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분열은 어떻게 발견되었는가?
<타임머신>, <투명인간>, <우주전쟁>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지만, <자유로워진 세계>는 잘 모를 것이다. 1914년에 출판된 이 책에서 원자폭탄이라는 말이 처음 나온다. 허버트 웰스(Herbert G. Wells)는 화학자 프레더릭 소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자유로워진 세계>의 책머리에 “프레더릭 소디의 라듐 해석”이라고 적어놓았다. 소디는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캐나다 맥길대의 교수로 있는 동안 함께 일했던 화학자였다. 러더퍼드는 “원자핵 속에 들어있는 핵에너지를 실제로 꺼내 쓸 수 있는 일은 없다”라고 단언했지만, 소디의 생각은 달랐다. 소디의 영향을 받은 웰스는 처음으로 “원자폭탄”이라는 말을 창조했다. 소설 <자유로워진 세계>에서 나오는 원자폭탄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폭탄보다 훨씬 강한 폭발력을 지녔지만, 도시 하나를 없앨 만큼 위력이 있진 않았다. 소설은 소설로 끝나야만 했지만, 원자폭탄은 웰스의 상상을 넘어 지독히 파괴적인 괴물로 현세에 등장했다.
엔리코 페르미와 비아 파니스페르나의 소년들
엔리코 페르미는 틀리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물리학의 교황이라 일컬었다. 그는 갈릴레오 갈릴레이 이후로 가장 위대한 이탈리아 물리학자였다. 스스로 물리학을 터득했고, 이론물리학과 실험물리학에 모두 능했다. 당시 이탈리아의 물리학을 단숨에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사람이었다. 1926년 3월에 페르미는 스물다섯의 나이에 물리학 역사에 길이 남을 논문을 썼다. 이 논문 한 편으로 그는 단번에 양자역학을 세운 하이젠베르크와 겨룰 만큼 유명해졌다. 이 논문의 결과는 같은 해 8월에 폴 디랙이 얻은 것과 더불어 <페르미-디랙 통계>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모든 통계물리학 교과서에 실렸다. 1933년에는 방사선 중에서 전자나 양전자에 해당하는 베타선을 설명하는 이론을 세웠다. 이 이론으로 페르미는 네 가지 근본적인 힘 중에서 약력을 세상에 처음 알렸다.
페르미는 약력을 제안한 엄청난 논문을 <네이처>에 투고하였지만, <네이처> 편집자는 추측과 상상으로 가득한 논문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논문의 게재를 거부했다. 이 논문은 <베타붕괴 이론에 대한 시도>라는 제목으로 이탈리아 논문집에 실렸다. 이 역사적인 논문을 게재하지 않기로 한 결정은 <네이처>가 범한 가장 멍청한 실수가 되고 말았다.
이론물리학에서 최고봉에 이르렀지만, 페르미는 처음으로 좌절을 맛보았다. 1934년 이후로 페르미는 돌연히 이론물리학에서 실험물리학으로 연구 방향을 바꿨다. 채드윅이 1932년에 중성자를 발견하면서 핵을 이해하는 데 물꼬가 트였다. 1935년에 유카와 히데키가 강력의 존재를 최초로 예견한 것도 중성자가 발견된 이후였다. 그리고 중성자는 페르미에게 운명처럼 다가왔다. 페르미는 중성자가 발견된 후, 이론물리학을 떠나 실험물리학으로 돌아섰다.
페르미는 1926년에 나이가 스물다섯에 불과했지만, 이미 이론물리학자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로마대학의 교수이자 훌륭한 정치가이기도 했던 오르소 코르비노(Orso Corbino)는 페르미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학문인 양자역학을 가르칠 사람으로 페르미가 적격이었다. 코르비노는 그를 데려오려고 로마대학에 이론물리학 교수 자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페르미를 로마로 데려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이미 베니토 무솔리니가 1922년부터 정권을 잡고 있었다. 페르미가 오기로 한 자리에 파시스트 정권과 가까운 사람을 앉히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런 방해를 이겨내고 코르비노는 1927년에 페르미를 로마로 데려왔다.
코르비노가 이끄는 물리학 연구소는 파니스페르나 가(Via Panisperna)에 있는 삼 층짜리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삼 층에는 코르비노와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고, 이 층에는 연구소 도서관과 실험실이 있었다. 일 층에는 강의실과 상점이 있었다. 연구소 건물은 야자수와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고즈넉했다. 오래된 건물이라 예스러운 풍취가 감돌았다. 이곳에서 페르미는 자신이 직접 만든 장비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실험을 한다.
페르미가 물리연구소의 이론물리학 교수가 되자, 젊은 학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코르비노는 피렌체에 있던 실험물리학자 프랑코 라세티(Franco Rasetti)를 불러들였다. 라세티는 페르미와 동갑내기였다. 그는 물리학 외에도 박식했고 산을 잘 탔고 곤충과 식물에 관해서도 아는 게 많았다. 게다가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런 라세티의 강의에 흠뻑 빠진 사람이 있었으니, 기계공학을 전공하던 에밀리오 세그레였다. 세그레는 라세티와 이야기하며 그만 물리학에 반해버렸다. 그가 기계공학을 그만두고 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꾼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훗날 세그레는 반양성자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물리학상을 받는다. 코르비노는 페르미 교수가 함께 일할 학생을 찾는다고 공지했다. 처음 찾아온 학생은 이제 열여덟 살이 된 에도아르도 아말디(Edoardo Amaldi)였다. 그는 훗날 유럽 입자물리학 연구센터(CERN) 소장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미가 갈릴레이나 뉴턴 급의 물리학자라고 인정한 천재 에토레 마요라나(Ettore Majorana)가 합류했다.
중성자 실험
채드윅이 발견한 중성자는 페르미에게 영감을 안겼다. 이론적으로는 약력을 발견하는 데 중성자의 발견이 몹시 중요했지만, 중성자는 페르미의 관심을 이론물리학에서 실험물리학으로 돌리게 했다. 이렌과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부부의 인공방사성 핵종의 발견도 페르미에게 또 다른 영감을 줬다. 페르미는 알파입자 대신에 중성자를 원자핵에 때려주면, 인공방사성 핵을 만드는 게 훨씬 수월할 거라고 여겼다. 1944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이지도어 라비도 이렇게 말했다.
