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으로 여행길이 막히기 직전, 혼자 하와이로 여행을 떠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기적으로 참 운이 좋았던 여행이었지만 당시 나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어렵게 성사되었던 번역 계약을 사정사정해서 해지하고 여행길에 올랐던 터라 마음이 무거웠다.
여장을 풀자마자 바닷가에 나갔다가 조그만 선물가게를 보고 홀린 듯 들어갔는데,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정면 진열대에 내가 방금 계약을 해지하고 온 그 책이 날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일에 너무 마음을 쓴 나머지 헛것을 보나 하는 생각에 가까이 다가가서 보아도 틀림없는 그 책이었다. 신간도 아니고 1955년에 출간된 그 책.
큰 아이 대학 입시 때 사흘간 종일 치러야 하는 실기시험 일정이 잡혀 있었는데 폭설 예보가 있었다. 폭설이 내리면 아이가 학교 시험장을 매일 오가기 힘들 것 같았다. 우리는 학교 근처에 숙소를 잡고 사흘을 묵기로 했다. 시험 당일 예보했던 대로 폭설이 내렸다. 택시도 잡히지 않아서 지하철을 탔는데, 지하철역에서 나와 보니 학교까지 걸어갈 일이 막막했다. 낯선 동네인 데다 눈까지 쏟아지니 방향도 거리도 가늠조차 할 수 없고 다른 수험생들은 이미 다 들어갔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딸도 나도 처음 겪는 일이라 할 말을 잃고 서 있는데 눈앞에 학교 이름이 적힌 버스가 한 대 섰다. 본능적으로 달려가 기사님께 수험생인데 타도 되냐고 물었더니 교직원 출근용 셔틀버스라고, 타라고 했다. 우리는 그 버스를 타고 다소 외진 곳에 위치한 학교 캠퍼스에 무사히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딸이 내게, “엄마는 여기서 어떻게 나가?”라고 물으며 날 걱정했는데, 그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눈앞에 빈 택시가 한 대 섰다. 딸은 내가 택시 타는 모습을 보고 안도하며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오래전 미국 영부인을 주인공으로 한 실화소설을 번역하는데, 소설 속의 남자 주인공이 자기가 어떤 책의 제목을 대며 이런 책도 읽은 사람이라고 으스대는 장면이 있었다. 그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몰랐던 나는 그 책을 한 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내가 종종 도움을 청했던 미국인 친구가 자기가 재미있게 읽은 책이라며 나에게 바로 그 책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그 책은 1973년도에 출간된 책이었고 그 미국인 친구는 삼십 대 초반이었다. 책이 자꾸만 나를 찾아오는 것 같아 참 신기한 우연이라고 생각하며 읽어보니 재미있었다. 알아보니 국내에는 해적판만 있고 정식으로 출간된 적이 없어서 출판사에 출간을 제안했고 결국 나의 번역으로 세상에 나와 꽤 많이 읽혔다.
수년 전 꿈에 그리던 런던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꼭 가보고 싶었던 트라팔가 광장의 워터스톤 서점을 향해 걸으면서, 내가 번역했던 소설이 한 권이라도 날 마중 나 와 주었으면 좋겠다는 황당한 소망을 품었다. 그런데 서점에 들어서는 순간, 오른쪽 스테디셀러 소설 코너의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내가 몇 년 전 번역했던 영국 작가의 작품 두 권이 놓여 있었다. 그 책을 집어 드는 순간, 나는 내가 아주 오랫동안 그 순간을 꿈꾸어왔음을, 그리고 그 꿈이 이루어졌음을 알았다.
최근에는 글쓰기에 관한 책을 읽고 있는데, 작가 이름이 어딘가 익숙해서 확인해보니, 내가 이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번역했던 실화소설의 작가였다. 그러니까 그 책에서 수시로 언급되고 있는 실화소설은 20여 년 전 나의 번역으로 한국에 출간된 책이었다. 비록 지금은 절판되었지만, 그 책을 쓴 사람이 훗날 글쓰기 전문가가 되고 글쓰기 분야의 베스트셀러 저자가 될 줄은, 그리고 내가 글쓰기에 관한 그의 책을 다시 읽게 될 줄은 당연히 알지 못했다.
