느껴졌다.
더구나 이 말을 하는 사람은 20대 초반의 여성이고 대학생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구리다'라는 말을 쓸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다른 소설에서 ‘양아치’를 밀었다가 여러 차례 거절당했던 나는 ‘양아치 패배주의’에 젖어 있었고 이미 그 단어를 어느 정도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나 마지막 교정에서도 무난하고 재미없는 나의 번역이 영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 가장 교정이 까다롭고 꼼꼼하기로 소문난 출판사에서 나의 ‘양아치’가 통과된 것이다.
번역 일을 하다보면 언어가 얼마나 살아서 꿈틀거리는 유기체인지 피부로 느낀다. 불과 오년 전 만 해도 번역문에서 절대 쓸 수 없었던 단어들을 이제는 무리 없이 쓸 수 있고, 아무 의식 없이 사용했던 단어가 어느 순간 금지어가 된다. 여성중심의 육아가 반영된 유모차는 '유아차'로 바뀌었고, 결혼을 ‘아직’ 안한 것이라는 의미의 미혼은 결혼은 영영 안 할 수도 있는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한 '비혼'으로 바뀌었다. 남편이 죽을 때 따라죽지 못해 아직 살아있는 여자라는 무시무시한 뜻을 내포한 '미망인'이라는 말도 더 이상 어디에서도 쓰이지 않는다. 여성인칭대명사인 '그녀'를 쓰지 않는다고 미리 알려 주는 출판사도 점점 더 늘어가고 있다. 세상이 바뀌어서 언어가 바뀌는 것인지, 언어가 먼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뀌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언어가 시대의 요구를 가장 민감하게 반영한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얼마 전에는 이미 여러 번 번역되었던 19세기 고전을 새로 번역했는데, 과거의 번역을 보니 부부의 대화에서조차 남성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권위적인 말투를 썼고 여성은 존댓말을 썼다. 19세기의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해도 부부간의 하대와 존대는 요즈음의 독자들에게 편하게 읽히지 않는다. 나는 부부의 대화를 반말로 전부 수정했고 여주인공의 당돌한 말투를 최대한 살렸다. 이런 식의 ‘번역 세탁’은 언제나 즐겁다. 어쩌면 우리가 잘 체감하지 못해도 세상은 결국 아주 조금씩 좋은 쪽으로 바뀌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양아치 사건을 통해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 얼마나 깨어 있어야 하는지 새삼 느낀다. 나이가 들면서 문장도 나이가 드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더 이상 쓰지 않는 말들과 이제 쓸 수 있게 된 말들을 다 놓쳐버려서, 양아치를 양아치라고 부르지도 못하는 아둔한 번역가가 되고 싶지 않다. 번역에서만큼은 항상 살아 있고 깨어 있으며 극도로 예민하고 싶다. 젊은 작가가 젊은 남녀를 주인공으로, 젊은 독자들을 대상으로 쓴 소설인데, 그들이 나누는 대사에서 쓸데없이 번역가의 나이와 연륜이 묻어나는 것은 원치 않는다.
'양아치'를 한영 사전에서 검색해보면, bully, gangster같은 단어들이 뜬다. Bully 와 gangster를 한영사전에서 검색해보면, '양아치'가 뜨지 않는다. 나는 두 언어를 연결하는 그 어떤 사전에도 오르지 못한 채 언어의 바다에서 길을 잃고 둥둥 떠다니는 '양아치'를 건져 올리는 상상을 한다.
뭘까. 한 건 한 것 같은 이 기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