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타쿼크의 죽음과 부활
내겐 <강력의 탄생>과 <세 개의 쿼크>를 써야 할 이유가 있었다.
폴란드 저널 <악타 피지카 폴로니카>에서 내년에 "펜타쿼크"를 주제로 논문을 모아 출판한다. 그 기획에 나도 초대받았다. 그래서 오는 12월 1일까지 펜타쿼크와 세 명의 러시아인(디아코노프, 페트로프, 폴야코프)에 관한 논문을 써서 보내야 한다.
양자역학을 세상에 처음으로 알린 위대한 논문은 "세 사람의 작품(Dreimännerwerk)"이라고 알려져 있다. 물리학자 세 사람, 그러니까 하이젠베르크, 요르단, 보른이 저자인 논문이라 그렇게 명명되었다. 1997년에 <차이트슈리프트 퓌어 피직 A>에 실린, 펜타쿼크을 예언한 논문을 저 세 사람의 작품에 비교하긴 힘들겠지만, 한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논문이었다. 2003년 여름에 가벼운 펜타쿼크가 발견되고, 한동안 펜타쿼크가 강입자물리학의 주된 주제가 되었다. 그러나 2006년, 제퍼슨연구소의 CLAS 실험에서 가벼운 펜타쿼크가 존제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발표한 뒤에 펜타쿼크라는 이름은 그만 볼드모트가 되고 말았다.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이름 말이다.
2010년에 펜타쿼크 논문을 썼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정교한 계산 결과를 담은 논문이었다. 그러나 논문은 <피지컬 리뷰 D>에서 게재거절 판정을 받은 뒤로 2년 넘게 여러 저널을 전전했지만, 게재할 수 없었다. 완전히 지친 나는 마지막으로 일본 저널인 <Progress of Theoretical Physics>에 논문을 투고하였다. 레퍼리는 "훌륭한 논문이라며 수정없이 이대로 실어야 한다"고 평했다. 그렇게 논문은 일본 저널에 출판되었다. 그때 기분은 표현하기 힘들 만큼 묘했다. '아, 펜타쿼크가 존재하는 나라는 일본과 러시아밖에 없구나.' 희한한 일이지 않은가. 입자의 존재도 지역에 의존한다는 사실 말이다.
2015년, LHCb에서 무거운 펜타쿼크를 발견하기까지 그런 분위기는 계속되었다. 무거운 펜타쿼크가 발견되면서 사람들의 신경질적이었던 마음이 좀 수그러들었다.
일본 도카이에 있는 30 GeV 양성자 가속기에서 만들어 내는 케이온을 이용하면 펜타쿼크의 존재 여부에 최종 종지부를 찍을 실험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틈 날 때마다 실험물리학자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쉽나. 실험이란 돈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사람이 필요하다. 그 사이에 제퍼슨 연구소에 있는 몇몇 실험 물리학자들이 케이온 실험을 제안했다. 물론 펜타쿼크를 찾는 실험을 하겠다는 건 입밖에도 꺼내지 않았다. 행여 펜타쿼크를 입에 담으면 실험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일련의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펜타쿼크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들을 꼭 기록으로 남겨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려면 우선 내 분야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알릴 필요가 있었다. <강력의 탄생>과 <세 개의 쿼크>를 집필한 이유다. 내년부터 이 두 책에 이어 삼부작의 마지막 편인 <펜타쿼크의 죽음과 부활>을 쓴다. 펜타쿼크 외에 몇몇 주제를 함께 다루긴 하겠지만, 오늘날 이야기라 조금은 팩션의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그래서 관건은 글이다. 글을 쓰고 책을 쓰며 더 나은 글을 쓰려고 애쓴 이유도 저 <펜타쿼크의 죽음과 부활>만큼은 잘쓰고 싶어서였다.
누구는 그토록 집요할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또 어떤 스페인 친구는 "파나틱이냐?"라고 메일을 보내왔다.
세상에 그런 집요함 없이 무슨 학문을 할 수 있을까?
우선 <악타 피지카 폴로니>에 출판할 논문부터 잘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