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Ch Kim 김현철 Oct 05. 2024

<세 개의 쿼크>의 뒷이야기 1

별이 지다

1. 2021년에 출간된 <강력의 탄생>에 이어 2014년 10월, <세 개의 쿼크>가 출간되었습니다. 지면의 양을 무한정 늘릴 수 없어 담지 못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강력의 탄생>에서는 1895년, 뢴트겐이 엑스선을 발견한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1947년에 세실 파월이 우주선에서 파이온을 발견한 이야기로 끝을 맺었습니다. 다들 잘 안다고 생각하는 뢴트겐과 마리 퀴리의 이야기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좀 식상하다고 여긴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뢴트겐과 마리 퀴리 없이 핵물리학과 입자물리학의 시작을 이야기하긴 어렵습니다. 뢴트겐은 원자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보여 주었습니다. 마리 퀴리 하면, 다들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한 물리학자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녀는 원자의 문을 열고 그 속으로 들어간 첫 번째 물리학자입니다. 마리 퀴리가 분명하게 말했지요, "방사선은 원자에서 오는 게 아니라 그 깊숙한 곳에서 오는 것"이라고요. 비록 그녀는 원자핵을 발견하진 않았지만, 원자 속 깊은 곳에 뭔가 있다는 건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리 퀴리 이야기부터 시작했습니다.


2. <세 개의 쿼크> 1장은 제목이 "낯선 입자"입니다. 대개는 기묘한 입자라고 부르는데, 기묘하다는 어감보다는 "낯설다"라는 말이 당시 상황을 드러내는 데 더 적당하다고 여겼습니다. 이 장의 주인공은 조지 로체스터와 클리포드 버틀러입니다. 낯선 입자의 발견은 강력과 약력을 깊이 이해하는 데 첫 번째 단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두 분이 노벨물리학상을 받지 못한 게 안타깝습니다.


3. 1장은 러더퍼드의 죽음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다 실지 못한 이야기를 시리즈로 여기에 담아볼까 합니다. 일종의 감독판이라고나 할까요. 혹시 책을 읽으신 다음, 앞뒤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이곳에 오셔서 읽어보실 수 있을 겁니다. 좀 더 쉽게 찾을 수 있게 브런치에도 올리겠습니다.

신간 <세 개의 쿼크>


2021년에 출간된 강력의 탄생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그는 원자의 문을 열어젖히고 용감하게 그 안으로 들어간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러더퍼드만큼  원자 속을 낱낱이 드러낸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원자 속 깊숙이 핵이 있다는 걸 가장 먼저 알아낸 사람이었다. 그는 원래 영국에서 거의 만 팔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뉴질랜드, 거기서도 작은 항구 도시였던 넬슨 출신의 촌사람이었다. 지금도 마오리 전사들의 외침이 메아리처럼 들려올 것만 같은 곳, 그는 그곳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에 있는 캐번디시연구소에서 핵물리학이라는 분야를 열게 될 실험물리학자로 거듭났다. 러더퍼드는 캐나다 맥길대학을 거쳐 맨체스터대학으로, 그리고 다시 지도교수였던 조지프 톰슨의 뒤를 이어 노벨 물리학상을 받고, 또 그의 뒤를 이어 캐번디시연구소의 소장이 되었다.

어니스트 러더퍼드


1937년 10월 13일 목요일, 러더퍼드는 아내 메리의 부탁을 받아 정원의 나무를 손질하고 있었다. 나무에 올라가 가지를 치다가 그만 나무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높은 가지도 아니었는데, 그는 배에서 심한 통증을 느꼈다. 그에게는 지병이 있었다. 배꼽탈장. 그는 그다지 큰 병이라 여기지 않았는데, 나무에서 떨어지면서 심한 복통과 구토를 느꼈다.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메리는 동네 안마사를 불렀다. 배를 마사지해 봤지만,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러더퍼드는 계속 토했다. 메리는 부랴부랴 의사를 불렀지만, 그곳 의사들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러더퍼드는 작위를 받은 물리학자였다. 넬슨의 러더퍼드 경. 작위를 받은 사람의 수술은 작위를 받은 의사만이 할 수 있었다. 런던에 있는 저명한 외과의사 토머스 던힐(Thomas Dunhill) 경이 연락을 받고 급히 케임브리지로 내려갔다. 배꼽탈장을 수술하는 건 그때도 그리 어려운 수술이 아니었지만, 문제는 시간이 지체되면서 러더퍼드가 버텨 내기에는 배꼽탈장의 상태가 심하게 악화되어 있었다.


