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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Ch Kim 김현철 May 07. 2024

원자폭탄 스파이, 클라우스 푹스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려 히로시마를 완전히 파괴했다는 소식에 스탈린은 이를 갈 정도로 분개했다. 어찌나 화가 났던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발까지 굴렀다. 누구도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스탈린을 본 적이 없었다. 10일 전, 포츠담에서 만난 트루먼이 아주 무서운 무기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만 해도, 그게 원자폭탄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한 도시를 완전히 파괴할 만큼 위력적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가 분노한 건, 원자폭탄에 희생된 히로시마 시민들이 안타까워서가 아니었다. 미국이 그토록 무서운 폭탄을 가지고 있으면 미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은 독일을 포함해서 동유럽 전체를 자신의 발아래 두길 원했다. 그러나 만약에 미국이 원자폭탄으로 자신을 겁박한다면,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만 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스탈린은 원자폭탄 개발을 책임지고 있던 이고리 쿠르차토프(Игорь В. Курчатов)를 불러들였다. 쿠르차토프는 이미 1942년 9월부터 원자폭탄 개발을 맡고 있었다. 실제로는 원자폭탄 자체보다는 그 당시에 발견된 핵분열을 연구하는 그룹을 책임지고 있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스탈린은 쿠르차토프를 비난하며 호통을 쳤다. 

소련 원자폭탄의 아버지 이고르 쿠르차토프

“쿠르차토프 동무, 우리 과학자들이 원자폭탄 개발을 열심히 하지 않거나 아니면 그걸 개발할 능력이 전혀 없는 것, 아니야?”

쿠르차토프는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그는 여기서 발을 헛디디면 천길만길 낭떠러지였다. 스탈린의 심기를 거스른다는 것은 죽음을 뜻했다.

“스탈린 동무, 소련은 전쟁 때문에 이미 나라가 파괴될 대로 파괴되었습니다. 게다가 사람들도 정말 많이 죽었습니다. 원자폭탄을 만들 공간과 연구소도 없고요. 아니, 먹을 것조차 없는데, 무슨 돈으로 원자폭탄을 만들겠습니까?”

사실이 그랬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소련 인구의 십분의 일, 2천만 명이 넘게 죽었다. 다쳐서 제대로 움직일 수 사람의 수는 훨씬 많았다. 게다가 스탈린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고 전쟁 전부터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전신인 내무인민위원부(NKVD) 부장 니콜라이 예조프와 부부장 라브렌티 베리아(Лаврентий П. Берия)를 사주해 천만 명이나 되는 자국민들을 집단수용소로 보내거나 살해했다. 소련은 원자폭탄을 만들 인력도 재력도 바닥 난 상태였다. 

스탈린은 짜증난 목소리로 쿠르차토프에게 말했다.

“좋아, 아기가 울지 않으면 뭐가 필요한지 엄마가 어떻게 알 수 있겠어.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이야기만 하게. 그게 무엇이든 앞으로는 거절이나 반려 따위는 없을 걸세.”

스탈린은 베리야를 원자폭탄 개발의 책임자로 임명했고, 실제로 개발하는 일은 쿠르차토프에게 맡겼다. 


소련의 원자폭탄 연구

1932년에 채드윅이 중성자를 발견했을 때 스물아홉 살이었던 쿠르차토프는 러시아의 핵물리학 분야를 책임지게 되었다. 그는 크리미아대학에서 아브람 요페(Абра́м Ф. Ио́ффе)의 지도를 받아 이론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러시아에서 실험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전쟁과 내전으로 하루하루 끼니를 이어가기도 버거운데, 대학에 제대로 된 실험실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그는 이론과 실험에 모두 뛰어났고 관심사도 워낙 넓었다. 그래서 표트르 카피차(Пётр Л. Капица)나 레프 란다우가 영국이나 유럽에 가서 공부하는 동안, 쿠르차토프는 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에서 연구했다. 이곳은 줄여서 피즈텍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939년, 쿠르차토프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소련에서는 최초로 양성자 사이클로트론을 만들었다. 