“중성자는 전하를 띠지 않아서 중성자가 핵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을 강한 전기적 반발력이 없어요. 사실, 핵을 서로 잡아당기는 인력이 오히려 중성자를 핵 안으로 끌어당길 수도 있지요. 중성자가 핵 안에 들어가면 그 영향은 마치 달이 지구를 강타하는 듯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해요. 충돌로 인해 중성자가 포획되면, 핵은 충격으로 격렬하게 흔들릴 겁니다.”
그러나 중성자는 알파입자처럼 방사성 물질에서 바로 나오는 입자가 아니라 베릴륨에 알파입자를 쏴줘야 튀어나오므로, 그 양이 훨씬 적었다. 알파입자 만 개를 베릴륨에 때려주면, 기껏해야 중성자가 하나 튀어나왔다. 중성자의 수는 아주 적었지만, 전하를 띠고 있지 않아 원자핵 속으로 깊이 침투할 수 있었다. 폴로늄에서 나오는 알파입자로는 알루미늄보다 더 무겁고 전하량이 많은 원자핵을 다른 핵으로 변환시키는 건 거의 불가능했지만, 중성자로는 가능했다.
페르미는 물리연구소 근처에 있는 라듐연구소 소장 줄리오 트라바치(Giulio Trabacchi)로부터 라듐을 조금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라듐이 변하면서 생긴 라돈 기체를 베릴륨과 함께 유리관에 밀봉해서 중성자 선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라세티의 도움을 받아 가이거 계수기도 만들었다. 페르미는 졸리오퀴리 부부처럼 알루미늄부터 시작했다. 중성자를 알루미늄에 쏴주자 가이거 계수기가 반응했다. 중성자를 삼킨 알루미늄이 알파입자를 내놓으면서 나트륨 동위원소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나트륨 원자핵은 전자를 내놓으며 마그네슘으로 바뀌었다. 반감기는 대략 12분 정도였다. 대성공이었다. 1934년 3월 25일, 페르미는 이탈리아 학술지인 <라 리체르카 시엔티피카(La Ricerca Scientifica: 과학연구)>에 역사적인 논문을 출판했다. 이 새로운 발견은 유럽 전역으로 서서히 알려졌다. 그해 4월 23일, 러더퍼드는 페르미에게 중성자 실험을 잘 설명해 줘 고맙다는 편지를 페르미에게 보내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드디어 이론물리학으로부터 성공적으로 탈출한 것을 축하합니다.”
앤더슨이 디랙이 예언한 양전자를 발견했을 때, 실험물리학자가 디랙보다 먼저 양전자를 발견했어야 했다며 애석해하던 러더퍼드였으니, 이론물리학자로 널리 알려진 페르미가 실험물리학자로 전향한 사실이 무척 기뻤을 것이다. 페르미가 쓴 논문은 앞으로 15개월 동안 같은 학술지에 실리게 될 열 편의 논문 중 첫 번째 논문이었다. 이렇게 중성자물리학은 페르미의 손에서 태어났다. 이제 핵물리학자들은 페르미의 논문을 읽으려고 이탈리아어를 부지런히 배워야만 했다.
느린 중성자의 위력
페르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내친김에 주기율표에 나오는 모든 원소에 중성자를 쏴주기로 마음먹었다. 페르미는 아말디와 세그레에게 함께 실험하자고 요청했다. 오스카 다고스티노(Oscar D'Agostino)도 합류했다. 그는 프랑스 라듐연구소에서 지내면서 마리 퀴리에게 방사화학을 배운 화학자였다. 인공 방사성 핵종을 구분하려면 방사화학자의 도움이 필요했다. 1934년에는 그룹의 막내가 될 스물한 살의 청년 브루노 폰테코르보(Bruno Pontecorvo)가 합류했다. 훗날 그는 소련으로 망명해서 뉴트리노를 발견할 수 있는 반응을 제안했다.
1934년 10월이었다. 페르미가 런던 학회에 가 있는 동안, 폰테코르보는 아주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똑같은 표적과 중성자 선원을 썼지만, 이 장치를 대리석 테이블 위에 두느냐 아니면 나무 테이블 위에 두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졌다. 라세티는 의심쩍은 눈으로 폰테코르보를 흘겨보며 말했다.
“어이 강아지, 그럴 리가 없어. 네가 뭘 잘못 봤을 거야.”
강아지(Cucciolo: 쿠치올로)는 막내의 별명이었다. 그러나 라세티가 직접 나서서 실험해 봐도 결과는 똑같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비아 파니스페르나의 아이들은 혼란에 빠졌다.
1934년 10월 22일, 런던에서 돌아온 페르미는 테이블 곁에 서서 표적과 중성자 선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더니 5cm 두께의 파라핀 왁스 한 조각을 가져와서 표적과 중성자 선원 사이에 두었다. 그러자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파라핀 왁스를 두기 전보다 생성되는 방사성 동위원소의 양이 백 배 이상 증가하는 것이었다. 페르미의 제자들이 테이블로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장치가 고장 났을 거라고 여겼지만, 실험 장치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페르미는 점심 식사 후에 다시 논의하자고 말했다. 페르미는 혼자서 점심을 먹으며 느려진 중성자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곰곰이 따져봤다.
오후 세 시에 라세티를 비롯한 여섯 명이 다시 페르미 곁으로 모였다. 그들을 보며 페르미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이제야 발견하다니 참 멍청했어. 중성자는 파라핀을 지나면서 그 속에 든 수소 원자핵과 부딪히며 처음보다 에너지를 수천 배 정도 잃었을 거야. 속력이 무척 느려진 중성자는 표적 원자핵에 부딪히면서 그 속에 포획될 확률이 훨씬 높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야. 중성자는 전하가 없으니 표적 속에 든 양성자를 밀어낼 리도 없고. 이 느린 중성자가 표적 내부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표적 원자핵 속에 포획될 확률도 더 높아지겠지.”