한 작품을 끝내고 다음 작품을 시작했는데, 전 작품의 주인공 이름이 다음 작품에서 주인공 친구의 이름으로 등장한다든지, 나의 현재 상황과 희한하게 맞물리는 작품의 의뢰를 받는 경우도 종종 있다. 단지 이 일을 오래 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매번 나는 그렇게 신기하고 반가울 수가 없다. 그런데 그렇게 신기하게 반짝거리던 일도 세월이 흐르면 일상의 무게에 빛을 잃고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들로 납작해진다.
재작년에 먼 길을 떠나신 나의 아버지는 늘 당신처럼 신기한 우연을 많이 겪은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하셨는데, 그런 것도 물려받을 수 있는 유전자일까. 그렇다면 나도 물려받고 싶다. 아버지는 평생 곤경에 처할 때마다 매번 거짓말처럼 구세주가 나타났고, 아버지가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꼭 만났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결혼을 약속하고 명동성당에서 주례 신부를 만났는데, 주례 신부가 오래전 연락이 끊긴 친구였다. 더구나 그 친구는 아버지가 천주교 신자인 것을 몹시 못마땅해했던 무신론자였는데, 세월이 지나 만나보니 그 친구는 신부가 되어 있었고 아버지는 신부가 되라는 할머니의 간청을 묵살하고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아버지는 40년 동안 만난 적 없는 친구를 유럽 여행 중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브라질로 이민을 떠난 친구를 늘 그리워했다. 그런데 파리의 어느 백화점에서 아버지가 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데, 통로 반대편에서 그 친구가 지나갔다. 아버지는 방금 내 친구가 지나갔다면서 벌떡 일어나 이름을 부르며 쫓아갔다. 당시 아버지 곁에 있었던 언니의 증언에 의하면, 그 분이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돌아보았고 두 사람은 기막힌 우연에 놀라 한동안 할 말을 잃고 서로를 멍하니 쳐다보았단다.
어쩌면 이 정도의 우연은 어느 집에나, 누구에게나 있는 일인 건지, 아니면 우리 가족이 유난스럽게 이런 우연을 두고두고 얘기하며 신기해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나의 아버지에게 그런 신기한 일들이 유독 많이 일어났던 건 아버지가 워낙 발이 넓어 아는 사람이 많은 데다, 시력도 좋고, 항상 주위를 살피며 다니고,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을 평생토록 신기하고 재미있어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런 일들을 많이 겪은 것처럼 비칠 수 있다는 게 나의 분석이다. 소설로 치면, 아버지의 삶은 우연이 남발하는 소설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결코 삶에 무덤덤하지 않았고 항상 감탄하고 놀라고 신기해했는데, 어쩌면 그 반대인지도. 아버지가 늘 감탄하고 놀라고 신기해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삶이 우연이 남발하는 소설처럼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건지도.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위해 작가가 소설 속에 크고 작은 우연을 설정하는 것처럼, 이 우주의 작가가 우리의 삶에도 적당히 재미있도록 신기한 우연을 안배하는 걸까. 만약 내가 우주의 작가라면, 신기한 우연에 많이 감탄하고 많이 놀라고 많이 신기해하는 사람에게 그런 우연을 더 많이 할당해 줄 것 같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던가. 기적은 없다고 믿고 사는 것과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믿고 사는 것. 어떤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두뇌를 가진 사람에게는, 그래서 여간해서는 감탄하거나 놀라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모든 일이 하나도 호들갑 떨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기왕이면 자주 기적이 일어나고 자주 할 말을 잃는 세상에 머물고 싶다.
처음 읽었을 때 완벽하게 이해하진 못해도 그저 아름답고 가슴이 먹먹한 시를 행과 연 단위로 분석하고 주제어를 찾으면 시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될지언정 어쩐지 처음처럼 아름답게 느껴지지는 않는 것처럼,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순간들을 너무 분석하지 않고 가만히 신기한 상태로 남겨둔다, 계속 아름답도록. 다행히 나의 두뇌는 그리 과학적이고 분석적이지 않아서, 끝내 설명할 수 없는 상태로 남겨 두기가 그리 어렵진 않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유명한 대사처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다.
비단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