수술을 받은 후에 러더퍼드의 상태는 호전되는가 싶었다. 그러나 러더퍼드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졌다. 10월 19일 오후에 메리는 러더퍼드의 제자인 제임스 채드위크와 런던에 있는 올리펀드에게 편지를 썼다. 그의 병세를 알리는 편지였다. 편지를 쓸 때만 해도 메리는 러더퍼드의 상태가 좋아질 거라는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저녁, 러더퍼드는 메리에게 “내가 죽거든 잊지 말고 넬슨 대학에 100파운드를 기부하라”라는 말을 남겼다. 그가 죽는 순간에 떠올린 건 자신의 고향, 뉴질랜드의 넬슨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숨을 거뒀다.


그의 죽음은 러더퍼드의 제자들에게 알려졌다. 맨체스터에 있으면서 러더퍼드에게서 물리학을 배웠던 닐스 보어(Niels Bohr)는 러더퍼드가 죽던 날, 이탈리아에서 열린 학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갈바니 전지를 만든 루이지 갈바니(Luigi Galvani)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학회였다. 보어는 갑작스러운 러더퍼드의 죽음을 알리는 소식에 정신이 멍해졌다. 보어는 학회에서 사람들에게 그의 죽음을 알리며 눈물을 흘렸다. 러더퍼드의 사망 소식은 소련에 있는 표트르 카피차(Pyotr Kapitza)에게도 전해졌다. 그는 러더퍼드에게 양아들이나 다름없는 애제자였다. 학문의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었다. 그가 어쩔 수 없이 러더퍼드를 떠난 게 2년 전이었다. 그가 영국을 떠날 때만 해도 건강해 보였으니, 그가 죽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핵물리학을 세운 거인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1937년 10월 25일,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 묻혔다. 그곳은 아이작 뉴턴이 묻혀있는 곳이기도 했다. 러더퍼드는 핵물리학의 뉴턴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물리학자였다. 뉴턴은 한때 연금술에 깊이 심취한 적이 있었다. 금을 만들 수 있는 돌, 뉴턴이 그토록 찾아다니던 마법사의 돌을 손에 넣은 사람은 러더퍼드였다. 그는 맥길대학교에 있으면서 프레데릭 소디와 같이 다른 물질을 변환시켜 금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였다. 핵물리학에서 핵변환이라고 부르는 것, 그걸 가장 먼저 찾아낸 사람이 러더퍼드였다. 그러니 러더퍼드가 핵변환을 발견한 건, 마법사의 돌을 찾아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죽으면서 남긴 유산은 9,000파운드가 채 되지 않았다. 그 액수는 러더퍼드가 노벨 화학상을 받으면서 같이 받게 된 돈보다 조금 적었다. 러더퍼드는 캐번디시 연구소의 소장으로 있으면서 그곳에 <캐번디시 정신>이라는 걸 심은 사람이었다. 실험물리학자라면 실험에 필요한 건, 그게 무엇이든 직접 만들어서 쓰는 것, 실험물리학자라면 능히 만물박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 유리관이 필요하면 유리에 열을 가해 직접 불면서 만들어야 하고, 장치를 밀봉할 때는 직접 손으로 그 장치에 왁스를 발라야 하고, 전자회로도 필요하면 직접 만들어서 쓰는 게 캐번디시 정신이었다. 이런 러더퍼드였으니 마음만 먹었다면, 수백 개, 아니 수천 개의 특허도 신청할 수 있었지만, 그는 한 번도 특허를 신청한 적이 없었다. 마치 퀴리 부부가 라듐을 추출하면서 썼던 방법을 특허로 내지 않았듯이 러더퍼드도 물리학에서 얻은 건 모든 이들이 누려야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니 그가 남긴 돈은 9,000파운드 남짓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가 후세에 남긴 유산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러더퍼드의 위대한 유산은 또 있었다. 그에게 물리학을 함께 연구하는 동료의 국적, 인종, 성별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아끼던 제자 중에는 헤리에트 브룩스(Harriet Brooks) 같은 뛰어난 여성 물리학자도 있었다. 카피차의 국적이 소련이라든가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사실도 러더퍼드에게는 문제 될 게 전혀 없었다. 러더퍼드는 그가 죽던 해인 1937년의 세계의 흐름과는 정반대에 섰던 사람이었다 [1].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연의 진리를 함께 탐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과학이 악용되는 걸 심히 경계했다. 그는 아무리 상상력이 뛰어난 과학자라도 과학의 발견이 악용될 가능성을 감지하는 건 어렵다고 여겼지만, 과학이 사악한 목적으로 쓰이는 걸 매춘이라고 부를 정도로 혐오했다. 그러니 그가 세상에 남긴 건 핵물리학뿐만이 아니었다. 과학을 하는 정신, 과학을 하는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그는 오는 세대에 깊이 각인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물리학의 큰 별이었다.


