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Ch Kim 김현철 May 08. 2024

물리학의 신, 란다우

레프 란다우는 지금은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이지만, 1908년 1월 22일에 러시아 남쪽 카스피해에 있는 도시 바쿠에서 태어났다. 천재로 불리는 이론물리학자들이 대개 그렇듯 란다우도 어릴 때부터 수학에 뛰어났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열두 살에 미분을 할 줄 알았고, 열세 살에는 적분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열세 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부모는 이제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아들을 멀리 떨어진 곳에 보내기에는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그래서 란다우를 바쿠에 있는 경제기술학교에 보냈다. 그곳에는 란다우의 누나도 공부하고 있어서 안심할 수 있었다. 일 년 뒤인 1922년, 란다우는 바쿠 대학에 입학했다. 열네 살에 란다우는 물리학과와 수학과에서 동시에 수업을 들었다. 그때 벌써 물리학이나 수학 교과서에 나오는 이론을 스스로 세워보려고 애썼다.      

레프 란다우

2년 뒤, 열여섯 살이 된 란다우는 물리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한 뒤, 레닌그라드대학의 물리학과로 옮겼다. 한때는 상트페테르부르크라고 불리던 도시가 한동안 페트로그라드라고 불리더니, 이제는 혁명에 성공한 레닌의 이름을 따 레닌그라드라고 불렸다. 란다우는 레닌그라드에서 비로소 이론물리학에 눈을 떴다. 그곳에서 양자역학 논문을 읽어가며 이론물리학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희열에 찬 일인지 깨달았다. 그중에는 슈뢰딩거가 쓴 논문도 있었고, 하이젠베르크와 요르단, 보른이 쓴 논문도 있었다. 그는 논문을 읽으며 어떤 논문이 중요하고 어떤 논문은 무시해도 되는지 분별력을 키워갔다. 그때부터 그는 “다우(да́у)”라는 애칭으로 사람들에게 불리기 시작했다. 그와 가까운 사람은 그를 늘 다우라고 불렀다. 그는 열아홉 살에 레닌그라드대학을 졸업하였다.

그가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는 이미 양자역학이 나온 뒤였다. 훗날 그는 자신이 조금 더 일찍 태어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한번은 이런 말도 했다. 


“예쁜 여자들은 이미 다 결혼해 버렸고, 멋진 문제들은 남들이 이미 다 풀어버렸어. 남아있는 것 중에 내 마음에 드는 건 없어.”

어쩌면 란다우가 몇 년 더 일찍 태어났다면, 양자역학을 세상에 내놓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을 것이다. 란다우는 하이젠베르크보다 일곱 살 아래였고, 디랙보다는 여섯 살 더 어렸다. 중요한 연구는 이미 다 되어 있었고, 남은 게 별로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 당시 물리학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고 있었고, 란다우가 연구할 수 있는 건 많고 많았다. 


란다우는 열여덟 살에 자신의 첫 번째 논문을 혼자서 출판하였다. 놀라운 건 이미 당시에 내로라하는 수학자였던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이 얻은 결과를 비슷한 시기에 혼자서 구했다는 것이었다. 논문이 출판된 시기도 거의 비슷했다. 차이가 있다면, 아직 어린 나이라 노이만이 쓴 논문만큼 체계적이지 않았을 뿐이지, 노이만이 내놓은 이론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가 어린 나이에 이룬 연구는 오늘날 양자역학 교과서에도 실려 있고 여전히 연구에 쓰일 정도니, 놀라운 연구를 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늦게 태어났다는 란다우의 한탄이 무색했다. 


유럽으로 간 란다우

란다우는 대학을 졸업한 뒤, 아브람 요페가 이끄는 레닌그라드 피즈텍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그리고 1929년에 교육 인민위원회에서는 란다우에게 1년 반 동안 유럽으로 나가서 공부할 기회를 줬다. 유럽을 방문할 때 그의 나이는 스무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논문을 여러 편 출판한 학자였다. 18개월의 방문이었지만, 여러 곳을 다니며 동시대의 위대한 물리학자들을 만나 토론을 했다. 독일에 가서 아인슈타인을 만났고, 하이젠베르크도 만났다. 덴마크 코펜하겐에서는 보어를 만났다. 란다우는 보어가 시간이 날 때마다 그와 토론을 나눴다. 칠판 앞에서, 함께 식사하면서, 산책하면서, 두 사람은 참 많은 토론을 나눴다. 때로는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고 옆길로 새곤 했지만, 란다우는 토론 없이 나오는 결과는 헛되다고 여겼다. 이론물리학은 이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토론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는 보어와 토론을 하면서 보어가 물리학을 보는 관점을 알게 되었다. 웬만해서는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뛰어나다고 여긴 적이 없는 란다우도 보어는 존경했다. 그에게서 참 많은 걸 배웠다. 란다우는 자신을 늘 보어의 제자라고 여겼다. 보어야말로 란다우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물리학자였다. 보어 역시 란다우를 높게 샀다. 란다우는 물리학 문제를 다룰 때 그 문제의 뿌리까지 접근할 만큼 생각이 깊었지만, 삶의 모든 면에서 주관이 지나치게 뚜렷했다. 그래서 란다우는 보어 앞에서 자주 투덜거렸는데, 그럴 때마다 보어는 란다우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다우, 투덜거리지 말고 비판을 해요. 내가 먼저 당신을 비판해 볼게요.”


