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물리학은 어떻게 꽃을 피웠는가?
한 사학자는 신이 한 나라를 멸망시킬 때 우선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한다고 말했다. 19세기 말의 러시아가 딱 그런 몰골이었다. 니콜라이 2세는 스물여섯 살의 나이에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의 뒤를 이어 러시아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스러져가는 러시아제국을 변혁시킬 통찰력도 없었고, 나라를 이끌 재간도 없었다. 그의 일기장만 뒤적여 봐도 알 수 있었다. 거기에는 고작해야 가족들과 지낸 즐거운 시간,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한 이야기들, 강아지가 죽고 나서 자신이 느꼈던 엄청난 슬픔만 적혀있었을 뿐, 러시아에 관한 고민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니콜라이 2세는 그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변화를 간절히 원했지만, 황제에게는 오직 자신의 권리만이 중요했다. 그러니 19세기 말 러시아의 과학을 발전시킬 정책 따위가 존재할 리 없었다. 비록 1725년에 표트르 대제가 학술원을 세웠지만, 학술원 회원들 대부분은 인문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늙었고, 전통적인 연구만 하고 있을 뿐 과학에는 관심이 없었다. 더 큰 문제는 학술원 회원이 되는 데 학문적인 성취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 더 권력을 쥔 자들과 가깝게 지내는지, 그리고 누가 더 정치적으로 정부와 더 잘 맞는지 중요할 뿐이었다.
학술원 회원이 되고도 남았어야 할 사람 중에는 드미트리 멘델레예프(Дмитрий И. Менделеев)가 있었다.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화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멘델레예프도 학술원 회원이 될 수 없었다. 1880년에 학술원 회원이었던 수학자 파프누티 체비쇼프(Пафну́тий Л. Чебышёв)와 화학자 알렉산드르 부틀레로프(Алекса́ндр М. Бу́тлеров)가 몇몇 학술원 회원들과 더불어 멘델레예프를 학술원 회원으로 추천했지만, 멘델레예프는 끝내 학술원 회원이 될 수 없었다. 그 당시 유럽에서 잘 알려져 있던 물리학자이자 전기공학의 창시자로도 알려진 알렉산드르 스톨레토프(Алекса́ндр Г. Столе́тов)도 러시아 학술원의 회원이 되지 못 했다. 그 자리를 꿰찬 자는 박사학위 논문을 형편없이 써서 스톨레토프에게 퇴짜를 맞았던 사람이었다.
19세기말 러시아의 대학 교육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자유를 누리던 때가 있었지만,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를 거치면서 대학도 교육과 연구에서 자율을 잃어버렸다. 정부로부터 제대로 된 투자를 받지 못해 제대로 된 물리학 실험실을 찾아보기란 힘들었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내용도 새로울 게 없었다. 게다가 러시아는 유럽에서도 반유대주의로 악명 높은 나라였다. 러시아에서 유대인이 과학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죽하면 러시아어에는 유대인을 학살하고 압제한다는 뜻을 지닌 포그롬(pogrom)이라는 단어가 있을 정도였다. 러시아에서 살던 유대인들은 걸핏하면 반유대주의에 희생을 당하면서 살아야만 했다. 유대인으로 학자가 된다는 건 정말이지 험난한 길이었다.
아브람 요페
아브람 요페(Абра́м Фёдорович Ио́ффе)는 유대인이었다. 그는 지금의 우크라이나에 있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는데, 그곳에는 변변한 학교가 없었다. 그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종교적인 과목이나 아주 기본적인 과학 지식만 가르쳤다. 요페가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물리학에 관심을 두게 되었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무도 그에게 과학과 수학을 제대로 가르친 적이 없었다. 그는 물리학을 공부하고 싶어서 상트페테르부르크 기술대학에 입학했지만, 정작 거기서도 새롭게 배울 만한 지식이 없었다. 그곳에도 물리학 실험실이 있었지만, 제대로 된 실험 장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요페를 가르치던 교수도 물리학을 더 공부하고 싶다면 유럽으로 가서 공부하라고 말해주었다. 그는 우연히 빌헬름 뢴트겐이 엑스선을 발견하고 첫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뢴트겐에게서 물리학을 배우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독일에서 유학하려면, 우선 돈을 모아야 했다.