[1] 1937년 4월 26일, 게르니카에는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이날은 월요일이었고 장이 서는 날이라 시내 중심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오후 네 시가 좀 지났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교회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공습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이어서 가슴이 울릴 정도로 저음의 비행기 소리가 들렸다. 장을 보던 사람들은 황급히 피할 곳을 찾아 갈피를 못 잡고 뛰었다. 게르니카 상공에 나타난 폭격기들은 사람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낮게 날고 있었다. 폭격기 동체 밑이 열리더니 폭탄이 쏟아져 내렸다. 오후 4시 20분, 게르니카의 학살이 시작되었다. 폭격기가 지나가고 나자 장터가 있던 광장은 불길이 치솟았고, 검은 연기로 덮였다. 사람들은 시내를 벗어나려고 정신없이 뛰었다. 폭격기에 이어 시내 바깥에서부터 전투기들이 일렬로 들어오면서 도망치는 사람들에게 기관총 사격을 퍼부었다. 도망치던 사람들은 다시 시내 쪽으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그건 마치 전투기가 사람들을 사냥하는 것만 같았다. 도망치던 사람들은 기관총에 맞아 쓰러졌다. 그들 중에는 여자와 아이들도 있었다.

1937년 4월 26일,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어버린 게르니카 시내
게르니카의 학살에 분노하며 그린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


오후 4시 20분에 시작된 공습은 세 시간 동안 네 차례에 걸쳐 계속되었다. 폭탄이 건물을 부수고 나면, 그 위로 소이탄이 떨어지면서 거기서 나온 가연성 액체가 부서진 건물 틈새로 스며들었다. 공습을 피해 지하실로 숨었던 사람들도 불이 붙은 이 액체를 피할 수 없었다. 그날 게르니카는 불바다로 변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파시스트 반란군을 돕던 나치 독일은 게르니카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융단폭격을 실험한 것이었다. 그날 게르니카에서 목숨을 잃은 민간인은 수백 명에 달했다.


그해 10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는 라파엘 트루히요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군인들이 공화국 동쪽에 사는 아이티인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아이티인의 수는 이만 명에 달했다. 더 엄청난 학살은 그해 12월에 중국 난징에서 벌어졌다. 일본육군은 난징을 점령하면서 사로잡은, 18,000 명이나 되는 중국군 포로들을 장강에서 모두 처형하였다. 그건 난징 대학살의 시작이었다. 일본군들은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난징에 남아있던 민간인을 살해하고 강간했다. 죽어간 이들의 수가 너무 많아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1937년은 소련에서 스탈린의 지시를 받아 정적들을 대대적으로 살해하는 대숙청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이기도 했다. 이 대숙청은 정치를 넘어 셀 수 없이 많은 일반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대숙청으로 죽어간 과학자들의 수만 해도 백여 명이 넘어설 정도였다.        


러더퍼드가 세상을 떠난 1937년은 이처럼 지옥의 문이 열린 해였다. 한 민족이 다른 한 민족을 말살하는 시대, 다른 사상을 가진 자들을 제거하는 시대, 자신과 다른 종족이라고 서슴없이 상대를 난도질하는 시대, 관용이 발붙일 곳이 없던 시대,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민간인을 학살하던 지옥의 시대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물리학의 신, 란다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