훗날 란다우가 자신의 학파를 세워가면서 본으로 삼은 건 보어였다. 그는 보어에게서 토론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다.


란다우도 페르미처럼 무엇이든 분류하는 걸 즐기곤 했다. 그는 물리학자를 십진 로그 함수로 분류하곤 했다. 이를테면 아인슈타인은 십진 로그값이 1/2인 물리학자였다. 그러니까 란다우에게 아인슈타인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 세 명 중 한 명이었고, 다음이 보어였다. 보어는 십진 로그값이 1이었다. 그러니까 역사상 존재했던 물리학자 중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 열 명 중 한 명 안에는 드는 물리학자로 보어를 들었다. 다음으로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 디랙, 페르미를 꼽았다. 자신은 로그값이 2와 1/2이라고 두었는데, 나중에 2라고 수정했다. 그러니까 자신은 뛰어난 물리학자 100명 안에는 든다고 여겼다. 


란다우는 케임브리지에 가서 폴 디랙을 만나 함께 토론했다. 그곳에서 자신의 인생에 한 번은 크게 도움을 줄 중요한 친구 표트르 카피차도 처음 만났다. 앞으로 소련의 물리학을 이끌어갈 두 거인의 만남이었다. 란다우는 카피차보다 열네 살이나 더 어렸다. 두 사람 모두 요페가 세운 피즈텍에서 연구했지만, 란다우가 피즈텍으로 올 때 카피차는 이미 영국에서 러더퍼드와 연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비록 나이는 열네 살이나 차이가 났지만, 케임브리지에서 만난 두 사람은 평생 친하게 지낼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훗날 모스크바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란다우는 카피차와 함께 토론하면서 그가 측정한 금속의 전기전도도가 외부에서 걸어준 자기장에 영향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양자역학을 이용해서 그 문제를 해결했다. 이 연구는 오늘날에도 인용을 받을 정도로 유명한 연구였다. 그리고 란다우는 다시 스위스 취리히로 내려가서 파울리를 만났다. 취리히에는 루돌프 파이얼스가 1929년에 라이프치히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파울리의 조수로 와 있었다. 란다우는 취리히를 방문하는 동안 파이얼스와 함께 양자전기역학에 관한 논문을 썼다. 그리고 케임브리지에서 끝낸 금속의 자성 연구에 관한 논문을 취리히에 머무는 동안 끝냈다. 역사에 오래도록 기억될 논문이었다. 일 년 반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란다우는 많은 물리학자를 만났고, 닐스 보어라는 위대한 선생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소련으로 되돌아갈 즈음에는 이미 유명한 이론물리학자가 되어 있었다.    

  

소련으로 돌아오다

1931년 3월, 그는 레닌그라드로 돌아와 피즈텍에서 다시 일했다. 1931년에 피즈텍은 이미 소련의 물리학을 이끌어가는 엔진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란다우가 보기에는 피즈텍이 지나칠 정도로 응용물리학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래서 공공연히 요페를 비판했다. 요페로서는 자기 아들 나이밖에 되지 않은 새파랗게 젊은 친구가 자신을 비판하는 게 달갑지 않았다. 게다가 란다우는 요페가 쓴 논문도 비판했다. 요페는 젊은 란다우의 비판을 곰곰이 따져보고 그가 옳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사사건건 반기를 드는 란다우가 좀 밉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란다우의 세미나를 듣고 있다가 란다우가 발표하고 있는 내용에 그다지 중요한 게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란다우는 요페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되받아쳤다. 


“이론물리학은 복잡한 과학입니다. 아무나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투와 호리호리하게 마른 몸에 불꽃이 튈 것만 같은 그의 눈빛은 드디어 요페의 분노를 일으켰다. 게다가 그 자리에는 요페 말고도 연구소 사람들이 대부분 모여 있었다. 요페는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요페는 자기보다 한참 어린 란다우가 자기에게 거칠게 대드는 걸 더는 참아주기 힘들었다.   

   

하르키우 물리기술연구소

1928년부터 스탈린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여러 지역에 물리기술연구소가 세워졌다. 거기서도 일할 사람들이 필요했다. 레닌그라드 피즈텍에 있는 물리학자들 중에서도 새로 생긴 연구소로 갈 사람들을 모집했다. 요페와 사이가 좋지 않던 란다우는 우크라이나 하르키우(Kharkov)에 새로 생긴 물리기술연구소로 가기로 결심했다. 


