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에세이_1
가족이란 무엇일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지 무려 16년 차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나는 엄마라는 직함이 낯설고 버겁다. 못 견디게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그래, 이게 행복이지 별 거 있어 싶다가도 어느새 그저 나 개인일 수 없는 현실이 부담스럽다. 나이 마흔 넘도록 미혼인 친구들이 안쓰러워, 어디 좋은 짝 없나, 오지랖을 부라다가 명절이나 연말처럼 가족이 중심이 되는 때가 되면 그저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싱글들이 부럽기만 하다.
남편의 친구 중 몇은 기러기아빠다. 아내와 아이들을 멀리 외국에 보내고 혼자 산다. 명문 대를 졸업해 대기업에 다니거나 전문직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소위 '부자' 축에 드는 건 아니다. 강남에 아파트 값이 지금처럼 천정부지 솟기 전, 은행에 큰 빚을 끼고 집을 사서 매 달 월세 같은 이자를 내지만 그래도 서울에 내 집은 한 채 있는 것으로 안위하며 사는 중산층이다. 아이들에게 물려줄 재산은 없지만 아이들이 나 만큼은 누리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있는 돈 없는 돈을 털어 아이들 유학자금에 쏟는다.
얼마 전 피부과 의사 함익병 씨가 유튜브에 나와 "아이들 교육을 위해선 자퇴가 답"이라며 열변을 쏟는 걸 봤다. 일면 공감하면서도 그래서, 자퇴한 다음은 어쩌라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익병 씨만큼 돈이 없는 보통의 부모는 아이들을 자퇴시키기는 결심도 쉬운 게 아니다. 함 씨의 자녀들은 미국 유학길에 올라 유수의 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안다. 그를 위해서는 아이들의 노력에 더해 부모의 재력이 필수인데, 그만큼의 서포트가 가능한 부모가 대한민국에 몇 이나 될까.
중 3 큰 딸은 오늘 학교를 가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생리결석'이지만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라는 걸 나도 알고 담임선생님도 안다. 요즘 큰 아이 반의 절반은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 한다. 졸업을 앞둔 요즘 학교에 가봤자 배울 게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 시간에 고등 선행을 위한 학원 숙제를 하거나, 차라리 잠을 더 자는 게 낫다는 생각이겠다. 그래도 학교는 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아이는, "어제 등교한 애는 서른 명 중에 일곱 뿐이었다" 면서 학기말 시험을 마친 요즘, 학교에 가 봤자 배우는 것도 없고 더 이상 등교는 의미가 없다며 나름의 논리를 폈다.
그래도 가야 한다, 는 말은 억지 같아서 일단 오늘은 쉬게 하고 내일은 가는 게 좋겠다는 말을 했지만 사실 뭐가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 학교는 이미 그런 곳이 되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인권을 존중? 하느라 생활 태도나 예절에 대한 적절한 꾸중조차 하지 않는다. 치마를 짧게 입건, 화장을 하건, 욕을 하건, 싸움을 하건 못 본 척, 모르는 척, 그저 지나치고 만다.
가족은 무엇인가, 로 시작된 글이 학교는 무엇이고, 교육은 무엇인가로 이어지는데 어느새 내가 이렇게 모든 것들에 비관적이 되었나 싶다. 그리하여 오늘의 결론은, 아이는 학교에 가지 않았고 나는 그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으며 이것이 옳은지조차 판단이 서질 않으니 과연 내가 어미로서의 자격이 있는가 에 대한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그에 더해 이것은 내가 어른으로서 자격이 미달되기 때문인가, 아니면 이 나라 공교육이 잘못된 탓인가, 그 또한 잘 모르겠다.
아이는 방에 틀여 박혀 무언가를 하고 있다. 오전에 몇 번 방문을 열어 확인을 했는데 열 시까지는 침대에 있었고 지금은 책상에 있다. 침대에 누워있을 바엔 학교를 가라는 내 잔소리 때문일 것이다. 책상에 앉아 무엇을 하는지 모르지만 결국 학교에 가지 않았으니 등교했을 때보다 더 생산적인 무언가를 하고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이제 머리가 큰 아이에게 일거수일투족을 지사하고 감시하기란 어렵다. 따르지도 않을뿐더러 사이만 나빠질 뿐이다.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확실한 정의를 내리기도 어려운 지금,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을지 모르겠다. 아이에 대한 참견과 믿음 사이의 줄타기가 이다지도 어려울 줄이야. 남들은 다 잘하는 데 나만 못하는 것 같은 자괴감까지. 아이들은 자라는데 나는 여전히 이십 대의 정신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갱년기는 이렇게 오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