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과 파괴 2
이상한 초우라늄
파리에 있는 라듐연구소에서도 페르미가 발견한 초우라늄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1937년 10월, 이렌 퀴리와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젊은 화학자 파블 사비치는 반감기가 세 시간 반인 원자핵을 발견했다. 이 원자핵은 두 사람은 한과 마이트너가 발견하지 못했던 핵이라고 말하면서 화학적인 거동으로 봐서는 우라늄이 중성자를 하나 받아들인 다음, 알파입자를 내놓으며 토륨의 동위원소가 되었다고 발표했다. 마이트너는 조수 프리츠 슈트라스만(Fritz Strassmann)과 함께 두 사람의 실험을 확인했지만, 토륨을 발견할 수 없었다. 마이트너는 두 사람이 발견한 원자핵은 두 가지가 섞여 있을 거라며 두 사람이 실수했을 거라는 편지를 이렌 퀴리에게 보냈다. 이렌 퀴리는 실험을 계속했다. 그 원자핵은 과연 토륨이 아니었다. 한과 마이트너의 지적이 맞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원자핵의 화학적인 성질은 희토류와 비슷했다. 상황은 오리무중 상태였다. 퀴리와 사비치는 집요하게 실험을 계속했다. 그러나 결과는 점점 더 이상했다. 자신들이 찾은 원자핵은 악티늄에 란타늄이 섞여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악티늄에서 란타늄을 제거하기 힘들었다.
퀴리와 사비치의 결과를 내내 지켜보던 베를린 그룹은 두 사람의 해석이 계속 바뀌는 걸 보며 지치고 말았다. 더는 이 반감기가 세 시간 반인 원자핵에 집중하지 않기로 결심하며 이 원자핵을 유별난 원소라는 뜻으로 큐리오줌(Kuriosum)이라고 불렀다. 1938년 7월, 퀴리와 사비치는 자신들이 발견한 반감기 세 시간 반의 원자핵은 아마도 란타늄 계열의 초우라늄일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란타늄은 주기율표에서 악티늄 바로 위에 있는 원자번호 57인 원소다. 우라늄이 란타늄으로 변하려면, 중성자 하나를 포획한 뒤, 양성자를 서른다섯 개나 내보내야만 한다. 만약에 이렌과 사비치가 우라늄이 쪼개져서 란타늄이 나왔다고 자신들의 발견을 해석했더라면, 핵분열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초우라늄을 확인하는 일이 왜 이토록 어려웠을까? 그때만 해도 극미량의 방사성 원소를 화학적으로 침전시키는 일은 몹시 어려웠다. 그리고 양자역학이 원자를 잘 설명한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원자핵도 잘 설명할 수 있는지 몰랐다. 원자핵이 베타붕괴를 하면서 내뱉는 전자가 원자핵 안에서 온다고 여기기도 했고, 중성자가 발견되었을 때는 중성자가 양성자와 전자가 결합한 상태라고 가정하기도 했다. 1935년에 유가와가 강력에 관한 이론을 내놓았지만, 유가와의 이론은 1947년이나 되어서야 실험적으로 증명된다. 당시에는 초우라늄과 핵분열을 구분할 만한 이론이 없었다. 초우라늄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이론이 좀 더 무르익어야 했고, 실험 데이터도 좀 더 쌓여야 했다.
리제 마이트너의 망명
1938년이 되자, 독일의 정치적 상황은 점점 더 나빠져 갔다. 독일 대학에서 유대인 교수들은 이미 오래전에 쫓겨났다. 나치친위대나 비밀경찰을 피해 외국으로 피한 학자들은 운이 좋은 셈이었다. 남아있던 유대인 학자들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마이트너는 유대인이었지만, 국적이 오스트리아였다. 아직은 베를린에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지만, 불안감은 높아만 갔다. 1937년에는 마이트너를 늘 지원하던 막스 플랑크가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소장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1938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합병되었다. 마이트너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독일에서 25년 동안 일했지만, 그녀에게 독일은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연구소의 분위기도 예전 같지 않았다. 한때 동료였던 쿠르트 헤스 교수는 마이트너를 일컬어 “연구소를 위태롭게 하는 유대 여자”라며 악담을 해댔다. 몇몇은 나치 유니폼을 입고 연구소에 나타났다. 마이트너는 그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연구소의 고위직에 있는 자들은 마이트너가 연구소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그녀를 압박했다. 그녀를 도우려는 좋은 동료들이 있었고 플랑크의 후임으로 온 카를 보슈도 마이트너를 보호해 주었지만, 마이트너는 목숨이 위태로움을 느꼈다.