란다우는 그곳에 있는 물리기술연구소의 이론부 부장이 되었다. 드디어 란다우는 하르키우에서 자신만의 연구그룹을 이끌게 되었다. 이렇게 하르키우에서 훗날 “란다우 학파”라고 불리게 될 전설이 시작된다. 그는 이론물리학 전 분야를 강의하였는데, 학생들에게 무척 매력적인 강의였다. 나이는 강의를 듣는 학생들과 거의 같았지만, 그는 이미 물리학의 전 분야를 깊이 꿰고 있었다. 독창적이었던 이 강의는 앞으로 이론물리학을 전공하려면 ‘최소한 알아야 할 내용(theoretical minimum)’으로 정리된다. 훗날 그의 제자가 되려면 반드시 이 과정을 통과해야만 했다. 물리학자들은 이 시험을 <란다우의 벽>이라고도 불렀다. 란다우가 살아있는 동안, 이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마흔세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란다우의 제자가 되었고, 그중에서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도 나왔고, 소련 학술원 회원도 나왔다. 그는 엄격한 선생이었다. 학생들은 이 젊은 선생을 우러러볼 정도로 존경했다. 


그는 하르키우에 머무르는 동안 박사학위를 했는데, 학위논문을 쓰지 않고 학위를 받았다. 그래서 그와 친한 사람들은 이 일로 란다우를 놀리기도 했다.


“박사학위 위원회에서 젊은 다우가 박사학위 논문을 쓸 줄 모르니, 그냥 학위를 줘버리자고 결정한 덕분에 겨우 박사학위를 받았잖아.” 


실제로 란다우는 뭔가 쓰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제자였던 에프게니 리프쉬츠(Евге́ний М. Ли́фшиц)와 교과서를 집필할 때도 직접 쓴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책의 내용은 모두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교과서를 함께 쓴 리프쉬츠는 이런 말을 했다.


“이 책을 쓴 펜은 내 것이었지만, 이 책에 들어있는 아이디어는 모두 다우의 것이었죠.” 


란다우가 리프쉬츠의 손을 빌려 쓴 이론물리학 교재는 물리학 역사에 길이 남는다. 흔히 란다우 교재라고 알려진 이론물리학 교과서는 모두 열 권으로 되어 있다. 이 중에서 세 권은 란다우의 이름이 빠져있지만,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쓴 책이다. 고전역학에서부터 시작해서 전자기학, 양자역학, 상대성이론, 유체역학, 탄성역학, 통계역학, 기체운동론, 상대론적 양자역학을 포함하고 있으니, 이 책을 다 공부하는 것만 해도 무척 버거운 일이다. 란다우는 교재에 담을 내용에 지금 연구하고 있는 새로운 주제가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론물리학을 하려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만을 담았다고 하지만, 란다우 교재가 아우르는 분야는 그야말로 방대했다. 란다우는 연구할 때도 한 분야에 국한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어떤 분야든지 그저 물리학이었다. 그는 모든 분야를 망라해 연구한 마지막 이론물리학자인 셈이었다. 


란다우는 하르키우에서 또 한 번 문제를 일으켰다. 이번에도 그의 직설적인 성격이 문제였다. 그는 학생들을 엄격하게 가르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하르키우대학 총장은 란다우를 불러 그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식을 문제 삼았다. 


“란다우 선생, 학생들에게 ‘<예브게니 오네긴>을 누가 썼느냐?’고 물으셨다는데, 물리학을 전공한 학생들에게 그런 질문을 하면 안 됩니다.” 


란다우가 학생들에게 푸시킨이 쓴 서사시 <예브게니 오네긴>에 관해 이야기를 꺼낸 데는 이유가 있었다. 거기에는 양자역학을 연상시키는 듯한 표현이 나온다. ‘파동과 돌은 그리 다르지 않다.’ 이 시구는 희한하게도 양자역학의 핵심과 맞닿아 있었다. 란다우는 총장을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게 멍청한 이야기는 내 평생 처음 들어봅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총장은 란다우에게 당장 사과하던가, 사과하기 싫으면 당장 이 대학에서 떠나라고 말했다. 란다우는 총장에게 당신이 그렇게 할 권리가 없다고 받아쳤다. 사실, 총장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었다. 오직 교육부 장관만이 란다우를 대학에서 내쫓을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러나 총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란다우를 내칠 궁리를 했다. 란다우는 총장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5년 동안 머물렀던 하르키우지만 미련 없이 짐을 싸서 모스크바로 떠났다. 그의 제자들도 하나씩 둘씩 하르키우를 떠나 란다우가 있는 모스크바로 갔다. 란다우가 없는 하르키우는 더는 이론물리학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총장은 란다우를 내쫓는 데 성공했지만, 대학은 이론물리학의 신을 잃었다. 