1902년, 요페는 독일 뮌헨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는 바이에른주 정부의 요청을 따라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뮌헨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빌헬름 뢴트겐이 교수로 있었다. 그는 수중에 있는 돈을 아껴 쓰며 일 년 정도는 버틸 요량이었다. 돈이 다 떨어지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지 뢴트겐의 조수가 되어야만 했다. 요페는 뮌헨대학에 다니면서 정말이지 악착같이 공부했다. 특히 실험 수업에 열심히 출석했는데, 열 개가 넘는 실험을 한 달 안에 모두 끝낼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도 기회가 왔다. 요페가 한 실험 중 하나는 이미 알려져 있는 스펙트럼을 측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얻은 결과는 표에 나와 있는 것과 달랐다. 그는 담당 교수였던 뢴트겐에게 그 결과를 보여주었다. 뢴트겐은 표가 잘못되었을 리가 없으니 아마도 네가 실험을 잘못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본인이 직접 실험해서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약속대로 뢴트겐은 요페가 한 실험을 직접 했다. 뢴트겐은 요페쪽으로 고개를 갸웃 돌렸다.
“요페씨, 당신이 얻은 결과가 맞는 것 같군요. 훌륭해요!”
이 일로 뢴트겐은 요페를 눈여겨봤다. 그래서 그에게 다른 숙제를 하나 내줬다. 뢴트겐은 요페에게 마리 퀴리가 쓴 논문 한 편을 주면서 라듐에서 나오는 열에너지를 측정한 뒤, 마리 퀴리의 결과와 비교해보라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기가 얻은 결과를 뢴트겐에게 보여주었다. 뢴트겐은 요페가 얻은 실험 결과를 보고 깜짝 놀랐다. 요페는 퀴리가 한 대로 하지 않고 독창적인 방법으로 측정했다. 요페의 능력을 알아본 뢴트겐은 그에게 자신의 조수로 일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드디어 요페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뢴트겐의 조수가 되면 일정한 보수도 받게 될 터이니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뢴트겐의 지도를 받으며 박사학위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3년 만에 최우수 성적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요페는 1년 남짓 뢴트겐 밑에서 연구원으로 지냈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로 돌아가고 싶었다. 뢴트겐은 뮌헨대학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고 말했지만, 요페는 거절하며 조국의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1906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이었던 탓에 제대로 된 직장을 찾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러시아에서는 요페가 독일에서 받은 박사학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러시아 교수들에게 그는 그저 러시아에서 학사를 마친 사람에 불과했다. 그 당시에 러시아에서 교수가 되려면 러시아의 박사학위가 필요했다. 요페는 1912년에 석사와 박사학위 논문을 다시 작성해야만 했다.
그는 1903년에 제정러시아의 재무부 장관이었던 비테가 세운 상트페테르부르크 기술연구소에 물리학 실험 담당으로 겨우 취직할 수 있었다. 능력에 비해서는 변변치 않은 자리였지만, 요페 덕에 연구소의 물리학 분야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훗날 세워지게 될 상트페테르부르크 물리기술 연구소의 터를 닦았다. 정부의 지원은 적었지만, 실험 장비를 만들고 실험할 사람들을 꾸려갔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기술연구소에 있으면서 요페는 참 많은 실험을 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건 전하량을 측정한 실험이었다. 로버트 밀리컨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거의 같은 결과를 얻었지만, 한발 늦는 바람에 노벨물리학상은 밀리컨에게 돌아갔다. 그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온 지 일 년 정도 지났을 때 그에게 큰 힘이 되어줄 이론물리학자가 그곳에 도착했다.
