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로체스터
조지 로체스터
<세 개의 쿼크>의 주인공은 조지 로체스터(George Rochester)와 클리포드 버틀러(Clifford Butler)입니다. 두 사람 중에서도 침투 우주선 연구를 주도한 사람은 로체스터였지요. 책에서는 짧게 다뤘지만, 로체스터의 삶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 보면, 배울 점이 많은 분입니다.
조지 로체스터는 1908년, 영국 북동부 뉴캐슬 어폰 타인 근처에 있는 도시 월센드에서 태어났다. 대학을 다닐 때까지 다른 지역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영국 타인(Tyne) 지방 토박이였다. 아버지는 월센드에 있는 조선소에서 일하는 대장장이였다. 웰센드 조선소는 타이타닉이 침몰했을 때 그곳에서 탈출한 승객들을 구했던 카파티아 선을 만든 곳으로 유명했다.
어머니는 생활력이 넘치는 여자였다. 형제도 많았다. 조지의 부모는 많이 배우지는 않았지만, 자식들 교육에는 관심이 컸다. 조지는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성실함이란 무엇인지 배웠다. 학교에서 처음에는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대기만성형이었다. 천성이 워낙 겸손했던 그는 자신의 성적이 많이 오른 이유가 똑똑한 친구 도움을 많이 받은 덕이라고 이야기하곤 했지만, 다른 학생들보다는 배나 열심히 공부했다는 건 친구들도 잘 알았다.
그는 물리학과 화학을 유난히 좋아했다. 그래서 졸업할 즈음에는 물리학과 화학만큼은 학교 전체에서 일 등을 할 만큼 잘했다. 그런 노력 덕에 부모의 도움 없이 얼그레이 기념 장학금을 받고 더럼대학교의 분교라고 할 만한 뉴캐슬의 암스트롱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서도 정말 열심히 공부하였다. 식물학 교수는 열심히 공부하는 로체스터가 탐이 났던지 식물학을 공부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지만, 그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물리학이야말로 과학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고 여겼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하루는 시간가는 걸 잊고 학교에서 공부했다. 새벽녘이 다 되어도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된 어머니는 경찰서에 신고했다. 경찰은 로체스터를 찾으려고 대학 건물을 뒤지며 다녔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경찰은 어두운 대학 건물의 한 구석진 곳에 앉아 풀지 못한 문제를 푸느라 경찰이 온 것도 모를 정도로 몰입하고 있는 로체스터를 발견하였다. 이 정도였으니, 어머니가 저렇게 공부하다가 건강이 나빠질까 아들을 걱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로체스터는 공부만 잘한 게 아니었다. 대학을 대표하는 하키 선수였고, 순수과학 동아리와 기독교 동아리 회장도 했다. 그때 기독교 동아리 총무였던 영문학과 학생 아이덜라인 베일리프(Idaline Bayliffe)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는 그때 만난 베일리프와 평생을 함께 하게 된다.
그는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했고, 이어 커티스 교수 연구 그룹에서 본격적으로 분광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덕에 장학금을 받아 스웨덴에서 연구할 기회가 생겼다. 그는 천성이 성실했던 터라 스웨덴에 있으면서 수소화물의 스펙트럼을 연구해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 로체스터 본인 말로는 맹장 수술을 받을 때 빼고는 공부밖에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장학금을 또 한 번 받게 되었다. 로체스터는 그 돈으로 1935년부터 1937년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에서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리버풀 항구는 여느 때처럼 사람들로 붐볐다. 곧 미국으로 떠나기로 되어있는 여객선 사마리아 선은 길게 기적 소리를 냈다. 아이덜라인과 팔 년 가까이 사귀었지만, 자신의 공부 때문에 한 번씩 오랫동안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무척 안타깝고 미안했다. 지금 미국으로 가면 이제 2년 동안 그녀를 만날 수 없다. 그러나 베일리프는 그를 다독였다.
“조지, 이곳은 걱정하지 말아요. 그동안도 기다렸는데, 서로 2년을 더 못 기다릴 이유는 없어요.”
그래도 자신을 위로해주는 그녀가 정말 고마웠다.
비록 약혼녀와 2년 동안이나 떨어져 지내야 했지만, 버클리에서 보낸 시간은 그의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는 거기서 오펜하이머를 만났고, 훌륭한 물리학자들을 많이 만났다. 물리학은 책에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로체스터는 버클리에 머물면서 그곳을 방문하는 물리학자들을 만나고 그들과 이야기하며 물리학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버클리에는 앞으로 오는 세대를 이끌 실험물리학자가 있었으니, 어니스트 로런스(Ernest Lawrence)였다. 그는 러더퍼드에 버금갈 정도로 뛰어난 물리학자였다. 심지어 그의 이름조차 어니스트 러더퍼드와 같았다. 로런스는 매주 “오전 8시 클럽”이라는 모임을 열었는데, 이 모임에서는 지난주에 있었던 실험결과를 발표하거나 버클리를 방문하던 물리학자들이 와서 세미나를 하곤 했다. 그중에는 닐스 보어, 존 휠러(John A. Wheeler), 로버트 밀리컨, 아서 컴프턴, 존 콕크로프트(John D. Cockcroft)같이 유명한 물리학자들도 있었다. 로체스터는 그 클럽에 빠지지 않고 참가했다. 그는 매주 새로운 결과를 대하면서 핵물리학의 매력에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게다가 그는 실험에 참여하면서 물리학과 실험 기술도 눈에 띄게 발전하였다. 로체스터는 버클리에서 2년을 보내면서 제대로 된 실험물리학자로 커갔다.
맨체스터에 온 로체스터
버클리에 온 지 2년 정도 되었을 무렵, 로체스터는 맨체스터대학에서 보조강사를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이제 영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무엇보다도 로체스터는 사랑하는 아이덜라인이 보고 싶었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맨체스터대학에 보조강사가 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로런스 브래그(Lawrence Bragg) 경이 있었다. 그는 1915년에 엑스선 회절 연구로 아버지 윌리엄 헨리 브래그(William Henry Bragg)와 같이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뒤, 1917년부터 케임브리지대학에 있는 캐번디시 연구소로 떠난 러더퍼드의 후임으로 맨체스터대학 랭워시 교수가 되었다. 로체스터는 브래그 교수 밑에서 보조강사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1937년, 러더퍼드가 세상을 떠나면서 브래그가 러더퍼드의 후임으로 다시 캐번디시로 떠났다. 브래그의 랭워시 교수 자리는 패트릭 블래킷에게 돌아갔다. 블래킷은 침투 우주선을 연구하는 학자였다. 그는 오자마자 “이곳에서 할 연구는 우주선 연구다”라고 못박았다. 로체스터는 분광학 전문가였다. 그가 워낙 뛰어난 걸 알았던 여러 대학에서 그를 강사로 초빙했지만, 거절했다. 곧 아이덜라인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어서였다. 그리고 버클리에서 경험했던 핵물리학도 그의 관심을 끌었던 터라 곧 블래킷의 연구그룹에 합류한다.
블래킷의 그룹에서 그가 한 연구가 <세 개의 쿼크> 1장의 주제다.
훗날 로체스터는 고향으로 돌아가 더럼대학 물리학과의 교수가 된다. 학과장으로 지내면서 그곳 물리학과를 발전시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