그는 모스크바에 있는 물리문제연구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란다우 학파의 전설이 완성된다. 모스크바 물리문제연구소는 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러더퍼드와 함께 연구하던 표트르 카피차를 소련에 잡아두려고 1935년에 세운 연구소였다. 란다우가 하르키우를 떠나 모스크바 물리문제연구소로 옮기기 전, 아주 짤막한 편지를 카피차에게 보냈다.     


“물리문제 연구소 소장에게 
 당신 연구소에 일할 과학자로 날 받아주세요.

1937년 2월 8일 레프 란다우“    

 

란다우의 업적을 십계명처럼 새긴 돌 

란다우다운 편지였다. 추천서도 없고, 이력서도 없이 달랑 한 줄의 내용과 자신의 이름만 적힌 편지 한 통. 그러나 카피차는 케임브리지에 있는 동안 란다우를 만나 친분을 맺은 사이였고, 그가 얼마나 뛰어난 이론물리학자인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란다우가 물리문제 연구소의 이론 분야를 우뚝 세울 물리학자라고 여겼다. 그가 바란 대로 란다우는 모스크바에 오자마자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그에게는 응집물질물리학이나 핵물리학이나 입자물리학이나 모두 물리학이었다. 그곳에 있으면서 카피차가 관심을 두고 있던 저온물리학도 연구했다. 실제로 란다우는 극저온에서 일어나는 초유체 현상으로 1962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1950년대 말, 란다우의 친구들과 제자들은 그의 업적 중에서 중요한 연구를 골라 마치 십계명처럼 나무에 새겼는데 거기에 적혀있는 열 가지 연구 내용을 살펴보면, 양자역학, 고체물리학, 통계역학, 저온물리학, 핵물리학, 입자물리학 분야가 모두 있었다. 란다우는 이론물리학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거의 유일한 물리학자였다.        


대숙청그리고 감옥에 갇힌 란다우

1934년 12월 1일, 레닌그라드 볼셰비키당의 우두머리였던 세르게이 키로프(Сергей Киров)가 암살당했다. 스탈린과 가까운 사이였던 키로프의 암살은 앞으로 수년 동안 소련을 피로 물들일 대숙청의 흉조였다. 스탈린은 내무인민위원부 부장이었던 니콜라이 예조프와 라브란티 베리야에게 대숙청 작업을 맡겼다. 숙청은 레닌그라드 당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키로프 암살의 책임을 물으며 암살자 레오니드 니콜라예프와 좌익반대파 100명을 잡아서 총살했다. 공개재판은 계속되었고, 숙청의 범위도 점점 더 넓어졌다. 1936년 10월부터 1938년 11월까지 사형 선고를 받아 죽은 사람이 72만 명을 넘었고 수백만 명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서 거기서 죽거나 고초를 겪었다. 이 대숙청 기간 내내 사람들은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1938년 4월 27일, 란다우도 체포되었다. 이유는 란다우가 하르키우에 있는 동안 란다우의 친구가 소련에 반대하는 전단지를 만드는 데 란다우도 가담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독일 간첩 노릇을 했다는 혐의까지 받았다. 그의 친구는 내무위원회의 지독한 고문 탓에 어쩔 수 없이 란다우도 전단지를 만드는 데 가담했다고 불었다. 당시에 스탈린을 비난하는 전단지를 만들었다는 건, 즉결 처분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1937년, 란다우와 가깝게 지내던 하르키우연구소의 물리학자들도 내무위원회에 체포되었다. 그중에서 물리학자 마트베이 브론스타인(Матве́й П. Бронште́йн)은 1937년 8월에 체포되었다가 1938년 3월에 즉결 처형당했다. 그는 원래 10년 징역형을 받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총살당했다. 란다우의 또 다른 친구였던 레프 슈브니코프(Лев В. Шу́бников)도 체포되자마자 처형당했다. 이제 란다우 차례였다. 


