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과 파괴 1
<세 개의 쿼크>의 1장과 2장 사이에는 원래 한 장이 더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를 다 넣을 수 없었습니다. "분열과 파괴", 1930년대에는 사이클로트론 말고도 중요한 이야기가 여럿 있습니다. 하나는 이론물리학에서 실험 물리학으로 방향을 바꾼 페르미가 초우라늄을 발견했고, 이 연구로 노벨물리학상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조금 더 지나 페르미가 발견한 건 초우라늄이 아니라 핵분열이었다는 걸 알게 되지요. 두 번째는 오토 한과 스트라스만이 핵분열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발견한 게 핵분열이라는 걸 리제 마이트너와 프리슈가 최종 결론을 내립니다. 이 발견으로 한은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지만, 리제 마이트너는 수상자에서 빠졌습니다. 여성 물리학자라서 그랬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여기서는 세 편으로 나누어 "분열과 파괴"를 실습니다.
<분열과 파괴>
<타임머신>, <투명인간>, <우주전쟁>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지만, <자유로워진 세계>는 잘 모를 것이다. 1914년에 출판된 이 책에서 원자폭탄이라는 말이 처음 나온다. 허버트 웰스(Herbert G. Wells)는 화학자 프레더릭 소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자유로워진 세계>의 책머리에 “프레더릭 소디의 라듐 해석”이라고 적어놓았다. 소디는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캐나다 맥길대의 교수로 있는 동안 함께 일했던 화학자였다. 러더퍼드는 “원자핵 속에 들어있는 핵에너지를 실제로 꺼내 쓸 수 있는 일은 없다”라고 단언했지만, 소디의 생각은 달랐다. 소디의 영향을 받은 웰스는 처음으로 “원자폭탄”이라는 말을 창조했다. 소설 <자유로워진 세계>에서 나오는 원자폭탄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폭탄보다 훨씬 강한 폭발력을 지녔지만, 도시 하나를 없앨 만큼 위력이 있진 않았다. 소설은 소설로 끝나야만 했지만, 원자폭탄은 웰스의 상상을 넘어 지독히 파괴적인 괴물로 현세에 등장했다.
엔리코 페르미와 비아 파니스페르나의 소년들
엔리코 페르미는 틀리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물리학의 교황이라 일컬었다. 그는 갈릴레오 갈릴레이 이후로 가장 위대한 이탈리아 물리학자였다. 스스로 물리학을 터득했고, 이론물리학과 실험물리학에 모두 능했다. 당시 이탈리아의 물리학을 단숨에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사람이었다. 1926년 3월에 페르미는 스물다섯의 나이에 물리학 역사에 길이 남을 논문을 썼다. 이 논문 한 편으로 그는 단번에 양자역학을 세운 하이젠베르크와 겨룰 만큼 유명해졌다. 이 논문의 결과는 같은 해 8월에 폴 디랙이 얻은 것과 더불어 <페르미-디랙 통계>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모든 통계물리학 교과서에 실렸다. 1933년에는 방사선 중에서 전자나 양전자에 해당하는 베타선을 설명하는 이론을 세웠다. 이 이론으로 페르미는 네 가지 근본적인 힘 중에서 약력을 세상에 처음 알렸다.
페르미는 약력을 제안한 엄청난 논문을 <네이처>에 투고하였지만, <네이처> 편집자는 추측과 상상으로 가득한 논문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논문의 게재를 거부했다. 이 논문은 <베타붕괴 이론에 대한 시도>라는 제목으로 이탈리아 논문집에 실렸다. 이 역사적인 논문을 게재하지 않기로 한 결정은 <네이처>가 범한 가장 멍청한 실수가 되고 말았다.
이론물리학에서 최고봉에 이르렀지만, 페르미는 처음으로 좌절을 맛보았다. 1934년 이후로 페르미는 돌연히 이론물리학에서 실험물리학으로 연구 방향을 바꿨다. 채드윅이 1932년에 중성자를 발견하면서 핵을 이해하는 데 물꼬가 트였다. 1935년에 유카와 히데키가 강력의 존재를 최초로 예견한 것도 중성자가 발견된 이후였다. 그리고 중성자는 페르미에게 운명처럼 다가왔다. 페르미는 중성자가 발견된 후, 이론물리학을 떠나 실험물리학으로 돌아섰다.