1938년,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이 발견한 핵분열의 소식은 소련에도 전해졌다. 그리고 이듬해 초, 한스 폰 할반(Hans von Halban)과 프레데릭 졸리오퀴리, 루 코와르스키(Lew Kowarski)가 핵분열에서 나오는 이차 중성자가 핵분열을 연쇄적으로 일으킨다고 <네이처>에 보고했다. 핵분열과 연쇄반응이 함께 일어나면,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었다. 졸리오퀴리는 요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당시는 스탈린과 그의 오른팔 격인 내무인민위원부 부장이었던 예조프가 대숙청을 감행하고 있을 때였다. 반혁명 분자와 소련 공산당에 반대하는 자들을 숙청한다는 명분 아래 수백만 명이 죽거나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중에는 물리학자들도 많았다. 이 대숙청 기간에 죽어간 소련의 물리학자들은 백여 명에 이르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소련 물리학자들은 유럽에 있는 동료들과 의견을 주고받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유럽에서 나오는 논문을 읽으며 실험 사실을 직접 확인하는 게 전부였다. 쿠르차토프는 자기 팀에 속한 연구원 게오르기 플료로프(Гео́ргий Н. Флёров)와 레브 루시노프(Лев Русинов)에게 핵분열과 연쇄반응을 확인해 보라고 지시했다. 두 사람은 1939년 4월에 졸리오퀴리의 발견을 확인했다. 두 사람은 우라늄이 핵분열을 할 때마다 중성자가 서너 개 튀어나온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플료로프는 1940년에 우라늄이 저절로 핵분열한다는 것도 발견하였다.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결과들이었다.      

 피즈텍에서 조금 떨어진 물리화학연구소에는 유리 하리톤(Юлий Б. Харитон)과 야코프 젤도비치(Я́ков Б. Зельдо́вич)가 있었다. 하리톤은 러더퍼드의 제자였고, 젤도비치는 천재였다. 젤도비치는 레닌그라드대학에서 지도교수 없이 혼자서 박사학위를 마쳤다. 워낙 관심사가 넓어 핵물리학뿐만 아니라 훗날 천체물리학과 우주론 분야에서도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하리톤과 젤도비치는 핵분열의 연쇄반응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계산하였는데, 그 결과가 어마어마했다. 1939년 여름, 두 사람은 피즈텍에서 세미나를 하면서 이 정도 에너지면 모스크바를 지도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정도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핵분열을 계속 연구했는데, 우라늄 238에서 분리한 우라늄 235이 핵분열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나 우라늄 235는 우라늄 원석에 아주 미량만 들어 있어서 이걸 농축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때만 해도 소련의 물리학자들은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 엄청난 시간이 들 것이라고 여겼다. 


플료로프의 편지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직전인 1939년 8월 말에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소련의 외무장관 비야체슬라프 몰로토프(Вячесла́в М. Мо́лотов)와 나치 독일의 외무부 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롭(Joachim von Ribbentrop) 사이에 맺어진 조약이라 몰로토프-리벤트롭 조약이라고 알려져 있다. 나치 독일도 소련도 이 불가침조약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스탈린은 서유럽을 점령한 히틀러가 머지않아 소련을 침공하리라는 걸 알았다. 문제는 침공 시기였다. 1941년 5월쯤이면 나치 독일이 소련을 공격할 것이라는 그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1941년 6월 22일 새벽, 나치 독일군은 폴란드와 프랑스를 습격했듯이 소련에 대해 전격전을 감행했다. 독일군의 전차와 급강하 폭격기들은 소련군을 단숨에 밀어붙였다. 무기도 변변치 않은 소련군은 강력한 나치 독일군의 상대가 되질 못 했다. 이미 소련 상공은 독일 공군에게 제공권을 넘겨주었고, 독일 육군은 파죽지세로 소련의 도시를 하나씩 점령해 갔다. 