연구소 소장이었던 카피차는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비이성과 공포가 판치는 시대에 란다우의 석방을 위해 애쓴다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카피차는 그를 감옥에서 꺼내려고 백방으로 힘을 썼다. 란다우가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은 닐스 보어에게도 전해졌다. 보어는 란다우의 구명을 위해 스탈린에게 여러 번 편지를 썼다. 보어는 소련 학술원 회원이기도 했다. 보어가 쓴 편지는 무척 조심스러운 어조였고, 진심으로 란다우를 걱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란다우는 과학을 연구하는 데 전념을 기울이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체포당할 일을 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분명히 오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다시 소련의 과학을 위하여 연구할 수 있도록 한 번 더 조사해 주시길 간곡하게 바랍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감옥에서 풀려나게 하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란다우가 갇힌 지 거의 일 년이 다 되어 갔다. 그 사이에, 감옥에 있던 란다우의 건강이 무척 나빠졌다. 카피차는 마지막 수단으로 당시 수상이었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를 찾아가 협박에 가까운 말을 했다. 지금 즉시 란다우를 풀어주지 않으면, 모든 연구를 그만두고 연구소 소장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그 당시 살기등등한 소련의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그런 말을 수상에게 한다는 건 어지간한 용기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카피차가 그렇게 나서지 않았다면 란다우는 감옥에서 죽었을 것이다. 카피차에게는 란다우를 잃는다는 건 소련의 물리학이 퇴보하는 것과 같았다. 카피차의 말이 먹혔는지 란다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는 정확히 일 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훗날 란다우는 그때 자신이 몇 개월만 더 감옥에 있었으면 아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란다우는 운이 좋았던 셈이었다. 이 대숙청 기간에 죽어 나간 물리학자가 백여 명이 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란다우는 더는 유럽을 방문할 수 없었다. 비록 그는 풀려났지만, 소련 정부에서는 그가 외국 여행을 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란다우의 구명 운동을 벌였던 카피차도 이 일로 한동안 곤경에 처했다.  

    

란다우 학파

닐스 보어가 마지막으로 소련을 방문했을 때 그는 물리학자들 앞에서 강연했다. 강연이 끝난 뒤, 어떤 사람이 보어에게 물었다.

소련을 방문한 닐스 보어(왼쪽) 


“보어 교수님, 어떻게 해서 그토록 뛰어나고 유명한 이론물리학 학파를 이룩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때 리프쉬츠가 보어의 강연을 통역하고 있었다. 그는 보어의 대답을 사람들 앞에서 러시아어로 통역을 했다. 


“그건 아마도 내가 내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바보야!”라는 말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아서일 겁니다.”


그러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했다. 그러나 보어가 한 말은 이랬다.


“그건 아마도 내 학생들에게 “내가 바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아서일 겁니다.”


리프쉬츠가 통역을 잘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카피차는 리프쉬츠가 잘못 통역한 게 사실은 의미심장하다고 말했다. 보어가 한 말과 리프쉬츠가 통역한 말은 보어 학파와 란다우 학파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말이었다.    

      

    

유세포비치(A. Yusefovich)의 만화. 란다우 가라사대......

하르키우에 시작한 란다우 학파는 모스크바에서 활짝 꽃을 피웠다. 란다우는 그의 학생들에게 신적인 존재였다. 그는 물리학의 신이었다.      


란다우의 벽

그의 제자가 되려면 그 어렵다는 <란다우의 벽>을 통과해야만 했다. 시험은 수학 시험이 두 개였고, 물리학 시험은 일곱 개로 되어 있었다. 란다우의 제자가 되고 싶은 학생은 이 아홉 개의 문제를 풀어야만 했다. 가장 먼저 봐야 할 시험은 수학 시험이었다. 먼저 기본적인 적분은 어떤 문제든지 풀 줄 알아야 했고, 주어진 미분방정식은 반드시 풀 수 있어야만 했다. 그다음은 물리학 시험이었다. 먼저 고전역학 시험을 봤고, 그다음에는 열물리학과 통계물리학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두 시험을 통과하고 나면, 전자기학과 일반 상대성이론, 비상대론적 양자역학, 상대론적 양자역학과 양자전기역학, 연속체에서 전기동역학, 유체역학과 탄성론 시험에 모두 합격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시험을 한 번에 통과할 필요는 없었다. 란다우의 벽을 다 통과하는 데는 대개 2년 정도 걸렸다.


란다우의 시험을 보는 방법은 간단했다. 먼저 란다우에게 전화를 걸어서 시험을 보겠다고 말하고, 란다우와 약속을 잡으면 됐다. 약속한 시각에 연구소 건물 옆에 있는 란다우의 집으로 가면 그는 학생을 자기 집 2층의 작은 방으로 데려간다. 학생은 책이나 노트를 모두 복도에 놔두고 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 방 안에는 원탁이 놓여있고 백지가 몇 장 놓여있다. 란다우는 학생에게 먼저 시험 문제를 하나 내주고 방을 나간다. 그러면 학생은 그 책상에 앉아서 란다우가 주고 간 문제를 한 시간 안에 풀어야만 한다. 15분 정도 지나면, 란다우가 다시 들어와서 어깨 너머로 그 학생이 문제를 어떻게 푸는지 슬쩍 본다. 그가 문제를 올바르게 풀고 있으면 란다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나간다. 그러나 학생이 문제를 제대로 풀고 있지 못하면, 란다우는 “흠”이라는 소리만 내고 다시 나간다. 