페르미는 1926년에 나이가 스물다섯에 불과했지만, 이미 이론물리학자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로마대학의 교수이자 훌륭한 정치가이기도 했던 오르소 코르비노(Orso Corbino)는 페르미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학문인 양자역학을 가르칠 사람으로 페르미가 적격이었다. 코르비노는 그를 데려오려고 로마대학에 이론물리학 교수 자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페르미를 로마로 데려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이미 베니토 무솔리니가 1922년부터 정권을 잡고 있었다. 페르미가 오기로 한 자리에 파시스트 정권과 가까운 사람을 앉히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런 방해를 이겨내고 코르비노는 1927년에 페르미를 로마로 데려왔다.
코르비노가 이끄는 물리학 연구소는 파니스페르나 가(Via Panisperna)에 있는 삼 층짜리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삼 층에는 코르비노와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고, 이 층에는 연구소 도서관과 실험실이 있었다. 일 층에는 강의실과 상점이 있었다. 연구소 건물은 야자수와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고즈넉했다. 오래된 건물이라 예스러운 풍취가 감돌았다. 이곳에서 페르미는 자신이 직접 만든 장비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실험을 한다.
페르미가 물리연구소의 이론물리학 교수가 되자, 젊은 학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코르비노는 피렌체에 있던 실험물리학자 프랑코 라세티(Franco Rasetti)를 불러들였다. 라세티는 페르미와 동갑내기였다. 그는 물리학 외에도 박식했고 산을 잘 탔고 곤충과 식물에 관해서도 아는 게 많았다. 게다가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런 라세티의 강의에 흠뻑 빠진 사람이 있었으니, 기계공학을 전공하던 에밀리오 세그레였다. 세그레는 라세티와 이야기하며 그만 물리학에 반해버렸다. 그가 기계공학을 그만두고 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꾼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훗날 세그레는 반양성자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물리학상을 받는다. 코르비노는 페르미 교수가 함께 일할 학생을 찾는다고 공지했다. 처음 찾아온 학생은 이제 열여덟 살이 된 에도아르도 아말디(Edoardo Amaldi)였다. 그는 훗날 유럽 입자물리학 연구센터(CERN) 소장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미가 갈릴레이나 뉴턴 급의 물리학자라고 인정한 천재 에토레 마요라나(Ettore Majorana)가 합류했다.
중성자 실험
채드윅이 발견한 중성자는 페르미에게 영감을 안겼다. 이론적으로는 약력을 발견하는 데 중성자의 발견이 몹시 중요했지만, 중성자는 페르미의 관심을 이론물리학에서 실험물리학으로 돌리게 했다. 이렌과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부부의 인공방사성 핵종의 발견도 페르미에게 또 다른 영감을 줬다. 페르미는 알파입자 대신에 중성자를 원자핵에 때려주면, 인공방사성 핵을 만드는 게 훨씬 수월할 거라고 여겼다. 1944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이지도어 라비도 이렇게 말했다.
“중성자는 전하를 띠지 않아서 중성자가 핵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을 강한 전기적 반발력이 없어요. 사실, 핵을 서로 잡아당기는 인력이 오히려 중성자를 핵 안으로 끌어당길 수도 있지요. 중성자가 핵 안에 들어가면 그 영향은 마치 달이 지구를 강타하는 듯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해요. 충돌로 인해 중성자가 포획되면, 핵은 충격으로 격렬하게 흔들릴 겁니다.”
그러나 중성자는 알파입자처럼 방사성 물질에서 바로 나오는 입자가 아니라 베릴륨에 알파입자를 쏴줘야 튀어나오므로, 그 양이 훨씬 적었다. 알파입자 만 개를 베릴륨에 때려주면, 기껏해야 중성자가 하나 튀어나왔다. 중성자의 수는 아주 적었지만, 전하를 띠고 있지 않아 원자핵 속으로 깊이 침투할 수 있었다. 폴로늄에서 나오는 알파입자로는 알루미늄보다 더 무겁고 전하량이 많은 원자핵을 다른 핵으로 변환시키는 건 거의 불가능했지만, 중성자로는 가능했다.