알파입자의 경우에는 속력이 빨라야 표적과 핵반응을 더 잘 일으킬 수 있었지만, 중성자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느린 중성자가 핵반응을 일으키는 데 훨씬 효과적이었다. 폰테코르보가 우연히 발견한 이 느린 중성자는 핵물리학의 판도를 바꿔 놓았다. 폴로늄에서 나오는 알파입자는 알루미늄보다 무거운 원자핵과는 반응하기 힘들었지만, 중성자는 원자핵의 종류와 상관없이 그 속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그날 저녁 아말디의 집에 모여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세그레는 페르미가 불러주는 대로 열심히 받아 적었다. 옆에서는 라세티와 폰테코르보와 아말디가 시끄러울 정도로 이런저런 제안을 해댔다. 밤늦어서야 논문이 마무리되었다.
페르미는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코르비노에게 알렸다. 코르비노는 이 새로운 발견은 서둘러 특허로 등록하라고 페르미에게 말했다. 느린 중성자를 쓰면 동위원소 생산이 늘어날 거고, 의학용으로도 쓸 수 있을 테니, 좋은 수입원이 될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4일 후에 특허는 아말디, 페르미, 폰테코르보, 라세티, 세그레의 이름으로 등록되었다. 특허로 돈이 들어오면 트라바치와 다고스티노를 포함해서 일곱 명이 똑같이 나누자는 약속도 했다.
초우라늄
폰테코르보가 느린 중성자의 효용을 알아내기 전부터 페르미는 동료들과 함께 수소부터 시작해서 우라늄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한 많은 종류의 원소를 표적으로 삼아 중성자를 때려준 뒤, 인공적으로 방사성 원자핵을 생성시킬 수 있는지 조사했다. 그중에서도 우라늄은 특별했다. 자연에 존재하는 우라늄은 99.3%가 우라늄 238이고 나머지가 우라늄 235이다. 그러므로 우라늄은 대부분 우라늄 238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안에는 양성자가 92개, 중성자가 146개가 들어있다. 이 우라늄에도 느린 중성자를 쏴주었다. 우라늄은 대부분 알파 붕괴를 하므로 우라늄의 인공 방사성 핵종을 규명하는 일은 몹시 까다로웠다. 우라늄에 느린 중성자를 충돌시키자, 두 종류의 새로운 원자핵이 등장했다. 반감기가 13분 정도 되는 것과 1시간 30분쯤 되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그리고 둘 다 베타붕괴를 하였다. 우라늄보다 질량이 좀 적은 방사성 핵종이 나왔는지 살펴봤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느린 중성자를 쏴주었는데, 우라늄 안에 든 양성자나 중성자가 여럿 튀어나온다는 건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페르미는 아주 조심스럽게 우라늄보다 무거운 원자핵이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이게 사실이라면 최초로 우라늄보다 무거운 원자핵을 인공적으로 생성시킨 역사적인 발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대학의 학기는 전통적으로 이탈리아 국왕이 참석하는 린체이 아카데미의 학술회의로 마무리되었다. 린체이 아카데미는 1603년에 유럽에서 세워진, 가장 오래된 학술원이었다. 처음 세워졌을 때 중심인물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였다. 1934년, 이 대회에서 연설자로 나선 코르비노는 "현대 물리학의 결과와 전망"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연구소에서 수행한 중성자 연구를 설명하며 페르미가 발견한 초우라늄 원소에 대해 언급했다.
“원자번호 92인 우라늄의 경우 특히 흥미롭습니다. 중성자를 흡수한 우라늄은 전자를 방출하며 주기율표에서 한 단계 높은 원소, 즉 원자번호가 93인 새로운 원소로 빠르게 변환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새로운 원소도 방사성을 띠며 붕괴합니다. 아직 그 붕괴 과정은 알려지지 않았지만요.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에서 새로운 원소가 차지하는 위치를 보면 망간 및 레늄과 유사한 화학적 특성이 있으리라 예측합니다. 우라늄을 넘어서 새로운 원소가 발견되었다는 걸 확신합니다.”
이 소식은 이탈리아 전체에 알려졌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정작 페르미는 코르비노의 강연에 불편해했다. 초우라늄을 발견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로 확신할 수 없었다. 즉각적인 반응은 독일에서 나왔다. 레늄을 처음으로 발견한 이다 노닥(Ida Noddack)은 <안게반테 케미(응용화학: Angewante Chemie)>에 출판한 논문에서 페르미의 발견을 비판했다. 그녀의 논박은 타당한 점이 있었다. 그 많은 양성자와 중성자를 지닌 우라늄이 우라늄 하나를 받아들여 다시 전자를 내놓으며 붕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여러 핵으로 쪼개질 가능성이 더 컸다. 페르미와 그의 동료들은 노닥의 비판을 무시했다. 그녀는 자신의 주장을 말로 했을 뿐이지 정작 실험으로 보인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화학자의 말이었니, 이닥이 한 주장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페르미의 발견에 쐐기를 박는 듯한 결과가 독일 베를린에서 나왔다.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는 오토 한(Otto Hahn)을 설득해서 페르미의 중성자 실험을 시작했다. 두 사람은 페르미와 비아 파니스페르나의 아이들이 발견한 두 원소 중에서 반감기가 짧은 것은 원자번호가 93이고, 반감기가 긴 것은 94라고 확증했다. 두 사람의 발견으로 초우라늄의 발견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보였다. 1938년 12월, 페르미는 느린 중성자를 이용해서 인공방사성 핵종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이론물리학자였던 페르미가 노벨물리학상을 실험물리학으로 받았으니, 실험물리학자로 완전한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페르미가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그해에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던 현상이 발견된다. 그것은 핵분열이었다. 페르미에게는 무척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가 본 것은 초우라늄이 아니라 핵분열이었다.
와해된 비아 파니스페르나 그룹
“두체” 무솔리니가 파시스트 정권을 세운 건 1922년이었지만, 이탈리아에서 유대인에 대한 탄압은 거의 없었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며 독일에 사는 유대인에 대한 무자비한 압제가 시작된 것과는 달리 1934년에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에 반유대주의는 없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1938년 7월부터 무솔리니는 반유대주의를 천명하고 나섰다. 히틀러의 압력과 나치 독일과 곧 맺게 될 연맹 때문이었다. 1938년 9월 1일부터 정부에서 일하는 공무원들과 대학에서 가르치는 유대인 교수들은 모두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법이 발효되었다. 이 법은 비아 파니스페르나에 있는 물리연구소에도 영향을 미쳤다. 라세티, 세그레, 폰테코르보는 유대계 이탈리아인이었다. 이탈리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일찌감치 깨달은 폰테코르보는 1936년에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코르비노가 1937년 1월에 세상을 떠나면서 이들의 바람막이도 없었다. 1938년 6월에 미국을 방문하고 있던 세그레도 이탈리아에서 인종 차별법이 시행되면서 그만 귀국길이 막혀버렸다.