파울 에렌페스트(Paul Ehrenfest)는 오스트리아 빈 출신 유대인 이론물리학자였다. 그는 통계물리학을 세운 루드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의 지도를 받으며 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훗날 네덜란드 레이던대학의 교수로 있으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내게 될 뛰어난 교육자이기도 했다. 아브라함 파이스의 지도교수 윌렌벅도 에렌페스트에게서 배운 학생이었다. 에렌페스트는 박사학위를 받은 뒤 독일 괴팅겐으로 가서 당대의 유명한 수학자였던 펠릭스 클라인(Felix Klein)과 함께 연구했다. 그곳에서 러시아에서 유학 온 수학과 학생 타티아나 알렉시브나를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1907년 그녀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다. 그러나 에렌페스트도 요페처럼 러시아 학위가 없어서 교수가 될 수 없었다. 결국,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석사학위를 다시 했지만, 무신론자이면서 유대인이었던 그는 러시아에 있는 대학에 정규직을 잡을 수 없었다. 러시아에서 교수가 되려면 정교회에 속해야만 했다. 비록 정규직을 얻진 못했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에 있는 물리연구소에 나가 연구했는데, 그곳에서 요페와 또 다른 물리학자 드미트리 로쉬데츠벤스키(Дми́трий С. Рожде́ственский)를 만났다. 세 사람은 젊은 물리학자들을 모아 쿠르초크(kruzhok)라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러시아어 단어의 뜻 그대로 동아리 또는 모임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의 물리학과 교수들은 연구보다는 가르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고, 이런 동아리 모임을 좋게 보지 않았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막스 플랑크의 양자론을 마뜩잖게 여겼다. 그들은 여전히 19세기의 물리학자들이었다.
동아리는 비밀 조직처럼 운영되었다. 이 동아리의 주축이 되었던 사람은 에렌페스트였는데, 교수들의 눈을 피해 2주에 한 번씩 일요일 오전 10시에 만나 점심때까지 세미나를 했다. 모임도 정해진 장소에서 하지 않고 자리를 옮겨 다니며 열었다. 때로는 에렌페스트의 집에서 열릴 때도 있었다. 그때 세미나에 참석한 사람 중에서는 훗날 우주론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알렉산드르 프리드만(Алекса́ндр А. Фри́дман)이 있었고, 유명한 수학자가 될 야콥 타마르킨(Я́ков Д. Тама́ркин)도 있었다. 모임에서 에렌페스트는 유럽에서 나오는 최신 논문을 가지고 모인 사람들과 토론했다. 1912년, 에렌페스트가 은퇴한 헨드릭 로런츠(Hendrik Lorentz)의 후임으로 네덜란드 레이던대학으로 간 다음에는 요페가 이어받아 모임을 계속했다. 이 모임은 요페가 물리기술 연구소를 세운 후, 연구소의 세미나로 발전해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는 달리 모스크바에서는 대학에서 연구를 맡아서 하고 있었다. 그런데 1911년에 모스크바대학을 떠들썩하게 할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카소(Kasso)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모스크바대학에서 급진적인 학생들이 모여서 레프 톨스토이의 죽음을 추모하는 모임이 열렸는데, 정부에서는 이 모임을 불법이라고 간주했다. 톨스토이가 러시아의 위대한 소설가이기도 했지만, 당시 러시아 정부는 그를 무정부주의 사상가로 여겨 그를 따르는 자들을 의심했다. 그때 교육부 장관이었던 레프 카소(Lev Kasso)는 모스크바대학교 안으로 경찰을 투입해서 학생들의 추모 행사를 막았다. 이 또한 대학의 자율성을 해치는 불법이었다. 이 일에 항의하며 모스크바 총장과 대학에서 행정을 맡고 있던 교수들이 모두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카소는 그들 모두를 교수 자리에서 해임해 버렸다. 모스크바대학 교수들은 카소의 그런 행위에 반대하며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카소는 물러서지 않고 모스크바대학교 교수와 강사 중 사 분의 일을 대학에서 쫓아냈다. 그때 모스크바대학에서 물리학 연구소를 이끌던 표트르 레베데프(Пётр Н. Ле́бедев)도 크게 타격을 입었다.