1938년 4월에 닐스 보어가 마이트너를 빼내려고 코펜하겐에 있는 자신의 연구소로 초청했다. 마이트너는 여행 비자를 받으려고 덴마크 영사관에 갔지만, 이미 휴지 조각이 되어버린 오스트리아 여권으로는 비자를 받을 수 없었다. 보어는 멈추지 않고 마이트너를 돕기로 결심했다. 1938년 6월 6일에 닐스 보어가 아내와 함께 베를린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를 방문했다. 마이트너를 만난 보어는 덴마크나 스웨덴에 자리를 알아보겠다고 약속했다. 보어는 네덜란드 학자들에게 마이트너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덕 코스터(Dirk Coster), 헨드릭 크라머스(Hendrik Kramers), 페터 드바이(Peter Debye), 아드리안 포커르(Adriaan Fokker) 같은 네덜란드 물리학자들이 그녀를 독일에서 빼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나치독일은 유대인이 독일을 떠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코스터는 베를린까지 가서 마이트너를 네덜란드로 탈출하는 걸 도왔다. 이 탈출 과정은 영화로 제작해도 될 만큼 극적이고 긴박했다.
1938년 7월 12일 밤, 마이트너는 감시의 눈길을 피하려 연구소에서 한과 함께 밤늦게까지 연구했다. 그리고 곧장 한의 집으로 갔다. 그녀의 오랜 동료 한은 돈으로 바꾸라며 자신의 어머니가 물려준 다이아몬드 반지를 그녀에게 주었다. 다음날 일찍 마이트너는 역에서 코스터를 만나 네덜란드 흐로닝언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독일에서 네덜란드로 넘어가는 국경에서 한 차례 조사를 받았지만, 국경경비대원은 마이트너를 코스터의 부인으로 여겼다. 마이트너는 네덜란드에서 덴마크를 거쳐 8월 2일에 스웨덴 스톡홀름에 안착했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마이트너는 아마도 독일에서 탈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리제 마이트너가 환갑을 맞은 지 이틀이 지난 1938년 11월 9일부터 10일 사이에 “수정의 밤(Kristallnacht)”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나치 돌격대(SA: Sturmsabteilung)와 독일인들은 유대인 상점과 유대교 회당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그날, 독일 전역의 거리는 깨진 유리창으로 가득했다. 나치 돌격대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있는 1,400여 개의 회당에 불을 질렀고, 91명의 유대인을 학살하였다. 그리고 30,000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잡혀 집단수용소로 보내졌다. 마이트너의 조카이자 물리학자인 오토 프리슈(Otto Frisch)의 아버지도 체포되어 다카우에 있는 집단수용소로 끌려갔다. 유대인을 말살하려는 나치의 학살이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우라늄에서부터 나온 바륨
수정의 밤 사건이 일어날 즈음에 한과 슈트라스만은 우라늄에 중성자를 쏘아주는 실험을 계속했다. 두 사람은 퀴리와 사비치가 발견한 반감기 3.5 시간의 동위원소는 화학적으로 바륨과 란타늄과 비슷한 라듐의 동위원소가 주를 이루고 거기에 다른 원소가 섞여 있는 화합물이라고 주장했다. 우라늄이 중성자를 받아 알파입자를 두 개 내놓으면 라듐이 되지만, 우라늄에서 나오는 알파입자의 에너지가 문제였다. 우라늄에 쏘아준 중성자만으로는 알파입자 두 개가 나오기에는 에너지가 충분하지 않았다. 11월 10일에 한은 보어의 초청을 받아 코펜하겐에 있는 닐스 보어 연구소를 방문하였다. 거기서 4개월 만에 마이트너를 다시 만났다. 한은 자신이 얻은 실험 결과를 마이트너와 긴히 토론했지만, 마이트너를 만난 사실을 비밀에 부쳐야만 했다.
한과 슈트라스만은 실험하면 할수록 점점 더 수렁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난번 실험과 비슷했지만, 이번에 얻은 방사성 물질은 화학적으로 바륨과 흡사했다. 바륨은 주기율표에서 라듐 바로 위에 있다. 두 물질을 화학적으로 분리하는 건 당시 기술로는 불가능하였다. 우라늄이 중성자를 받아 라듐으로 바뀌는 것도 이상했지만, 우라늄에서 바륨이 나오는 건 그보다 훨씬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스톡홀름에 도착한 페르미는 193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기념으로 강연했다. 그 강연에서 페르미는 초우라늄 원소 93과 94의 발견을 기정사실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두 원소에 각각 오세니윰과 헤스페리움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한과 슈트라스만은 여전히 안개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한은 스웨덴에 있는 마이트너의 도움이 간절했다. 1938년 12월 19일, 한은 마이트너에게 편지를 써 자신이 맞닥뜨린 어려움을 토로했다.