란다우의 제자 보리스 요페도 이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수학과 역학 시험에 합격한 그는 계속해서 통계물리학 시험을 봐야 했다. 요페가 문제를 푸느라고 정신없을 때, 란다우가 들어와서 그의 답안지를 보더니, “흠” 소리를 내고 나갔다. 그리고 15분 정도 지나 다시 들어오더니 또 한 번 불만에 찬 듯 “흠” 소리를 냈다. 그때 그의 집을 방문한 리프쉬츠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리프쉬츠는 요페가 그때까지 풀어놓은 걸 보더니, 란다우를 쳐다보며, “다우,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이 친구는 이 방에서 내보내요!”라고 말하자, 란다우는 그에게 20분만 더 주자고 했다. 요페는 그래도 그 시간 동안 문제를 잘 풀어냈다. 그러나 그가 불만에 찬 듯 내는 “흠” 소리를 들은 뒤 시험에서 떨어진 학생 수는 그 시험에 합격한 학생보다 훨씬 많았다. 란다우의 이 이론물리학 시험은 란다우 학파의 첫 번째 기둥이었다.      


란다우 세미나 

<란다우의 벽>을 넘은 학생에게는 란다우의 제자가 될 수 있는 특권을 줬다. 그건 란다우와 이론물리학을 토론할 수 있는 특권이기도 했다. 그리고 동시에 의무가 부가되었다. 그의 학생이 되면 매주 목요일 11시 정각에 시작하는 란다우 세미나에 참석해야 했다. 이 란다우 세미나는 란다우 학파의 두 번째 기둥이었다. 란다우 세미나는 외부에서 온 이론물리학자가 최신 연구를 발표하기도 했지만, 란다우의 동료나 제자가 자신이 연구한 걸 발표하기도 했다. 발표자가 세미나를 무사히 통과하면, 그건 자신의 연구를 출판해도 좋다는 란다우의 허가나 다름없었다. 때로는 란다우가 고른 최신 논문을 그의 제자 중 한 명이 공부해서 세미나 시간에 발표하기도 했다. 란다우가 고른 논문은 물리학 전 분야를 포함했다. 실험 논문일 경우에는 실험 방법까지 자세히 설명해야 했고, 이론 논문이면 논문에 나오는 모든 식을 증명해야 했다. 란다우는 전혀 논문을 읽지 않고 이 세미나를 통해 물리학의 중요한 주제들을 파악했다. 그는 물리학에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해 내는 능력이 남달랐다. 이 세미나는 란다우가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30년 동안 매주 목요일 11시에 계속되었다. 


세미나에서 토론이 시작되면 란다우는 한 번씩 무자비했다. 세미나에서 발표하는 내용이 틀렸거나 설익었다고 판단되면, 란다우는 독설도 서슴없이 내뱉었다. 그의 제자 중에는 세미나가 끝난 뒤 우는 일도 있었다. 세미나에서 발표하는 사람은 란다우와 동료들의 혹독한 질문과 공격을 이겨내야 했다. 이 무자비한 비판은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한 말을 떠올린다. 제대로 된 이론은 혹독한 비판 아래 놓일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란다우의 세미나를 통과한 이론들이 그랬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눈높이에 차지 않는 학자들은 병적이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이 “병적인 물리학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미나에서 쫓겨났다. 그의 제자 중에서도 란다우의 눈 밖에 나면, 세미나에 참석하는 게 금지되기도 했다. 


때로는 이런 란다우의 권위가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은 적도 있었다. 이오시프 샤피로(Иосиф Н. Шапиро)라는 물리학자가 있었다. 그는 포병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전쟁이 끝나고 다시 물리학을 시작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실험물리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란다우의 제자가 아니었다. 1956년 초, 샤피로는 그 당시 물리학자들을 괴롭히던 세타-타우 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는 거울 대칭성만 깨진다면, 세타-타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확신이 서질 않았다. 그래서 란다우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샤피로의 연락을 받은 란다우는 샤피로에게 바로 자신에게 오라고 대답했다. 란다우는 물리학과 관련한 토론을 며칠 뒤로 미루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란다우를 만난 샤피로는 자기 생각을 말했다. 그러나 란다우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이오시프, 원칙적으로는 거울 대칭성이 깨지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난 거울 대칭성이 깨져서 한쪽으로 치우쳐 버린 세상이 싫어요. 그런 세상은 생각하기 싫습니다.”


샤피로와 란다우 사이의 토론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자신감을 잃은 샤피로는 자기 아이디어를 담은 논문 초고를 논문집에 보내지 않았다. 만약에 논문을 투고했더라면, 1957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사람은 양전닝과 리정다오가 아니라 이오시프 샤피로였을지도 모른다.      


란다우와 강력

란다우는 물리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자신의 업적을 남겼다. 강력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1954년에 양자전기역학을 연구하면서 결정적인 결함을 발견하였다. 물론 이 결함은 실제 문제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지만, 이론적으로는 몹시 중요한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양자장론을 신뢰하지 않았다. 란다우는 파울리의 환갑을 기념하는 논문집에 “근본적인 문제들”이라는 논문을 보내면서 한 말을 들어보자.