페르미는 물리연구소 근처에 있는 라듐연구소 소장 줄리오 트라바치(Giulio Trabacchi)로부터 라듐을 조금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라듐이 변하면서 생긴 라돈 기체를 베릴륨과 함께 유리관에 밀봉해서 중성자 선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라세티의 도움을 받아 가이거 계수기도 만들었다. 페르미는 졸리오퀴리 부부처럼 알루미늄부터 시작했다. 중성자를 알루미늄에 쏴주자 가이거 계수기가 반응했다. 중성자를 삼킨 알루미늄이 알파입자를 내놓으면서 나트륨 동위원소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나트륨 원자핵은 전자를 내놓으며 마그네슘으로 바뀌었다. 반감기는 대략 12분 정도였다. 대성공이었다. 1934년 3월 25일, 페르미는 이탈리아 학술지인 <라 리체르카 시엔티피카(La Ricerca Scientifica: 과학연구)>에 역사적인 논문을 출판했다. 이 새로운 발견은 유럽 전역으로 서서히 알려졌다. 그해 4월 23일, 러더퍼드는 페르미에게 중성자 실험을 잘 설명해 줘 고맙다는 편지를 페르미에게 보내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드디어 이론물리학으로부터 성공적으로 탈출한 것을 축하합니다.”
앤더슨이 디랙이 예언한 양전자를 발견했을 때, 실험물리학자가 디랙보다 먼저 양전자를 발견했어야 했다며 애석해하던 러더퍼드였으니, 이론물리학자로 널리 알려진 페르미가 실험물리학자로 전향한 사실이 무척 기뻤을 것이다. 페르미가 쓴 논문은 앞으로 15개월 동안 같은 학술지에 실리게 될 열 편의 논문 중 첫 번째 논문이었다. 이렇게 중성자물리학은 페르미의 손에서 태어났다. 이제 핵물리학자들은 페르미의 논문을 읽으려고 이탈리아어를 부지런히 배워야만 했다.
느린 중성자의 위력
페르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내친김에 주기율표에 나오는 모든 원소에 중성자를 쏴주기로 마음먹었다. 페르미는 아말디와 세그레에게 함께 실험하자고 요청했다. 오스카 다고스티노(Oscar D'Agostino)도 합류했다. 그는 프랑스 라듐연구소에서 지내면서 마리 퀴리에게 방사화학을 배운 화학자였다. 인공 방사성 핵종을 구분하려면 방사화학자의 도움이 필요했다. 1934년에는 그룹의 막내가 될 스물한 살의 청년 브루노 폰테코르보(Bruno Pontecorvo)가 합류했다. 훗날 그는 소련으로 망명해서 뉴트리노를 발견할 수 있는 반응을 제안했다.
1934년 10월이었다. 페르미가 런던 학회에 가 있는 동안, 폰테코르보는 아주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똑같은 표적과 중성자 선원을 썼지만, 이 장치를 대리석 테이블 위에 두느냐 아니면 나무 테이블 위에 두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졌다. 라세티는 의심쩍은 눈으로 폰테코르보를 흘겨보며 말했다.
“어이 강아지, 그럴 리가 없어. 네가 뭘 잘못 봤을 거야.”
강아지(Cucciolo: 쿠치올로)는 막내의 별명이었다. 그러나 라세티가 직접 나서서 실험해 봐도 결과는 똑같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비아 파니스페르나의 아이들은 혼란에 빠졌다.
1934년 10월 22일, 런던에서 돌아온 페르미는 테이블 곁에 서서 표적과 중성자 선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더니 5cm 두께의 파라핀 왁스 한 조각을 가져와서 표적과 중성자 선원 사이에 두었다. 그러자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파라핀 왁스를 두기 전보다 생성되는 방사성 동위원소의 양이 백 배 이상 증가하는 것이었다. 페르미의 제자들이 테이블로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장치가 고장 났을 거라고 여겼지만, 실험 장치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페르미는 점심 식사 후에 다시 논의하자고 말했다. 페르미는 혼자서 점심을 먹으며 느려진 중성자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곰곰이 따져봤다.