“바륨만 빼면, 나머지 원소를 분리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모든 반응은 라듐과 일관성이 있어요. 단 한 가지 아주 특이한 점은 라듐과 바륨을 서로 분리할 수 없고, 라듐 동위원소는 꼭 바륨처럼 보입니다.”
이틀이 지나 한은 논문을 투고하기 전에 마이트너에게 다시 한번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한의 답답한 심정이 잘 드러났다.
“우리가 예전처럼 함께 연구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신나는 일이었을까요. 실험 사실로부터 내린 결론은 이래요. 그토록 철저하게 연구한 세 가지 동위원소가 라듐이 아니라 화학자의 관점에서 바륨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1938년 12월 22일, 한은 자신이 쓴 논문을 <나투어비센샤프텐>에 투고하였다. 곧 세상을 놀라게 할 논문 제목은 “우라늄의 중성자 방사 조사에서 파생된 알칼리성 토류 동위원소의 결정 및 관계에 관하여”로 지극히 평범했다. 12월 27일에 한은 편집자에게 전화를 걸어 한 문단을 추가하였다. 그 문단 마지막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바륨과 마수륨의 원자질량을 합하면 138+101=239입니다!”
한이 말한 마수륨은 오늘날 테크니튬이라고 한다. 테크니튬은 우라늄 원자핵이 핵분열을 할 때 쪼개져 나오는 원소 중 하나다. 테크니튬의 동위원소는 거의 인공적으로만 생성되고 모두 방사성 붕괴를 한다.
핵분열의 발견
마이트너는 스웨덴 물리학자 만네 시그반(Manne Siegbahn)의 도움을 받아 스톡홀름 근처에 있는 물리연구소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지만, 베를린의 환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실험실은 열악했다. 함께 일할 사람도 없었고, 초우라늄 실험을 할 장비도 없었다. 그곳에 있는 젊은 물리학자들은 사이클로트론을 짓는 일에 바빴다. 마이트너는 이곳에 와서 환갑을 맞았다. 나치만 아니었다면 독일에서 동료들의 생일 축하를 받았으리라. 절망감과 외로움이 덮쳐왔다. 곧 크리스마스였다. 명절에 혼자 지내는 건 무척 외로운 일이었다. 다행히 예테보리 근처 쿵갈브에서 사는 스웨덴 친구가 크리스마스 때 일주일 동안 함께 지내자며 마이트너를 초대했다. 덴마크 닐스 보어 연구소에 있는 마이트너의 조카 오토 프리슈도 함께 초대했다고 했다. 초대도 달가웠지만, 무엇보다 조카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들떴다. 여행 가방을 싸며 한이 보내온 편지를 챙겼다. 프리슈와 함께 한과 슈트라스만이 얻은 결과를 토론할 수 있다는 걸 상상만 해도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프리슈는 마이트너와 스물여섯 살 차이가 나지만, 프리슈는 어려서부터 이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학문적 궤적은 이모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마이트너와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에서 공부했고, 박사학위를 마친 다음에는 베를린에 가서 연구원으로 지내다 함부르크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나치가 정권을 잡으며 유대인이었던 프리슈도 대학에서 쫓겨났다. 다행히 영국 런던의 버크벡 대학의 패트릭 블래킷이 초청해서 그곳에서 일하다가 덴마크 닐스 보어 연구소에 자리를 잡았다.
쿵갈브에 도착한 프리슈는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마이트너를 만났다. 그는 이모에게 반갑게 인사했지만, 마이트너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프리슈는 이모를 만나면 한에게서 전해 들은 아버지의 근황을 물어본 뒤 닐스 보어 연구소에서 하는 실험을 이모와 함께 의논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모의 얼굴을 보자 걱정이 되었다. 무슨 걱정거리가 있느냐고 물었다. 마이트너는 한에게서 온 편지를 조카에게 보여주었다. 프리슈는 우라늄에서 나온 게 바륨이라니,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사실이라면, 정말 충격적인 결과였다. 실수가 아니냐고 물었지만, 마이트너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아는 한은 그런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함께 아침 식사를 마친 뒤, 한과 슈트라스만의 결과를 놓고 열띤 토론을 했다. 프리슈는 이모와 산책하며 토론을 이어가기로 했다. 프리슈는 스키를 신었다. 마이트너는 그냥 걷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꽁꽁 얼어붙은 강을 건너 눈에 덮인 숲으로 향하며 토론을 이어갔다. 걷는 내내 마이트너는 1930년에 조지 가모프가 내놓은 핵모형을 떠올렸다. 1933년에 강의하면서 그 모형을 다룬 적도 있었다. 가모프의 모형은 물방울 모형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핵이 마치 물방울처럼 생겼다고 보고 핵을 다룬다. 여기서는 핵을 이루는 핵자(양성자와 중성자)의 미시적 양태보다는, 핵자들이 집단으로 보여주는 성질이 핵을 이해하는 데 더 중요하다고 본다. 이 모형은 보어도 핵반응을 설명하면서 사용했던 적이 있었다.