유대인이었던 아내와 아이들이 걱정되었던 페르미도 비밀리에 미국의 교수 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닐스 보어로부터 193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페르미는 1938년 12월,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러 스웨덴으로 떠나면서 가족들과 동행했다. 페르미는 로마역에서 아말디와 라세티를 만나 훗날을 기약하자며 이별의 포옹을 나눴다. 그리고 그길로 가족과 함께 스웨덴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페르미가 로마를 떠나면서 로마 핵물리학 그룹은 해체되었다. 라세티는 파시스트 정권을 좀 더 참고 견뎠지만, 1939년이 되자 결국, 캐나다로 떠났다. 아말디만 로마에 남았다. 그 역시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육군에 입대해 북아프리카 전선에 배치되었다. 중성자를 이용한 인공방사성 원소의 생성으로 한때 세계적인 핵물리 그룹으로 우뚝 섰던 로마 그룹은 무솔리니의 손에 와해되었다.
이상한 초우라늄
파리에 있는 라듐연구소에서도 페르미가 발견한 초우라늄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1937년 10월, 이렌 퀴리와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젊은 화학자 파블 사비치는 반감기가 세 시간 반인 원자핵을 발견했다. 이 원자핵은 두 사람은 한과 마이트너가 발견하지 못했던 핵이라고 말하면서 화학적인 거동으로 봐서는 우라늄이 중성자를 하나 받아들인 다음, 알파입자를 내놓으며 토륨의 동위원소가 되었다고 발표했다. 마이트너는 조수 프리츠 슈트라스만(Fritz Strassmann)과 함께 두 사람의 실험을 확인했지만, 토륨을 발견할 수 없었다. 마이트너는 두 사람이 발견한 원자핵은 두 가지가 섞여 있을 거라며 두 사람이 실수했을 거라는 편지를 이렌 퀴리에게 보냈다. 이렌 퀴리는 실험을 계속했다. 그 원자핵은 과연 토륨이 아니었다. 한과 마이트너의 지적이 맞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원자핵의 화학적인 성질은 희토류와 비슷했다. 상황은 오리무중 상태였다. 퀴리와 사비치는 집요하게 실험을 계속했다. 그러나 결과는 점점 더 이상했다. 자신들이 찾은 원자핵은 악티늄에 란타늄이 섞여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악티늄에서 란타늄을 제거하기 힘들었다.
퀴리와 사비치의 결과를 내내 지켜보던 베를린 그룹은 두 사람의 해석이 계속 바뀌는 걸 보며 지치고 말았다. 더는 이 반감기가 세 시간 반인 원자핵에 집중하지 않기로 결심하며 이 원자핵을 유별난 원소라는 뜻으로 큐리오줌(Kuriosum)이라고 불렀다. 1938년 7월, 퀴리와 사비치는 자신들이 발견한 반감기 세 시간 반의 원자핵은 아마도 란타늄 계열의 초우라늄일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란타늄은 주기율표에서 악티늄 바로 위에 있는 원자번호 57인 원소다. 우라늄이 란타늄으로 변하려면, 중성자 하나를 포획한 뒤, 양성자를 서른다섯 개나 내보내야만 한다. 만약에 이렌과 사비치가 우라늄이 쪼개져서 란타늄이 나왔다고 자신들의 발견을 해석했더라면, 핵분열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초우라늄을 확인하는 일이 왜 이토록 어려웠을까? 그때만 해도 극미량의 방사성 원소를 화학적으로 침전시키는 일은 몹시 어려웠다. 그리고 양자역학이 원자를 잘 설명한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원자핵도 잘 설명할 수 있는지 몰랐다. 원자핵이 베타붕괴를 하면서 내뱉는 전자가 원자핵 안에서 온다고 여기기도 했고, 중성자가 발견되었을 때는 중성자가 양성자와 전자가 결합한 상태라고 가정하기도 했다. 1935년에 유가와가 강력에 관한 이론을 내놓았지만, 유가와의 이론은 1947년이나 되어서야 실험적으로 증명된다. 당시에는 초우라늄과 핵분열을 구분할 만한 이론이 없었다. 초우라늄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이론이 좀 더 무르익어야 했고, 실험 데이터도 좀 더 쌓여야 했다.
리제 마이트너의 망명
1938년이 되자, 독일의 정치적 상황은 점점 더 나빠져 갔다. 독일 대학에서 유대인 교수들은 이미 오래전에 쫓겨났다. 나치친위대나 비밀경찰을 피해 외국으로 피한 학자들은 운이 좋은 셈이었다. 남아있던 유대인 학자들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마이트너는 유대인이었지만, 국적이 오스트리아였다. 아직은 베를린에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지만, 불안감은 높아만 갔다. 1937년에는 마이트너를 늘 지원하던 막스 플랑크가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소장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1938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합병되었다. 마이트너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독일에서 25년 동안 일했지만, 그녀에게 독일은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연구소의 분위기도 예전 같지 않았다. 한때 동료였던 쿠르트 헤스 교수는 마이트너를 일컬어 “연구소를 위태롭게 하는 유대 여자”라며 악담을 해댔다. 몇몇은 나치 유니폼을 입고 연구소에 나타났다. 마이트너는 그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연구소의 고위직에 있는 자들은 마이트너가 연구소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그녀를 압박했다. 그녀를 도우려는 좋은 동료들이 있었고 플랑크의 후임으로 온 카를 보슈도 마이트너를 보호해 주었지만, 마이트너는 목숨이 위태로움을 느꼈다.