레베데프는 1891년 독일 슈트라스부르크대학에서 아우구스트 쿤트(August Kundt) 밑에서 박사학위를 한 뒤, 모스크바로 돌아와 박사학위를 다시 하고 교수가 된 물리학자였다. 러시아에 있는 대학의 물리학과 과정을 독일처럼 바꾼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대학에서 교육만큼 중요한 것이 연구라고 믿었다. 독일에서 교육받으면서 경험했던 걸 바탕으로 물리학과 교육 과정을 독일식으로 탈바꿈시켰다. 모스크바대학에 새로 세운 삼 층짜리 물리학 연구소에 학생들이 실험을 배울 수 있도록 실험실을 갖추게 하고, 강의실도 독일에 있는 대학처럼 바꿨다. 그리고 학생 교육을 연구와 접목했다. 카소 사건이 일어난 1911년에는 스무 명이 넘는 학생들이 그의 지도 아래 연구하고 있었다. 카소 사건이 일어나자 레베데프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사표를 냈다. 불행히도 그는 그 이듬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에렌페스트는 러시아에서 여전히 자신은 이방인이라고 여겼다. 그는 외국인이었고 무신론자였고 유대인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벌어진 카소 사건을 보면서 자신이 러시아에서 자리를 잡고 자유롭게 연구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는 러시아를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다. 카소 사건은 모스크바대학을 쑥대밭으로 바꿔 놓았다.
1917년 10월 혁명과 피즈텍
요페는 1912년에 다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마친 후에야 그 이듬해에 연구소 강사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에렌페스트와 함께 해오던 세미나를 계속했다. 요페의 세미나에 참석한 학생 중에는 훗날 노벨물리학상을 받는 표트르 카피차(Пётр Л. Капица)와 니콜라이 세묘노프(Никола́й Н. Семёнов)도 있었다. 요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몇몇 대학에서 그를 교수로 초청하였다. 그중에는 미국에 있는 UC 버클리도 있었지만, 그는 연구소에 남았다. 요페 세미나는 매주 계속되었고, 러시아 전체에도 잘 알려졌다. 요페는 자신을 가르쳤던 뢴트겐처럼 학생들의 연구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가능하면 그들이 독립적으로 커갈 수 있도록 도와줬다.
1917년 10월,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공산당이 혁명을 일으켰을 때 요페는 공산당 편에 섰다. 요페는 과학이야말로 공산주의를 성공으로 이끄는 핵심 요소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에게는 “붉은 물리학자”라는 별명도 붙었다. 혁명은 곧 내전으로 번졌다. 1918년 7월 16일, 감금 생활을 하던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들은 적군(Red Army)의 손에 처형당했다. 러시아 내전은 5년 동안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뒤에 끝이 났다. 그리고 제정러시아는 완전히 막을 내리고 소련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들어섰다.