오후 세 시에 라세티를 비롯한 여섯 명이 다시 페르미 곁으로 모였다. 그들을 보며 페르미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이제야 발견하다니 참 멍청했어. 중성자는 파라핀을 지나면서 그 속에 든 수소 원자핵과 부딪히며 처음보다 에너지를 수천 배 정도 잃었을 거야. 속력이 무척 느려진 중성자는 표적 원자핵에 부딪히면서 그 속에 포획될 확률이 훨씬 높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야. 중성자는 전하가 없으니 표적 속에 든 양성자를 밀어낼 리도 없고. 이 느린 중성자가 표적 내부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표적 원자핵 속에 포획될 확률도 더 높아지겠지.”
알파입자의 경우에는 속력이 빨라야 표적과 핵반응을 더 잘 일으킬 수 있었지만, 중성자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느린 중성자가 핵반응을 일으키는 데 훨씬 효과적이었다. 폰테코르보가 우연히 발견한 이 느린 중성자는 핵물리학의 판도를 바꿔 놓았다. 폴로늄에서 나오는 알파입자는 알루미늄보다 무거운 원자핵과는 반응하기 힘들었지만, 중성자는 원자핵의 종류와 상관없이 그 속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그날 저녁 아말디의 집에 모여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세그레는 페르미가 불러주는 대로 열심히 받아 적었다. 옆에서는 라세티와 폰테코르보와 아말디가 시끄러울 정도로 이런저런 제안을 해댔다. 밤늦어서야 논문이 마무리되었다.
페르미는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코르비노에게 알렸다. 코르비노는 이 새로운 발견은 서둘러 특허로 등록하라고 페르미에게 말했다. 느린 중성자를 쓰면 동위원소 생산이 늘어날 거고, 의학용으로도 쓸 수 있을 테니, 좋은 수입원이 될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4일 후에 특허는 아말디, 페르미, 폰테코르보, 라세티, 세그레의 이름으로 등록되었다. 특허로 돈이 들어오면 트라바치와 다고스티노를 포함해서 일곱 명이 똑같이 나누자는 약속도 했다.
초우라늄
폰테코르보가 느린 중성자의 효용을 알아내기 전부터 페르미는 동료들과 함께 수소부터 시작해서 우라늄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한 많은 종류의 원소를 표적으로 삼아 중성자를 때려준 뒤, 인공적으로 방사성 원자핵을 생성시킬 수 있는지 조사했다. 그중에서도 우라늄은 특별했다. 자연에 존재하는 우라늄은 99.3%가 우라늄 238이고 나머지가 우라늄 235이다. 그러므로 우라늄은 대부분 우라늄 238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안에는 양성자가 92개, 중성자가 146개가 들어있다. 이 우라늄에도 느린 중성자를 쏴주었다. 우라늄은 대부분 알파 붕괴를 하므로 우라늄의 인공 방사성 핵종을 규명하는 일은 몹시 까다로웠다. 우라늄에 느린 중성자를 충돌시키자, 두 종류의 새로운 원자핵이 등장했다. 반감기가 13분 정도 되는 것과 1시간 30분쯤 되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그리고 둘 다 베타붕괴를 하였다. 우라늄보다 질량이 좀 적은 방사성 핵종이 나왔는지 살펴봤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느린 중성자를 쏴주었는데, 우라늄 안에 든 양성자나 중성자가 여럿 튀어나온다는 건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페르미는 아주 조심스럽게 우라늄보다 무거운 원자핵이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이게 사실이라면 최초로 우라늄보다 무거운 원자핵을 인공적으로 생성시킨 역사적인 발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대학의 학기는 전통적으로 이탈리아 국왕이 참석하는 린체이 아카데미의 학술회의로 마무리되었다. 린체이 아카데미는 1603년에 유럽에서 세워진, 가장 오래된 학술원이었다. 처음 세워졌을 때 중심인물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였다. 1934년, 이 대회에서 연설자로 나선 코르비노는 "현대 물리학의 결과와 전망"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연구소에서 수행한 중성자 연구를 설명하며 페르미가 발견한 초우라늄 원소에 대해 언급했다.