1938년 4월에 닐스 보어가 마이트너를 빼내려고 코펜하겐에 있는 자신의 연구소로 초청했다. 마이트너는 여행 비자를 받으려고 덴마크 영사관에 갔지만, 이미 휴지 조각이 되어버린 오스트리아 여권으로는 비자를 받을 수 없었다. 보어는 멈추지 않고 마이트너를 돕기로 결심했다. 1938년 6월 6일에 닐스 보어가 아내와 함께 베를린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를 방문했다. 마이트너를 만난 보어는 덴마크나 스웨덴에 자리를 알아보겠다고 약속했다. 보어는 네덜란드 학자들에게 마이트너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덕 코스터(Dirk Coster), 헨드릭 크라머스(Hendrik Kramers), 페터 드바이(Peter Debye), 아드리안 포커르(Adriaan Fokker) 같은 네덜란드 물리학자들이 그녀를 독일에서 빼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나치독일은 유대인이 독일을 떠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코스터는 베를린까지 가서 마이트너를 네덜란드로 탈출하는 걸 도왔다. 이 탈출 과정은 영화로 제작해도 될 만큼 극적이고 긴박했다.
1938년 7월 12일 밤, 마이트너는 감시의 눈길을 피하려 연구소에서 한과 함께 밤늦게까지 연구했다. 그리고 곧장 한의 집으로 갔다. 그녀의 오랜 동료 한은 돈으로 바꾸라며 자신의 어머니가 물려준 다이아몬드 반지를 그녀에게 주었다. 다음날 일찍 마이트너는 역에서 코스터를 만나 네덜란드 흐로닝언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독일에서 네덜란드로 넘어가는 국경에서 한 차례 조사를 받았지만, 국경경비대원은 마이트너를 코스터의 부인으로 여겼다. 마이트너는 네덜란드에서 덴마크를 거쳐 8월 2일에 스웨덴 스톡홀름에 안착했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마이트너는 아마도 독일에서 탈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리제 마이트너가 환갑을 맞은 지 이틀이 지난 1938년 11월 9일부터 10일 사이에 “수정의 밤(Kristallnacht)”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나치 돌격대(SA: Sturmsabteilung)와 독일인들은 유대인 상점과 유대교 회당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그날, 독일 전역의 거리는 깨진 유리창으로 가득했다. 나치 돌격대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있는 1,400여 개의 회당에 불을 질렀고, 91명의 유대인을 학살하였다. 그리고 30,000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잡혀 집단수용소로 보내졌다. 마이트너의 조카이자 물리학자인 오토 프리슈(Otto Frisch)의 아버지도 체포되어 다카우에 있는 집단수용소로 끌려갔다. 유대인을 말살하려는 나치의 학살이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우라늄에서부터 나온 바륨
수정의 밤 사건이 일어날 즈음에 한과 슈트라스만은 우라늄에 중성자를 쏘아주는 실험을 계속했다. 두 사람은 퀴리와 사비치가 발견한 반감기 3.5 시간의 동위원소는 화학적으로 바륨과 란타늄과 비슷한 라듐의 동위원소가 주를 이루고 거기에 다른 원소가 섞여 있는 화합물이라고 주장했다. 우라늄이 중성자를 받아 알파입자를 두 개 내놓으면 라듐이 되지만, 우라늄에서 나오는 알파입자의 에너지가 문제였다. 우라늄에 쏘아준 중성자만으로는 알파입자 두 개가 나오기에는 에너지가 충분하지 않았다. 11월 10일에 한은 보어의 초청을 받아 코펜하겐에 있는 닐스 보어 연구소를 방문하였다. 거기서 4개월 만에 마이트너를 다시 만났다. 한은 자신이 얻은 실험 결과를 마이트너와 긴히 토론했지만, 마이트너를 만난 사실을 비밀에 부쳐야만 했다.
한과 슈트라스만은 실험하면 할수록 점점 더 수렁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난번 실험과 비슷했지만, 이번에 얻은 방사성 물질은 화학적으로 바륨과 흡사했다. 바륨은 주기율표에서 라듐 바로 위에 있다. 두 물질을 화학적으로 분리하는 건 당시 기술로는 불가능하였다. 우라늄이 중성자를 받아 라듐으로 바뀌는 것도 이상했지만, 우라늄에서 바륨이 나오는 건 그보다 훨씬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스톡홀름에 도착한 페르미는 193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기념으로 강연했다. 그 강연에서 페르미는 초우라늄 원소 93과 94의 발견을 기정사실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두 원소에 각각 오세니윰과 헤스페리움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한과 슈트라스만은 여전히 안개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한은 스웨덴에 있는 마이트너의 도움이 간절했다. 1938년 12월 19일, 한은 마이트너에게 편지를 써 자신이 맞닥뜨린 어려움을 토로했다.
“바륨만 빼면, 나머지 원소를 분리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모든 반응은 라듐과 일관성이 있어요. 단 한 가지 아주 특이한 점은 라듐과 바륨을 서로 분리할 수 없고, 라듐 동위원소는 꼭 바륨처럼 보입니다.”
이틀이 지나 한은 논문을 투과하기 전에 마이트너에게 다시 한번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한의 답답한 심정이 잘 드러났다.
“우리가 예전처럼 함께 연구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신나는 일이었을까요. 실험 사실로부터 내린 결론은 이래요. 그토록 철저하게 연구한 세 가지 동위원소가 라듐이 아니라 화학자의 관점에서 바륨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1938년 12월 22일, 한은 자신이 쓴 논문을 <나투어비센샤프텐>에 투고하였다. 곧 세상을 놀라게 할 논문 제목은 “우라늄의 중성자 방사 조사에서 파생된 알칼리성 토류 동위원소의 결정 및 관계에 관하여”로 지극히 평범했다. 12월 27일에 한은 편집자에게 전화를 걸어 한 문단을 추가하였다. 그 문단 마지막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바륨과 마수륨의 원자질량을 합하면 138+101=239입니다!”
한이 말한 마수륨은 오늘날 테크니튬이라고 한다. 테크니튬은 우라늄 원자핵이 핵분열을 할 때 쪼개져 나오는 원소 중 하나다. 테크니튬의 동위원소는 거의 인공적으로만 생성되고 모두 방사성 붕괴를 한다.