러시아의 정세가 어지럽게 돌아갈 때 레닌과 볼셰비키당은 새로 세워질 사회주의 국가를 이끌어 가려면 과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혁명은 과학자들에게도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혁명이 일어난 1917년부터 1918년까지 페트로그라드에 생겨난 학회는 11개나 되었다. 1918년 3월, 여성의학연구소에 교수로 있던 미하일 네메노프는 요페에게 엑스선과 방사선의학 연구소를 세우는 걸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이미 1913년부터 러시아에 엑스선과 방사선의학 학회를 조직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엑스선과 방사선의학을 연구할 수 있는 연구소도 세우고 싶어서 정부에 요청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네메노프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후, 이 연구소를 세우는 일을 다시 하고 싶었다. 네메노프의 요청을 받은 볼셰비키 정부의 계몽 인민위원회에서는 연구소를 1918년 4월에 연구소를 세우기 위해 먼저 네메노프와 요페를 비롯한 몇몇 교수들을 불러서 의논했다. 그러나 연구소를 새로 세우기에는 공간도 사람도 돈도 충분하지 않아서 여성의학연구소 내에 연구소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이 연구소는 네 개의 부서로 나뉘어 있었다. 요페는 물리기술학부를 맡았고, 네메노프는 의학과 생물학부를 책임졌다. 그리고 요페의 친구였던 로쉬데츠벤스키가 광학부, 클로브라트-체르빈스키가 라듐 연구를 맡았다. 그러나 서로 다른 네 분야의 조합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새로 생긴 연구소는 1921년에 세 개의 연구소로 독립해서 분리되었다. 요페가 맡고 있던 물리기술부는 물리기술 연구소가 되었다. 요페는 계몽 인민위원회의 과학 담당의 도움을 받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기술연구소 건너편에 군 정신병원이 있던 2층짜리 벽돌 건물을 얻었다. 그곳은 앞으로 소련의 물리학이 태어나는 산실 같은 곳이 될 터였다. 그러나 연구소가 제대로 가동하려면 갖춰야 할 게 많았다. 건물은 고칠 곳이 많았고, 난방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추운 겨울을 나려면 제대로 난방 시설을 갖추지 않고서는 실험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사람이었다. 연구소는 1923년 2월 4일에 정식으로 개소하였다. 연구소의 이름이 암시하듯, 물리기술 연구소는 순수 물리학과 공학에 필요한 기술을 연구하게 될 터였다. 이 연구소는 앞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피즈텍(Fiztekh)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날 개소식에서 요페는 과학과 기술 사이의 관계는 긴밀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정부의 지원을 계속 받으려면 기술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에서는 물리학이 연구소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그래서 자연스레 학파가 형성되었다. 그러니까 요페가 세운 물리기술 연구소에서 공부한 사람은 요페 학파의 일원이 되는 셈이었다. 그 이유를 좀 더 알아보려면 1919년 2월에 열린 첫 번째 러시아 물리학회에서 있었던 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물리학과 교수였던 오레스트 크볼슨(Орест Д. Хвольсон)은 고전적인 물리학자였다. 그는 러시아 물리학자로서는 처음으로 다섯 권으로 되어 있는 물리학 교재를 집필했고, 교양서적도 많이 냈다. 비록 에렌페스트와 요페가 비밀리에 세미나 모임을 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러시아의 물리학 발전에 관심이 많았던 물리학자였다. 크볼슨과 요페의 노력으로 러시아 물리학회가 만들어졌다. 그 첫 모임이 1919년 2월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렸다. 그곳 2월의 날씨는 거의 매일 영하 20도로 내려갔다. 발트해에서 불어오는 차갑고 습한 바람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꽁꽁 얼어붙게 했다.