“환갑을 기념하며 볼프강 파울리를 개인적으로 아는 행운을 누린 사람들이 앞으로 항상 소중히 간직하게 될 책에 이 글을 보내게 된 것에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중략). 이 글에 담긴 생각을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는 없지만, 저와 견해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여전히 용기를 얻습니다.” 


파울리는 양자전기역학의 원형을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사람이었다. 란다우는 그런 파울리의 환갑 기념 논문집에 양자전기역학의 숨통을 끊어놓을 논문을 보낸 셈이었다. 그러나 1959년에 그는 양자장 이론에서 나오는 파인먼 다이어그램에 관한 연구를 출판하였다. 파인먼 다이어그램은 파인먼이 양자전기역학을 연구하면서 전자들이 서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그림으로 나타낸 것인데, 이를 이용하면, 복잡한 계산을 하지 않고서도 쉽게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란다우는 파인먼 다이어그램의 특이점을 연구했다. 그리고 이 특이점은 입자들의 복잡한 충돌 과정에서 생겨날 수 있는 새로운 입자와 관련이 있었다. 란다우는 입자들의 민주주의의 뿌리가 되는 여러 이론에 깊이 관여하진 않았지만, 1959년에 한 연구로 강력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주춧돌을 하나 놓은 셈이었다. 


제프리 추의 <입자들의 민주주의> 이론이 소련의 물리학자 란다우가 한 연구에 기대고 있다는 건 역설적이다. 란다우 자신도 스탈린에 의해 억압받은 적이 있을 정도로 개인의 자유가 침해받는 곳에서 나온 이론이 미국에 가서 꽃을 피운 셈이었다. 추가 주창한 이론은 소련에서도 나란히 발전하였다. 란다우의 첫 제자이자 친구였던 이자크 포메란추크, 입자물리학의 란다우라고 불리던 블라디미르 그리보프(Влади́мир Н. Гри́бов)는 추와는 독립적으로 산란행렬에 바탕을 둔 이론을 전개해 갔다. 소련과 서구, 두 세계는 서로 분리되어 있었지만,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이론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발전해 갔다.    

 

물리학의 신 란다우약력에 뛰어들다

1956년부터 레프 란다우(Лев Д. Ланда́у)의 제자 보리스 요페는 루딕과 레프 오쿤과 함께 리정다오와 양전닝이 제안한 거울 대칭성 깨짐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거울 대칭성뿐만 아니라 또 다른 대칭성인 입자-반입자 대칭성도 동시에 깨져야지만 설명이 되는 붕괴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두 대칭성이 동시에 깨지는 걸 입자-반입자-거울 대칭성 깨짐(CP violation)이라고 부른다. 워낙 놀라운 결과라서 세 사람은 자신들의 계산이 맞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란다우와 토론하고 싶었다. 그러나 란다우는 그따위 대칭성이 깨진다는 말은 되지도 않는 소리니, 이야기도 꺼내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란다우 옆에 있던 절친인 이삭 포페란추크(Исаа́к Я́. Померанчу́к)가 란다우를 달랬다.


“다우, 그러지 말고 젊은 친구들 이야기를 한번 들어 봐요. 딱 15분만 들어보면 되잖아요.”


그 말에 란다우는 마지못해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요페는 란다우에게 왜 입자-반입자-거울 대칭성이 깨져야만 하는지 설명했다. 처음에는 심드렁했던 란다우도 요페의 이야기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더니 삼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아무런 말도 없이 방을 나가는 것이었다. 

다음 날 요페는 포메란추크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 


“다우가 거울 대칭성 깨짐에 대한 계산을 끝냈다네.” 


요페도 서둘러 논문을 썼다. 그렇게 요페와 루딕, 오쿤이 쓴 논문과 란다우가 혼자서 쓴 논문이 소련 물리학 학술지인 <실험 및 이론물리학 저널>에 나란히 출판되었다. 우젠슝의 논문이 나오기 전에 논문집에 보낸 것이니 어떤 점에서는 미국에 있는 물리학자들과는 상관없이 연구한 셈이었다. 게다가 요페와 그의 동료들이 한 연구는 입자-반입자 대칭성의 깨짐까지 포함한다는 점에서 한발 더 나아간 연구였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란다우가 소련 정부 기관지인 <프라우다>와 인터뷰하면서 리정다오와 양전닝이 한 연구는 쏙 빼고 약력에서 반전성 문제를 자기가 맨 처음으로 풀었다는 말만 했다. 비윤리적인 처사였다. 