게으르그 플료로프

소련의 물리학자들도 전쟁에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는 데 전념해야만 했다. 그러나 몇몇 물리학자들은 군에 입대해서 전쟁에 참전했다. 자발적 핵분열을 발견했던 플료로프는 전쟁이 나자, 소련 공군에 입대하였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미국 <피지컬 리뷰>에 핵물리학과 관련된 논문이 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것은 미국과 영국에 있는 핵물리학자들이 원자폭탄 개발에 나섰다는 걸 암시하였다. 독일도 마찬가지일지 모를 일이었다. 그가 보기에 만약에 독일 핵물리학자들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면, 이 전쟁에서 소련이 패배하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뭐라도 해야만 했다. 플료로프는 소련도 원자폭탄 개발에 나서야 한다고 이미 여러 번 소련 정부에 편지를 보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1942년 4월, 그는 다시 한번 스탈린에게 편지를 썼다. 마치 아인슈타인이 실라르드의 조언을 따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듯이 말이다. 플료로프의 어조는 강렬했다. 스탈린을 책망하는 편지를 쓴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다. 편지에서 그는 소련이 원자폭탄 개발에 지금 당장 나서지 않는다면, 그건 엄청난 실수라는 말까지 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물리학자들을 모아 어떻게 하면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는지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요페, 카피차, 란다우, 쿠르차토프, 하리톤, 젤도비치 같은 물리학자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이번 편지는 스탈린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스탈린은 요페, 클로핀, 카피차 같은 저명한 물리학자이자 학술원 회원들을 불러들여 그들의 의견을 물었다. 스탈린은 플료로프가 경고하는 위험이 타당한지 궁금했다. 거기에 모인 물리학자들은 플료로프의 주장대로 만약에 독일이나 미국이 원자폭탄을 개발한다면, 소련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한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는 엄청난 경비가 필요했다. 경비를 줄이려면 우선 원자폭탄에 관한 정보부터 구해야 했다. 2개월 뒤인 1942년 6월 14일, 모스크바 내무인민위원부에서 베를린, 런던, 뉴욕에 있는 분소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원자폭탄 개발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소련은 여전히 독일과 전쟁 중이었고, 전황은 소련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해 8월에는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를 공격하면서 전세는 더욱더 위태로워졌다. 스탈린에게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승리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자기 이름이 붙어있는 도시가 적의 손에 넘어가서는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게다가 스탈린그라드가 나치의 손에 넘어가면 바쿠를 비롯한 코카서스 지역의 석유 유전과 수도 모스크바가 나치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스탈린그라드는 반드시 사수하여야만 하는 도시였다. 스탈린그라드는 이미 성한 건물이라고는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살고 있던 시민들은 스탈린의 명령 탓에 도시를 벗어날 수도 없었고, 소련군 역시 사력을 다해 도시를 사수하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에 있는 시민들과 소련군들이 막강한 독일군을 막아내는 동안, 볼가강 건너편에서는 소련군의 주력 부대가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42년 11월이 되자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는 독일군에게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다. 그 이듬해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포위당한 독일군이 항복하면서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막을 내렸다. 이 전투로 200만 명이 넘는 소련 군인들과 민간인이 희생당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은 더디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쿠르차토프는 독일 나치와 맞서 싸우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전까지는 수염을 절대로 깎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아무리 굳게 결심해도 원자폭탄을 개발하려면 돈이 있어야 했고, 도와줄 사람도 필요했다. 지금 당장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는 게 우선이었으니,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제때 공급받는 건 거의 불가능하였다. 게다가 우라늄 235를 농축할 방법도, 원자로를 만들 기술도 제대로 서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모든 일에는 엄청난 돈이 필요했다. 미국이 맨해튼 프로젝트에 쏟아부은 돈을 오늘날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27조 원 정도였으니, 독일의 공세를 하루하루 힘들게 버텨내고 있는 소련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이후, 스탈린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베리야도 그렇고 쿠르차토프도 그렇고 원자폭탄 개발에 실패하면, 죽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방도를 찾아야 했다. 가능한 한 빨리 원자폭탄 개발을 먼저 시작한 미국과 영국에 침투해서 원자폭탄과 관련 있는 극비 정보를 소련으로 빼내야 했다. 극비 정보를 소련에 넘긴 간첩은 많았지만, 원자폭탄 제작에 필요한 결정적인 정보를 소련에 넘긴 사람은 이론물리학자 클라우스 푹스(Klaus Fuchs)였다. 