핵분열의 발견
마이트너는 스웨덴 물리학자 만네 시그반(Manne Siegbahn)의 도움을 받아 스톡홀름 근처에 있는 물리연구소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지만, 베를린의 환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실험실은 열악했다. 함께 일할 사람도 없었고, 초우라늄 실험을 할 장비도 없었다. 그곳에 있는 젊은 물리학자들은 사이클로트론을 짓는 일에 바빴다. 마이트너는 이곳에 와서 환갑을 맞았다. 나치만 아니었다면 독일에서 동료들의 생일 축하를 받았으리라. 절망감과 외로움이 덮쳐왔다. 곧 크리스마스였다. 명절에 혼자 지내는 건 무척 외로운 일이었다. 다행히 예테보리 근처 쿵갈브에서 사는 스웨덴 친구가 크리스마스 때 일주일 동안 함께 지내자며 마이트너를 초대했다. 덴마크 닐스 보어 연구소에 있는 마이트너의 조카 오토 프리슈도 함께 초대했다고 했다. 초대도 달가웠지만, 무엇보다 조카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들떴다. 여행 가방을 싸며 한이 보내온 편지를 챙겼다. 프리슈와 함께 한과 슈트라스만이 얻은 결과를 토론할 수 있다는 걸 상상만 해도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프리슈는 마이트너와 스물여섯 살 차이가 나지만, 프리슈는 어려서부터 이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학문적 궤적은 이모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마이트너와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에서 공부했고, 박사학위를 마친 다음에는 베를린에 가서 연구원으로 지내다 함부르크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나치가 정권을 잡으며 유대인이었던 프리슈도 대학에서 쫓겨났다. 다행히 영국 런던의 버크벡 대학의 패트릭 블래킷이 초청해서 그곳에서 일하다가 덴마크 닐스 보어 연구소에 자리를 잡았다.
쿵갈브에 도착한 프리슈는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마이트너를 만났다. 그는 이모에게 반갑게 인사했지만, 마이트너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프리슈는 이모를 만나면 한에게서 전해 들은 아버지의 근황을 물어본 뒤 닐스 보어 연구소에서 하는 실험을 이모와 함께 의논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모의 얼굴을 보자 걱정이 되었다. 무슨 걱정거리가 있느냐고 물었다. 마이트너는 한에게서 온 편지를 조카에게 보여주었다. 프리슈는 우라늄에서 나온 게 바륨이라니,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사실이라면, 정말 충격적인 결과였다. 실수가 아니냐고 물었지만, 마이트너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아는 한은 그런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함께 아침 식사를 마친 뒤, 한과 슈트라스만의 결과를 놓고 열띤 토론을 했다. 프리슈는 이모와 산책하며 토론을 이어가기로 했다. 프리슈는 스키를 신었다. 마이트너는 그냥 걷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꽁꽁 얼어붙은 강을 건너 눈에 덮인 숲으로 향하며 토론을 이어갔다. 걷는 내내 마이트너는 1930년에 조지 가모프가 내놓은 핵모형을 떠올렸다. 1933년에 강의하면서 그 모형을 다룬 적도 있었다. 가모프의 모형은 물방울 모형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핵이 마치 물방울처럼 생겼다고 보고 핵을 다룬다. 여기서는 핵을 이루는 핵자(양성자와 중성자)의 미시적 양태보다는, 핵자들이 집단으로 보여주는 성질이 핵을 이해하는 데 더 중요하다고 본다. 이 모형은 보어도 핵반응을 설명하면서 사용했던 적이 있었다.
마이트너와 프리슈는 숲속으로 들어가 오래된 나무 그루터기 위에 앉았다. 숲속 우듬지 위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윙윙거렸다. 마이트너는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펴고 계산을 시작했다. 바람에 종이의 가장자리가 펄럭였다. 우라늄 안에는 양성자가 아흔두 개나 들어있으니, 이 정도 전하량이라면 우라늄의 표면장력을 충분히 이겨낼 만큼 셀 거라고 가정하였다. 그러면 우라늄 원자핵은 불안한 상태에 놓여있을 것이고, 거기에 중성자로 살짝 건드리면, 우라늄 원자핵이 둘로 쪼개질 수 있다. 한과 슈트라스만이 우라늄에 중성자를 쏴줬을 때 나온 바륨은 우라늄 원자핵이 쪼개지면서 나온 것이었다. 마이트너는 이때 나오는 에너지가 어마어마하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마이트너의 계산으로는 에너지의 양이 2억 전자볼트에 달했다. 우라늄 원자핵 하나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이 정도니 실제로 우라늄 1g이 모두 에너지로 바뀐다면,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에너지는 실로 어마어마할 터였다.
1939년 1월 3일, 코펜하겐에 도착한 프리슈는 곧장 보어에게 달려가서 마이트너와 함께 얻은 결과를 설명했다. 보어는 평소답지 않게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우리가 정말 멍청했던 것이군요. 이렇게 놀랍도록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보어는 프리슈에게 마이트너와 논문은 썼냐고 물었다. 프리슈는 곧 논문을 써서 <네이처>에 보낼 거라고 보어에게 대답했다. 마침 그때 보어는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막 여행을 떠나는 참이었다. 프리슈는 보어에게 신신당부했다.
“보어 교수님, 미국에 가거든 저와 나눈 이야기는 꼭 비밀로 지켜주세요. 아직 논문을 투고하지 않았으니 꼭 비밀로 지켜주셔야 합니다.”
보어는 프리슈에게 비밀을 지키겠노라고 굳게 약속했다. 프리슈는 가깝게 지내던 생물학자의 조언을 따라 우라늄 원자핵이 중성자를 받아 쪼개지는 현상을 핵분열(nuclear fission)이라고 불렀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 1939년 1월 7일, 보어는 열아홉 살 난 아들 에릭과 벨기에 출신의 젊은 이론물리학자 레옹 로젠펠드(Leon Rosenfeld)와 함께 미국 뉴욕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보어가 지낼 객실에는 칠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미국까지 가는 데는 열흘 가까이 걸렸다. 그동안 보어는 로젠펠드와 함께 핵분열에 대해 내내 토론하였다. 그런데 그만 로젠펠드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비밀로 해달라는 말을 깜빡 잊고 하지 못했다. 1939년 1월 16일, 보어는 뉴욕 허드슨강에 있는 항구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보어와 연구한 적이 있는 프린스턴대학교의 젊은 교수 존 휠러가 마중 나와 있었다. 곧이어 페르미 부부도 만나기로 되어있었다. 보어는 프리슈에게 비밀을 지키겠노라고 약속한 터라 휠러와 페르미 앞에서 핵분열이라는 말은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로젠펠드가 문제였다. 휠러를 만나자마자 로젠펠드는 핵분열 이야기를 전했다. 프린스턴으로 돌아온 휠러는 자신이 들은 핵분열의 발견을 그곳 교수들에게 전했다. 그렇게 핵분열의 비밀은 미국 핵물리학자 전체에게 알려졌다. 프린스턴에서 머무는 동안 보어는 휠러와 함께 가모프의 물방울 모형을 이용해서 핵분열을 정량적으로 설명하는 연구를 <피지컬 리뷰>에 출판하였다.