란다우의 인터뷰를 읽은 실험 및 소련 물리학자들은 분노했다. 카렌 테르-마르티로시안(Karen Ter-Martirosian)과 란다우의 제자인 블라디미르 베레스테츠키(Berestestkii)는 그길로 란다우에게 가서 그런 인터뷰는 잘못된 것이라고 따졌다. 그러자 란다우는 두 사람은 자기 세미나에 들어오지 말라고 화를 냈다. 요페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차마 스승에게는 대들지 못하고 동료들에게 불평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란다우 귀에 들어갔고, 화가 난 그는 논문 맨 뒤에 있는 감사의 글에서 루딕과 오쿤의 이름만 놔두고 요페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결국 란다우의 오랜 친구 포메란추크가 다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다우, 생각해 봐요. 당신에게 거울 대칭성 깨짐, 입자-반입자 대칭성, 시간 역전 대칭성을 설명한 사람이 보리스잖아요. 보리스가 없었다면, 당신이 어떻게 그런 연구를 할 수 있었겠어요? 그런데 이제 그의 이름을 당신 논문에서 아예 지워버리다니요.” 


란다우도 포메란추크의 말을 무시할 순 없었다. 결국, 란다우는 요페의 이름을 다시 감사의 글에 넣긴 했지만, 이번에는 루딕 다음에 요페의 이름을 넣었다. 참으로 치졸한 짓이었다. 과학에서 최초의 연구는 마땅히 인정받아야 하지만, 물리학에서도 종종 불의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곤 한다.      


치명적인 사고

1962년 1월 7일 오전 11시 30분, 란다우는 동료들과 차를 타고 모스크바에서 북쪽으로 130여 km 떨어진 두브나로 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유럽의 CERN처럼 큰 가속기가 있었고, 동구권에 있는 과학자들이 모여 핵물리학과 입자물리학 연구를 하는 곳이었다. 두브나로 가는 길은 꽁꽁 얼어 있었다. 소녀 한 명이 건너편에 서 있는 버스를 타려고 급하게 도로를 건너가고 있었다. 운전자는 길을 건너는 소녀를 보고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러자 차가 미끄러지며 돌기 시작했고, 그만 중앙선을 넘고 말았다. 반대편에서는 트럭이 오고 있었다. 차는 트럭과 충돌하면서 옆으로 튕겨 나갔다. 그 순간 뒷좌석에 타고 있던 란다우는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 같이 탔던 사람들은 크게 다치지 않았으니, 란다우에게는 정말이지 불행한 사고였다. 


구급차는 이미 의식을 잃은 란다우를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옮겼다. 당직 의사가 란다우의 상태를 확인하였다. 그는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62년 1월 7일은 일요일이었다. 응급실에는 란다우를 봐줄 의사가 없었다. 불행 중 다행히 병원장이었던 발렌틴 폴야코프 교수가 환자를 보러 잠시 병원에 나와 있었다. 란다우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동료들과 제자들에게 전해졌다. 카피차가 맨 먼저 병원에 도착했고, 뒤이어 리프쉬츠가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은 물리학자들로 가득 찼다. 모스크바에 있는 신경외과의 권위자도 병원으로 급하게 나왔다. 그리고 이어서 소련 의학원 소속 의사들도 잇달아 병원으로 모였다. 란다우가 입은 머리 부상은 심각했다. 의사들은 그를 살려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마련했다. 그곳에 모인 87명의 물리학자도 마찬가지였다. 란다우를 살릴 수만 있다면, 그들은 무슨 일이든 발 벗고 나섰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란다우의 병상을 지켰다. 


란다우는 극적으로 살아났다. 의사들은 그가 살아난 건, 33%는 의사들 때문이고 33%는 물리학자들 덕이고, 33%는 란다우의 몸이 잘 버텨주어서이고, 나머지 1%는 하느님 덕이라며 농담했다. 란다우는 깨어났지만, 그의 몸은 예전 같지 않았다. 그해 가을, 란다우가 노벨물리학상을 받게 되었지만, 그 상을 받으러 스웨덴에 갈 수도 없었다. 결국, 모스크바 주재 스웨덴 대사가 병원에 있는 란다우에게 상을 전했다. 란다우는 이제 물리학을 할 수 없었다. 사고 전과 사고 후의 란다우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란다우는 6년을 더 버티다가 1968년 3월 24일에 영원히 잠들었다. 


피에르 호헨버그(Pierre Hohenberg)은 2009년 3월 18일, 미국물리학회 학술회의에서 란다우를 기리며 이런 말을 남겼다. 


“그의 위대한 논문과 그가 쓴 이론물리학 교과서들과 그간 남긴 유산으로 혜택을 입은 우리는 모두 란다우 학파의 일원이다.” 


란다우가 이론물리학에 끼친 영향을 다 말하자면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하다. 오늘날까지도 이론물리학자 중에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작가의 이전글 원자폭탄 스파이, 클라우스 푹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