붉은 여우, 클라우스 푹스

클라우스 푹스의 가족은 정치적으로도 하나였다. 사람들은 그들을 일컬어 붉은 여우 가족이라고 불렀다. 푹스(Fuchs)는 독일어로 여우를 뜻했다. 아버지 에밀은 루터교 목사였고, 튀링겐의 유서 깊은 도시 아이제나흐(Eisenach)에 있는 루터교 교회를 담임했다. 아이제나흐는 작곡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고향이었고, 종교 개혁을 이끌던 루터가 위험에 처했을 때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성으로 피난해서 신약성서를 번역한 곳으로도 유명했다. 푹스는 바흐가 다녔던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30년에 라이프치히대학에 가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했다. 푹스가 라이프치히대학을 선택한 건 이곳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교수로 있어서였지만, 정작 하이젠베르크에게서 양자역학을 배울 기회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를 휩쓸던 대공황이 라이프치히를 덮쳤고, 푹스도 이곳에서 계속 공부하는 게 여의찮았다. 푹스는 대공황이 덮치면서 노동자들이 가장 고통받는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독일 북부에 있는 도시 킬(Kiel)에 있는 교육대학에 종교학 교수가 되면서 클라우스도 킬대학으로 옮겼다. 

클라우스 푹스

킬은 독일 북부 슐레스비히-홀스타인 주의 수도였다. 북해에 맞닿아 있던 그곳은 독일 해군기지가 있었다.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뒤, 해군 35,000여 명이 슐레스비히-홀스타인 지역을 떠났다. 주의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해군과 관련 있는 조선사와 수리 공장들은 문을 닫아야 했고, 호텔도 식당도 술집도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1920년대 말에 덮친 대공황은 슐레스비히-홀스타인의 경제 기반을 완전히 망가뜨렸다. 히틀러와 나치라고 불리는 국가사회당은 독일 북부에서 공포와 불만을 먹으며 세력을 확장했다. 킬의 일간지 <킬러 차이퉁(Kieler Zeitung)>은 공공연히 나치를 지지했다. 1932년 6월에는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당의 불법 무장단체인 나치 폭풍 부대(SA: Sturmabteilung)에 대한 금지령이 해제되었다. 갈색 셔츠를 입고 유대인에 대해 폭력을 일삼던 조직이 합법화되면서 유대인들의 입지는 암울해졌다. 그해 7월 31일에는 국회의원 선거(Reichstag election)가 있었다. 킬은 국가사회당이 51퍼센트의 지지를 얻은 유일한 도시였다. 1932년은 푹스에게 최악의 해였다. 나치의 위협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궁핍에 우울증까지 겹친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킬대학을 다니던 클라우스 푹스는 1932년 가을부터 공산당 세포조직을 이끌었다. 푹스는 나치에 대항하는 일을 책임졌다. 나치 당원들이 휘젓고 다니던 킬에서 나치에 극렬하게 반대하는 유인물을 만들고 국가사회당에 속한 학생들을 설득하려 애썼다. 부분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대세는 이미 히틀러와 나치로 기울어져 있었다. 1933년 1월 30일, 바이마르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가 아돌프 히틀러를 독일 수상으로 지목하면서 바이마르공화국은 히틀러가 지배하는 독일 제3제국이 되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SA는 공산당원을 색출해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다. 푹스는 굴하지 않았다. 매일 공산당 신문인 <디 로테 파네(Die Rote Fahne)>를 들고 대학에 갔다. SA도 푹스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치 당원들에게 대들던 푹스를 향해 SA 대원들이 느닷없이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대학에서부터 강까지 푹스를 끌고 가서 강에 던져버렸다. 목숨은 잃지 않았지만, 이를 몇 개 잃었고,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다리도 절룩거릴 만큼 심하게 다쳤다. 

1933년 3월 5일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을 예정이었다. 1933년 2월 27일, 푹스는 베를린에서 열릴 공산당 학생 집회에 참여하러 가던 날, 베를린의 의사당에 화재가 발생했다. 나치는 네덜란드 출신의 공산주의자 마리누스 반 데르 루브를 방화범으로 지목한 뒤, 체포했다. SA를 이끌던 헤르만 괴링은 베를린에 있는 모든 공산주의자를 체포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4,000여 명이 체포되었다. 베를린에 도착한 푹스는 신변의 위험을 느껴 옷깃에 달린 칼과 망치가 새겨진 공산당 배지를 떼서 주머니에 넣었다. 공산당 대회는 비밀리에 열렸다. 의사당의 화재로 공산당의 활동은 전면 금지되었고, 베를린 지부도 습격당했다. 킬에 있던 푹스의 집도 경찰의 급습을 받았다. 