프리슈에게서 한과 슈트라스만이 발견한 건 핵분열이라는 말을 들은 덴마크 물리학자 크리스티안 묄레르(Christian Møller)는 만약에 우라늄이 핵분열을 하면서 중성자를 한두 개 더 내놓는다면, 이 두 번째 중성자가 계속해서 우라늄 원자핵을 계속 분열시킬 것으로 예측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더 큰 에너지가 나오며 중성자가 더 많이 나올 것이고, 핵분열 과정은 계속해서 일어난다. 묄러가 예측한 건 핵분열의 연쇄반응(chain reaction)이었다. 이 연쇄반응을 잘 제어한다면, 핵분열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조절할 수 있지만, 제어할 수 없다면, 연쇄반응은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핵분열의 고삐 풀린 연쇄반응, 그것이 원자폭탄이었다.
원자폭탄 개발을 향하여
미국과 영국으로 망명한 물리학자들은 나치 독일에 있는 과학자들이 핵분열을 이용해서 파괴적인 무기를 만드는 데 쓸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그들 중에는 영국으로 망명한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Leo Szilard)가 있었다. 그는 불안했다. 나치가 먼저 이 핵에너지를 손에 넣으면 그야말로 세계는 나치 아래 무릎을 꿇어야만 하는 사태가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아인슈타인을 만나 사태의 심각성을 설명한 뒤, 대통령을 설득할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아인슈타인은 입을 굳게 다물며 실라르드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대로 원자폭탄이 히틀러의 손에 들어간다면, 이 세계의 종말이었다. 아인슈타인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원자폭탄이 나치 독일에서 먼저 만든다면, 그것은 온 세상을 나치에게 넘겨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우라늄위원회를 만들어서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는지 가능성을 타진해 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여러 학자의 의견이 엇갈리면서 일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넵투늄과 플루토늄의 발견
1940년 6월, 버클리 방사 연구소에서 연구하던 에드윈 맥밀런은 워싱턴 D. C.의 카네기연구소에 있는 필립 애벌슨(Philip Abelson)과 함께 지름이 1.52m인 사이클로트론을 이용해서 우라늄보다 원자가가 더 큰 인공 초우라늄 원자핵을 발견하였다. 핵물리학자 니콜라스 케머(Nicholas Kemmer)는 이 새로운 원자핵을 해왕성(Neptune)에서 이름을 따와 넵투늄(Neptunium)이라고 불렀다. 우라늄이라는 이름이 천왕성(Uranus)과 닮았으니, 우라늄보다 원자가가 하나 더 높은 핵의 이름으로는 넵투늄이 제격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우라늄보다 더 무거운 핵이 역사상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발견을 <피지컬 리뷰>에 논문으로 실었다. 그러나 이 논문이 출판되자마자 채드윅은 영국대사관의 외교문서를 통해 로런스를 꾸짖는 편지를 보냈다.
“어니스트, 맥밀런과 애벌슨이 쓴 논문이 자칫하면 나치를 이롭게 할 수 있다는 것,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채드윅의 걱정은 유럽에 있는 물리학자들의 생각을 대변했다. 하루하루 나치 독일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유럽에 비해서 미국은 전쟁으로부터 한발 벗어나 있었다. 그날 이후 <피지컬 리뷰>에 투고된 핵반응에 관한 논문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출판을 미뤄두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기공학자이자 카네기연구소 소장이었던 버니바 부시(Vannevar Bush)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1940년 여름부터 국가방위 연구위원회(National Defense Research Committee)를 가동하였다. 부시는 전권을 위임받아 수천 명의 과학자를 전쟁에 필요한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영국 정부는 콕크로프트를 미국으로 보내 레이더 연구가 가장 시급함을 알렸다. 부시는 콕크로프트의 주장이 옳다고 여겨서 레이더 연구를 국가방위 연구위원회에서 해야 할 가장 높은 우선순위에 두었다. 그는 매사추세츠공대에 레이더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방사 연구소를 세우며 로체스터대학교 있던 물리학자 리 듀브리지(Lee A. DuBridge)를 소장으로 임명했다. 넵투늄을 발견한 맥밀런도 레이더를 연구하도록 매사추세츠공대로 불려 갔다. 맥밀런은 넵투늄에 이어 그보다 원자가가 더 큰 인공 원자핵을 찾는 연구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넵투늄보다 원자질량이 더 큰 핵을 찾는 일은 버클리 방사 연구소에 있는 화학자 글렌 시보그(Glenn S. Seaborg)가 이어받았다. 시보그와 그의 동료들은 넵투늄이 찾은 지 6개월 만에 사이클로트론을 이용해서 원자가 94인 원소를 찾아내었다. 찾는 과정은 넵투늄을 찾을 때와 같았다. 우라늄 238에 중양자를 쏴주면, 우라늄은 중양자에 있는 중성자 하나를 먹은 뒤, 우라늄 239가 되고 베타붕괴를 한다. 그러면 넵투늄이 태어나는데, 이 넵투늄은 반감기가 이틀 조금 넘었다. 넵투늄은 다시 베타붕괴를 하면서 플루토늄으로 바뀐다. 이 플루토늄 239는 원자가가 넵투늄보다 높은 94였다. 화학자였던 시보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새로 발견한 원자번호 94인 원자의 성질을 화학적으로 분석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 원소가 새로운 물질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시보그는 동료들과 함께 <피지컬 리뷰>에 1941년 1월에 원자가 94인 물질을 발견했다는 논문을 투고하고, 5월에 또 한 편의 논문을 투고하였다. 그러나 전쟁 중이라 두 논문 모두 전쟁이 끝난 뒤인 1946년에야 논문으로 출판된다. 이 두 번째 논문에는 새로 발견한 원자가 94인 물질이 우라늄 235보다 핵분열을 훨씬 잘한다는 결과가 적혀 있었다. 이 사실은 훗날 나가사키에 떨어지게 되는 원자폭탄의 주재료로 이 원소가 쓰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원자가 94인 원소의 이름도 케머가 플루토늄(Plutonium) 239라고 지어주었다. 넵투늄이 우라늄에 이어 해왕성에서 그 이름을 따왔듯이 플루토늄은 해왕성의 다음 행성인 명왕성(Pluto)에서 빌려왔다. 명왕성은 이제 태양계의 행성에서 빠져버렸지만, 플루토늄은 여전히 주기율표에서 넵투늄이 있는 자리 바로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다.