마이트너와 프리슈는 숲속으로 들어가 오래된 나무 그루터기 위에 앉았다. 숲속 우듬지 위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윙윙거렸다. 마이트너는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펴고 계산을 시작했다. 바람에 종이의 가장자리가 펄럭였다. 우라늄 안에는 양성자가 아흔두 개나 들어있으니, 이 정도 전하량이라면 우라늄의 표면장력을 충분히 이겨낼 만큼 셀 거라고 가정하였다. 그러면 우라늄 원자핵은 불안한 상태에 놓여있을 것이고, 거기에 중성자로 살짝 건드리면, 우라늄 원자핵이 둘로 쪼개질 수 있다. 한과 슈트라스만이 우라늄에 중성자를 쏴줬을 때 나온 바륨은 우라늄 원자핵이 쪼개지면서 나온 것이었다. 마이트너는 이때 나오는 에너지가 어마어마하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마이트너의 계산으로는 에너지의 양이 2억 전자볼트에 달했다. 우라늄 원자핵 하나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이 정도니 실제로 우라늄 1g이 모두 에너지로 바뀐다면,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에너지는 실로 어마어마할 터였다.
1939년 1월 3일, 코펜하겐에 도착한 프리슈는 곧장 보어에게 달려가서 마이트너와 함께 얻은 결과를 설명했다. 보어는 평소답지 않게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우리가 정말 멍청했던 것이군요. 이렇게 놀랍도록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보어는 프리슈에게 마이트너와 논문은 썼냐고 물었다. 프리슈는 곧 논문을 써서 <네이처>에 보낼 거라고 보어에게 대답했다. 마침 그때 보어는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막 여행을 떠나는 참이었다. 프리슈는 보어에게 신신당부했다.
“보어 교수님, 미국에 가거든 저와 나눈 이야기는 꼭 비밀로 지켜주세요. 아직 논문을 투고하지 않았으니 꼭 비밀로 지켜주셔야 합니다.”
보어는 프리슈에게 비밀을 지키겠노라고 굳게 약속했다. 프리슈는 가깝게 지내던 생물학자의 조언을 따라 우라늄 원자핵이 중성자를 받아 쪼개지는 현상을 핵분열(nuclear fission)이라고 불렀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 1939년 1월 7일, 보어는 열아홉 살 난 아들 에릭과 벨기에 출신의 젊은 이론물리학자 레옹 로젠펠드(Leon Rosenfeld)와 함께 미국 뉴욕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보어가 지낼 객실에는 칠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미국까지 가는 데는 열흘 가까이 걸렸다. 그동안 보어는 로젠펠드와 함께 핵분열에 대해 내내 토론하였다. 그런데 그만 로젠펠드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비밀로 해달라는 말을 깜빡 잊고 하지 못했다. 1939년 1월 16일, 보어는 뉴욕 허드슨강에 있는 항구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보어와 연구한 적이 있는 프린스턴대학교의 젊은 교수 존 휠러가 마중 나와 있었다. 곧이어 페르미 부부도 만나기로 되어있었다. 보어는 프리슈에게 비밀을 지키겠노라고 약속한 터라 휠러와 페르미 앞에서 핵분열이라는 말은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로젠펠드가 문제였다. 휠러를 만나자마자 로젠펠드는 핵분열 이야기를 전했다. 프린스턴으로 돌아온 휠러는 자신이 들은 핵분열의 발견을 그곳 교수들에게 전했다. 그렇게 핵분열의 비밀은 미국 핵물리학자 전체에게 알려졌다. 프린스턴에서 머무는 동안 보어는 휠러와 함께 가모프의 물방울 모형을 이용해서 핵분열을 정량적으로 설명하는 연구를 <피지컬 리뷰>에 출판하였다.
프리슈에게서 한과 슈트라스만이 발견한 건 핵분열이라는 말을 들은 덴마크 물리학자 크리스티안 묄레르(Christian Møller)는 만약에 우라늄이 핵분열을 하면서 중성자를 한두 개 더 내놓는다면, 이 두 번째 중성자가 계속해서 우라늄 원자핵을 계속 분열시킬 것으로 예측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더 큰 에너지가 나오며 중성자가 더 많이 나올 것이고, 핵분열 과정은 계속해서 일어난다. 묄러가 예측한 건 핵분열의 연쇄반응(chain reaction)이었다. 이 연쇄반응을 잘 제어한다면, 핵분열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조절할 수 있지만, 제어할 수 없다면, 연쇄반응은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핵분열의 고삐 풀린 연쇄반응, 그것이 원자폭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