푹스는 오 개월 동안 공산당의 도움을 받으며 베를린에서 숨어지냈다. 공산당은 푹스에게 파리에서 열릴 전쟁과 파시즘에 반대하는 세계청년회의에 참가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정작 파리로 떠났지만, 수중에는 돈 한 푼 없었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다행히 어느 퀘이커 교도의 도움으로 교회 사무실에서 지낼 수 있었다. 공산당은 푹스에게 나치 이후에 독일을 이끌 사람들이 필요하니 외국에 나가서 공부를 계속하라는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그는 영국으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1933년 9월 24일, 푹스는 영국 남동쪽에 있는 항구 포크스톤에 도착했다. 항구는 푹스처럼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온 독일인으로 붐볐다. 푹스는 브리스틀대학의 물리학자 네빌 모트(Nevill Mott)의 조수로 있으면서 그곳에서 박사학위를 할 기회를 얻었다. 1977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게 될 모트는 독일 괴팅겐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던 터라 독일어에 능했고, 공산당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었다. 1930년대 영국 지식인들은 스탈린이 지배하던 소련에 대해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1927년에 권력을 쥔 스탈린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고, 대숙청 전이라 많은 영국 지식인은 소련이 자본주의를 대신할 이상적인 정치 체제라고 여겼다. 모트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1년 동안 힘든 일을 많이 겪은 탓이었을까, 푹스는 점점 더 말이 없어졌고, 성격도 차갑게 바뀌었다. 공산당원임을 떳떳하게 밝히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도 깨달았다. 나중에 고백했듯이 이때부터 푹스는 스스로 “통제된 분열증” 상태를 유지했다. 누구에게든 속내를 절대로 드러내지 않았고, 골수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을 감췄다. 팔다리가 가늘고 좁은 가슴과 창백한 얼굴에 뿔테 안경까지 쓴 그의 모습만으로는 아무도 그가 한때 열성적인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브리스틀대학에 머무는 동안에 주변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적도 없었다. 푹스는 모트의 지도를 받으며 박사학위를 마쳤다. 

1939년은 1932년에 이어 푹스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주는 사건이 있었다. 푹스의 누나 엘리자베스가 열차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그녀도 공산주의자였지만, 그녀의 남편 구쉬 키토브스키(Guschi Kittowski)도 공산주의자였다. 구쉬는 베를린에서 공산당원들을 외국으로 도피시키는 책임을 지고 있었는데, 경찰에 들켜 7년 형을 선고받아 엘베강에 있는 배에서 노역해야만 했다. 구쉬는 엘리자베스와 비밀리에 계획을 짜 탈옥한 뒤, 함께 체코슬로바키아로 도망가려고 했으나 그만 서로 길이 어긋나고 말았다. 엘리자베스는 남편이 비밀경찰에 붙잡혀 고문당하는 상상을 하다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아버지와 함께 베를린으로 가는 기차를 함께 탔는데, 아버지가 잠시 손을 놓은 사이 기차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푹스는 적국 시민이라는 이유로 영국 북쪽에 있는 맨섬에 있는 수용소에 갇혔다. 영국 정부는 독일인을 자국에 두는 게 여전히 불안했다. 결국, 푹스는 나치 독일군과 이탈리아군 포로들과 함께 캐나다의 퀘벡으로 보내졌다. 다행히 몇 개월 후 막스 보른이 푹스의 석방을 위해 애쓴 덕에 풀려났지만, 그토록 혐오하던 나치와 함께 수용소에서 지냈던 경험은 푹스의 마음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1941년 초, 푹스는 자신의 인생 경로를 송두리째 바꿔놓을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버밍엄대학에 있는 루돌프 파이얼스는 전쟁에 필요한 연구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푹스가 그 일을 도와줄 안성맞춤인 이론물리학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파이얼스는 푹스를 고용하기 위해 영국 군사정보총국 제5과(MI5: Military Intyelligence Section 5)에 문의했다. MI5에서는 푹스가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파이얼스와 함께 일하는 걸 허락했다. 공산주의자가 나치와 협력할 리는 없으리라고 여겼던 것이었다. 푹스는 민감한 비밀 문서를 접할 수 없었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가 맡은 일 자체가 앞으로 비밀로 취급될 예정이었다. 그건 원자폭탄에 필요한 우라늄 235의 임계질량을 정하는 것이었다. 임계질량을 넘어서야 우라늄 235는 핵분열을 하며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푹스는 기체확산법을 이용해서 우라늄 235을 우라늄 238로부터 분리해내는 데 필요한 이론도 개발하였다. 파이얼스와 함께 푹스는 영국 원자폭탄 개발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셈이었다. 그가 쓴 모든 보고서는 비밀로 취급되었다. 푹스는 비밀에 접근할 권리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원자폭탄 관련 비밀을 만들어 내는 주요 인물이 되었다. 