러시아 물리학회 조직위원회에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올라오는 물리학자들을 위해 기숙사에 숙소를 마련하고, 저녁 식사도 제공해주겠다고 했지만, 혹시 모르니 먹을 건 개인이 지참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사람들에게 전했다. 이 학회에서는 러시아 혁명 후 물리학이라는 학문이 나아갈 방향, 정부와의 관계, 정부로 받아야 할 재정적 도움 같은 것을 논의하고 정리했다. 계몽 인민위원회에서도 이 학회에 참석했다. 위원들은 물리학자들도 정부의 연구와 개발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요페가 기조연설을 했다. 그는 현재 러시아의 물리학이 처해있는 비관적인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러시아에서 가장 필요한 건 현대물리학을 세워갈 교육 기관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을 겪으며 무너져 내린 물리학자들 사이의 네트워크를 다시 복구해야 한다는 말도 했다. 요페가 한 말은 앞으로 러시아의 물리학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결정짓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정부에서 지원하는 연구소를 러시아 전 지역에 세워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유럽의 예를 들었다. 그는 또 자신이 이끄는 연구소의 예를 들어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제정러시아 시대에는 불가능했지만, 혁명을 완수한 지금, 원자와 분자와 결정의 구조를 이해하는 연구에서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해야만 한다고 역설했다. 그가 한 말은 볼셰비키 유물론자들의 생각과도 일맥상통했다. 그런 연구를 위해서 연구 장비를 현대화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앞으로 세워질 연구소와 대학에서 대학원생을 가르쳐야 한다는 말도 했다. 이 말에 러시아 교육의 독특한 점이 담겨 있었다. 대학뿐만 아니라 연구소에서도 대학원생을 가르쳐야 한다는 건 물리학회에 참석하고 있던 몇몇 대학교수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마지막으로 그는 제대로 된 소련만의 물리학 논문집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볼슨을 비롯한 몇몇 물리학자들은 연구소 중심으로 물리학을 연구한다면, 물리학 연구가 지나치게 중앙집중식이 되어버릴 위험이 있다는 걸 지적했다. 크볼슨은 물리학 연구는 대학에서만 제대로 해도 충분하다며 요페의 말에 반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요페와 함께 연구소를 세우는 데 힘쓴 학자들은 요페의 의견에 찬성했다. 지금 러시아 물리학이 발전하려면, 혁명 정부의 도움이 필수적이고, 연구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계몽 인민위원회가 보기에도 요페가 내놓은 제안이 러시아의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훨씬 더 효율적으로 보였다. 요페의 바람은 1924년 레닌이 죽은 뒤, 1927년에 스탈린이 권력을 잡으면서 좀 더 빨리 이루어졌다. 스탈린은 1928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사람들을 몰아붙였다. 소련의 산업은 국유화되어갔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소련은 거대한 공업국가로 탈바꿈해갔다. 이 경제개발 계획이 끝날 즈음에 소련의 생산량은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연구소 중심으로 물리학이 발전해가야 한다는 요페의 생각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도 잘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요페 입장에서는 치러야 할 값이 있었다. 그가 세운 물리 기술 연구소에서 하는 연구는 응용 물리학이 중심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연구소에서 하는 연구는 소련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톱니처럼 맞물려 돌아가야만 했다. 이 일로 요페는 훗날 레프 란다우의 거센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1928년부터 레닌그라드 물리기술 연구소 같은 물리기술 연구소가 여러 지역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톰스크, 스베르들로브스크, 카르코프, 드네프로페트로브스크에도 비슷한 연구소가 세워졌다.
요페가 이끌던 레닌그라드 피즈텍도 계속 확장되어 갔다. 비록 응용 연구를 늘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지만, 이 연구소는 요페를 이어서 소련의 물리학을 이끌 물리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그중에는 요페의 조언을 따라 러더퍼드에게로 간 표트르 카피차가 있었고, 앞으로 소련의 이론물리학을 탄탄하게 세울 란다우가 있었다. 이들 외에도 니콜라이 세묘노프, 야코프 젤도비치, 유리 하리톤, 이고르 탐, 이고르 쿠르차토프 같은 핵물리학자들도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연구소가 세워진 지 10년이 지나 물리학자들은 피즈텍에 모여 연구소 창설 기념회를 열었다. 그때 그곳에 모인 물리학자 중에는 요페의 제자의 제자의 제자도 참석했으니, 그 짧은 시간 안에 요페는 학문적으로 증조할아버지가 된 셈이었다.
요페가 제안한 대로 소련의 물리학은 연구소를 중심으로 발전해갔다. 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물리학자들 중 몇몇은 다른 곳으로 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연구소에 남았다. 이런 전통 덕분에 소련의 물리학에서는 학파가 자연스레 형성될 수 있었다. 이 물리학 학파 중에서 가장 유명했던 건 란다우 학파였다. 그건, 물리학의 신이라고 불리던 란다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전천후 이론물리학자였다. 물리학 분야에서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은 거의 없었다.
덧. 그 다음 이야기는 올해에 출간될 책 <세 개의 쿼크>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