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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방울 Jan 13. 2023

21 번역 오지랖

  

아스라이, 스멀스멀, 살랑살랑, 하늘하늘, 

나긋나긋, 울긋불긋, 사부작사부작, 오밀조밀, 

살포시, 설핏, 얼키설키, 고즈넉이, 호시탐탐     


번역할 때 꼭 써보고 싶은 단어들이다. 이런 단어들을 번역문에서 쓰고 싶은 이유는 첫째, 이 단어들이 너무 예쁘기 때문이고, 둘째, 한국 소설에서는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이 단어를 번역 소설에서는 만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보다 거창한 이유를 대자면, 늘 사전에 나와 있는 무난한 단어만 쓰는 번역 매너리즘에 빠지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인공지능은 결코 인간의 감성을 번역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이제는 유명 작가의 서문까지 제법 훌륭하게 써낸다는 그 무서운 녀석을 아예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소설을 번역할 때면 기계는 생각해 낼 수 없을 것 같은 아름답고 인간미 넘치는 번역에 대한 욕심이 생기는데, 그럴 때 이런 단어들이 떠오른다. 기계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이 천사의 솜털 같은 단어들이.      


그런데 기회를 잡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학문적 근거라고는 전혀 없는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한국어는 즉 부사(의성의태어)의 언어인 반면, 영어는 동사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영어의 섬세한 표현은 동사에 녹아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영어에서 ‘걷다’에 해당되는 동사만 해도 걷는 모양이나 느낌에 따라, stroll, saunter, stagger, skulk, wander, roam, tiptoe, creep around, loiter, meander, promenade 등 참으로 다양하다. 반면 한국어는 ‘걷다’라는 기본 동사를 어기적어기적, 건들건들, 느긋하게, 어슬렁어슬렁, 쭈뼛거리며, 하릴없이, 아장아장 같은 꾸밈말로 보완하여 표현을 완성한다. 그런데 한국어의 의성의태어가 워낙 발달해 있다 보니 동사에 녹아있는 표현을 옮길 때 그런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이 조금 요란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언어가 달라도 결국 다 사람 사는 세상 아닌가. 영국이나 미국의 들판도 분명 ‘아스라이’ 펼쳐질 때가 있을 것이고 영어를 쓰는 사람도 ‘사부작사부작’ 일할 때가 있을 텐데, 만약 영어에 그 단어가 있었다면 작가도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을까 하는 번역 오지랖이 수시로 발동하곤 한다.  어렵사리 기회를 잡아 저런 단어를 슬쩍 넣어 보았을 때, 확신이 드는 경우도 있지만, 좀 과한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더 많다. 이국의 소설에서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수식어가 너무 자주 등장하면 불편해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 같고, 원문이 과연 저런 의미일까 의구심을 갖는 독자들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소심한 번역가는 이래저래 저런 단어들을 쓰지 못한다.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 두 언어의 차이는 번역작업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 보면 그 미세한 어긋남이 번역가를 존재하게 하니 오히려 감사할 일이다. 두 언어의 관계가 일대일로 줄을 그을 수 있을 정도로 명료했다면, 번역은 일찌감치 기계의 영역이 되었을 테니까.       


‘세상에서 가장 타국어로 번역하기 난감한 단어’로 1993년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는 ‘마밀라피나타파이 Mamihlapinatapai’는 칠레 남부 티에라델푸에고 지역의 야간(Yaghan)족 원주민들이 쓰던 명사 단어로, ‘서로에게 꼭 필요한 것이면서도 자신은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어떤 일에 대해서 상대방이 자원하여 해 주기를 바라는 두 사람 사이에서 조용하면서 긴급하게 오가는 미묘한 눈빛’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스웨덴어 ‘몽가타 Mangata’는 ‘물 위로 길처럼 뜬 달빛’이라는 기가 막힌 감성이 담겼다. 일본어의 ‘코모레비Komorebi’는 내가 늘 표현하고 싶었지만 한국어에는 마땅한 한 단어가 없는 ‘나뭇잎 사이로 스며 내리는 햇살’이라는 뜻이고, 독일어의 ‘카벨 잘라트Kabel Salat’는 엉망으로 헝클어진 케이블 선 더미를 ‘케이블 샐러드’라고 위트 있게 표현한 단어다. 스페인 사람들은 언제나 바지 밖으로 셔츠를 빼내 입는 남자에게도 ‘코티수엘토Cotisuelto’라는 이름을 주었다.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엘라프랜시스 샌더스)      


 한국어에도 ‘한’이나 ‘눈치’처럼 다른 나라 언어로는 잘 표현되지 않는, 오직 한국어만이 완벽하게 포착하고 이름붙인 감성이 있다. 외국인들에게 그 단어를 설명해서 이해시킬 수는 있어도 그들의 나라에서는 딱 떨어지는 한 단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 어떤 감정, 어떤 사물에 이름을 부여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언어권마다 다르다는 게 참 재미있다. 살짝 어긋난 인연이 두고두고 애틋하듯이, 살짝 결이 다른 사람에게 매혹되듯이, 내가 번역하는 두 언어도 살짝 어긋나 있어서 아름답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 어긋남을 즐긴다. 소설 원문에서 누군가가 눈을 감았다고 하면, 혹시 ‘질끈’ 감았다고 해도 되는 상황인가 살피고, 무언가가 사라졌다고 하면 혹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고 해도 될까 생각해 본다. 맛있는 감자에 대한 묘사가 나오면 한국의 맛있는 감자처럼 ‘포슬포슬’하다는 말을 넣고 싶고, 비가 내리는 풍경을 묘사할 땐, 딱히 그런 형용사가 없어도 이건 완전 ‘추적추적’ 내리는 건데.... 하며 아쉬워한다.  

    

만약 내가 쓴 글을 언젠가 이국의 누군가가 번역해 준다면, 원문에는 없어도 그 나라에만 존재하는 예쁜 단어들을 써주면 좋겠다. 내가 알았더라면 분명히 썼을 단어들을 찾아서 써 주면 좋겠다. 물론 문득문득, 이건 너무 오지랖인가... 망설이기도 하면서. 그리고  두 언어가 미세하게 어긋나서 참 재미있다고, 그래서 참 아름답다고 생각해 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번역하는 사람이 그런 고민과 오지랖을 즐겨주면 좋겠다, 나처럼. 


물론 이런 생각들조차도 다 번역 오지랖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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