1941년부터 1949년 소련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할 때까지 푹스가 소련에 넘긴 원자폭탄 개발 자료는 소련의 계획을 몇 년이나 앞당겨 주었다. 1943년 12월에는 영국을 대표해서 미국 맨해튼 프로젝트를 도우려 뉴욕을 방문하였고, 거기서부터 그의 이중생활은 본격화되었다. 그에게는 레스트(Rest)라는 코드명이 주어졌고, 레이먼드라고 불리는 연락책 해리 골드(Harry Gold)를 통해 자신이 입수한 비밀 서류를 소련으로 빼돌렸다. 1944년 8월부터는 파이얼스와 함께 로스앨러모스에 가서 본격적으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다. 푹스는 거기서 플루토늄 239를 이용한 원자폭탄 개발도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그는 원자폭탄 제작에 필요한 모든 이론과 기술을 소련으로 넘겼다. 푹스는 이렇게 위험한 폭탄은 미국만이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었다. 자신의 마음속 조국 소련도 원자폭탄을 지녀야 미국과 대등해지라고 여겼다. 

1949년 8월 29일, 소련 물리학자들은 드디어 카자흐스탄에서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였다. 원자폭탄의 이름은 RDS-1이었지만, 미국에서는 스탈린의 이름을 따 조-1(Joe-1)이라고 불렀다. 이 폭탄의 생김새는 나가사키에 떨어진 플루토늄 원자폭탄 팻맨과 판박이였다. 팻맨과 마찬가지로 내파 방식을 이용한 폭탄이었다. 푹스가 전한 팻맨을 만드는 기술이 RDS-1에 그대로 적용되었던 것이었다. 

푹스의 정체가 드러난 건, 미국에서 1943년 2월부터 가동한 베노나 프로젝트(Venona project) 때문이었다. 베노나 프로젝트에 속한 암호 분석 요원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이들의 정체는 1980년대까지 극비에 부쳐졌다. 베노나 프로젝트에서는 암호화된 소련의 무선통신을 전방위적으로 감청해 해독했다. 그리고 코드명 레스트라는 간첩이 원자폭탄 비밀문서를 소련에 넘겼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문제는 레스트가 누구인가였다. 푹스를 비롯해 파이얼스와 여러 물리학자가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당시 푹스는 영국 하웰에 있는 원자력 연구소에서 원자폭탄 개발에 최선을 다하고 있을 때였다. 푹스의 속은 소련을 위한 간첩이었지만, 겉은 영국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과학자의 모습이었다. 스스로 고백했듯이 그는 “통제된 정신분열증 환자”였다. 베노나 프로젝트에서 찾아낸 레스트가 바로 클라우스 푹스였다는 사실은 1949년 말이 되어서야 서서히 드러났다.

1950년 2월 2일, 오전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겨울비는 마치 푹스의 앞날을 보여주듯 을씨년스러웠다. 그날 오후 그는 경찰에 체포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책이었던 해리 골드도 미국에서 체포되었다. 클라우스 푹스는 9년 4개월 동안 복역한 뒤, 1959년 6월 23일에 석방되었다. 그는 석방되던 날, 바로 동독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동베를린 쇠네펠트 공항에는 그를 환영하는 인파로 붐볐다. 거기에는 대학 때 함께 공산당원으로 활동했던 그레테 카일존(Grete Keilson)도 있었다. 두 사람은 그해 9월 9일에 결혼했다. 푹스는 로젠도르프 핵물리연구소에서 1979년에 은퇴할 때까지 부소장으로 지냈다. 그는 뛰어난 이론물리학자이기도 했지만, 뼛속까지 공산주의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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