“원자번호 92인 우라늄의 경우 특히 흥미롭습니다. 중성자를 흡수한 우라늄은 전자를 방출하며 주기율표에서 한 단계 높은 원소, 즉 원자번호가 93인 새로운 원소로 빠르게 변환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새로운 원소도 방사성을 띠며 붕괴합니다. 아직 그 붕괴 과정은 알려지지 않았지만요.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에서 새로운 원소가 차지하는 위치를 보면 망간 및 레늄과 유사한 화학적 특성이 있으리라 예측합니다. 우라늄을 넘어서 새로운 원소가 발견되었다는 걸 확신합니다.”
이 소식은 이탈리아 전체에 알려졌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정작 페르미는 코르비노의 강연에 불편해했다. 초우라늄을 발견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로 확신할 수 없었다. 즉각적인 반응은 독일에서 나왔다. 레늄을 처음으로 발견한 이다 노닥(Ida Noddack)은 <안게반테 케미(응용화학: Angewante Chemie)>에 출판한 논문에서 페르미의 발견을 비판했다. 그녀의 논박은 타당한 점이 있었다. 그 많은 양성자와 중성자를 지닌 우라늄이 우라늄 하나를 받아들여 다시 전자를 내놓으며 붕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여러 핵으로 쪼개질 가능성이 더 컸다. 페르미와 그의 동료들은 노닥의 비판을 무시했다. 그녀는 자신의 주장을 말로 했을 뿐이지 정작 실험으로 보인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화학자의 말이었니, 이닥이 한 주장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페르미의 발견에 쐐기를 박는 듯한 결과가 독일 베를린에서 나왔다.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는 오토 한(Otto Hahn)을 설득해서 페르미의 중성자 실험을 시작했다. 두 사람은 페르미와 비아 파니스페르나의 아이들이 발견한 두 원소 중에서 반감기가 짧은 것은 원자번호가 93이고, 반감기가 긴 것은 94라고 확증했다. 두 사람의 발견으로 초우라늄의 발견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보였다. 1938년 12월, 페르미는 느린 중성자를 이용해서 인공방사성 핵종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이론물리학자였던 페르미가 노벨물리학상을 실험물리학으로 받았으니, 실험물리학자로 완전한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페르미가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그해에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던 현상이 발견된다. 그것은 핵분열이었다. 페르미에게는 무척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가 본 것은 초우라늄이 아니라 핵분열이었다.
와해된 비아 파니스페르나 그룹
“두체” 무솔리니가 파시스트 정권을 세운 건 1922년이었지만, 이탈리아에서 유대인에 대한 탄압은 거의 없었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며 독일에 사는 유대인에 대한 무자비한 압제가 시작된 것과는 달리 1934년에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에 반유대주의는 없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1938년 7월부터 무솔리니는 반유대주의를 천명하고 나섰다. 히틀러의 압력과 나치 독일과 곧 맺게 될 연맹 때문이었다. 1938년 9월 1일부터 정부에서 일하는 공무원들과 대학에서 가르치는 유대인 교수들은 모두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법이 발효되었다. 이 법은 비아 파니스페르나에 있는 물리연구소에도 영향을 미쳤다. 라세티, 세그레, 폰테코르보는 유대계 이탈리아인이었다. 이탈리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일찌감치 깨달은 폰테코르보는 1936년에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코르비노가 1937년 1월에 세상을 떠나면서 이들의 바람막이도 없었다. 1938년 6월에 미국을 방문하고 있던 세그레도 이탈리아에서 인종 차별법이 시행되면서 그만 귀국길이 막혀버렸다.
유대인이었던 아내와 아이들이 걱정되었던 페르미도 비밀리에 미국의 교수 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닐스 보어로부터 193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페르미는 1938년 12월,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러 스웨덴으로 떠나면서 가족들과 동행했다. 페르미는 로마역에서 아말디와 라세티를 만나 훗날을 기약하자며 이별의 포옹을 나눴다. 그리고 그길로 가족과 함께 스웨덴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페르미가 로마를 떠나면서 로마 핵물리학 그룹은 해체되었다. 라세티는 파시스트 정권을 좀 더 참고 견뎠지만, 1939년이 되자 결국, 캐나다로 떠났다. 아말디만 로마에 남았다. 그 역시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육군에 입대해 북아프리카 전선에 배치되었다. 중성자를 이용한 인공방사성 원소의 생성으로 한때 세계적인 핵물리 그룹으로 우뚝 섰던 로마 그룹은 무솔리니의 손에 와해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