1941년 12월 7일, 미국 정부는 진주만이 일본의 공격을 받자, 자원을 총동원해서 원자폭탄을 개발하려는 계획을 본격적으로 가동하였다. 진주만이 공습받기 하루 전날, 원자폭탄 개발을 담당하고 있던 국가방위 연구위원회 소속의 S-1 부서에서는 기체확산법을 이용해서 우라늄 238에서 우라늄 235를 추출하는 방법과 전자석을 이용해서 추출하는 방법을 이용하기로 했다. 기체확산법은 시카고대학에 있는 물리학자 컴프턴과 중수소를 발견한 화학자 유리가 맡기로 했고, 전자석을 이용하는 방법은 로런스에게 돌아갔다. 원자폭탄을 제작하는 팀은 컴프턴이 꾸리기로 했다. 버클리 방사 연구소 연구원들은 그날 이미 사이클로트론을 써서 극미량의 우라늄 235를 추출할 수 있었다. 로런스는 버클리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탈 때 그 소식을 들었다.
우라늄 235의 추출
진주만이 공습당한 지 2주 만에 원자폭탄 제작을 책임지고 있는 S-1 위원회가 워싱턴에서 다시 열렸다. 원자폭탄을 만들려면, 중성자를 받았을 때 핵분열을 잘하는 물질이 필요했다. 우라늄 238은 우라늄 235보다 훨씬 더 많았지만, 핵분열을 시키기 힘들었다. 그보다는 우라늄 235가 훨씬 핵분열을 잘했다. 그러나 자연에 존재하는 우라늄 중에서 우라늄 235는 기껏해야 1퍼센트도 채 되지 않았다. 원자폭탄을 만들려면, 무엇보다도 우라늄 235를 가능한 한 빨리 농축해야만 했다. 시보그가 발견한 플루토늄 239도 있었지만, 그때만 해도 아직 원자로가 없을 때라 플루토늄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라늄 238에서 우라늄 235부터 먼저 추출해서 농축시키는 일이 시급했다.
로런스는 위원들에게 버클리에서는 이미 사이클로트론을 이용해서 미량의 우라늄 235를 얻어냈다고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1.52m와 4.67m 크기의 사이클로트론을 만들려고 제작한 전자석 칼루트론을 이용하면, 훨씬 빨리 우라늄 235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칼루트론은 무게가 4,500톤이나 되었다. 그렇게 로런스는 우라늄 235를 추출하는 연구에 쓸 수 있는 연구비 사십만 달러를 받아냈다. 컴프턴은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연구하는 일을 책임졌다. 그리고 컬럼비아대학에서 원자로를 개발하는 데 힘을 쏟고 있는 페르미의 연구를 관리하는 일도 맡았다.
로런스는 플루토늄과 핵분열과 관련된 연구도 자신이 책임지고 싶었다. 결국, 이 일로 이듬해 1월에 로런스는 컴프턴과 심하게 다퉜다. 로런스는 이 모든 연구를 버클리로 가져가고 싶었다. 그러나 컴프턴은 이미 시카고에서 유리와 같이 우라늄 235를 추출하는 또 다른 방법에 집중하고 있었고, 컬럼비아대학교에 있는 페르미를 시카고로 데리고 오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로런스는 컴프턴을 도발했다.
“지금 시카고대학교의 연구 속도로 봐서는 원자로를 이용해서 연쇄반응 결과를 얻는 데까지 일 년도 훨씬 넘게 걸릴 겁니다.”
그러자 컴프턴이 맞받아쳤다.
“천만에 올해 말까지 연쇄반응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그러자 로런스가 되받아쳤다.
“난 당신이 일 년 안에 성공하지 못한다는 데 천 달러를 걸겠습니다.”
로런스와 가까운 동료였던 루이즈 앨버레즈(Lous Alvarez)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두 사람의 설전을 지켜만 보았다. 앨버레즈의 중재로 결국, 두 사람은 5센트짜리 시가 하나를 거는 내기를 하기로 하고 말싸움을 그쳤다. 그러나 로런스는 페르미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페르미는 컬럼비아대학에서 시카고대학으로 옮긴 뒤 1년도 채 안 되어서 역사상 처음으로 시카고 파일-1(Chicago Pile-1)이라고 불리는 원자로를 가동하는 데 성공했다. 드디어 플루토늄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5와 49
1942년 9월부터 원자폭탄을 제작하는 맨해튼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가동되었다. 책임자는 레슬리 그로브스 대령이었다. 그는 국방부 건물인 펜타콘을 짓는 일에 관여했던 전형적인 관리형 군인이었다. 그리고 그로브스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맡으면서 준장으로 승진하였다. 세 곳에 대형 연구소가 먼저 세워졌다. 테네시 오크리지와 워싱턴 근처 컬럼비아강 옆 핸퍼드에 연구소가 세워졌다. 그리고 뉴멕시코에 있는 로스앨러모스에는 원자폭탄을 제조하는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그로브스 준장은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서 원자폭탄을 제작하는 전 과정을 감독하도록 이론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에게 책임을 맡겼다. 그는 원자폭탄을 만드는 책임자로 로런스를 선택할 생각도 해봤지만, 그가 보기에 로런스는 그저 열심히 연구하는 물리학자였지만,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이 만들어지는 전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천재 이론물리학자였다. 그로브스 준장의 선택은 옳았다. 오펜하이머는 자기가 맡은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원자폭탄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그 일에 참여하는 과학자들은 우라늄 235와 플루토늄 239를 코드명으로 불렀다. 우라늄 235는 25, 플루토늄 239는 49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이 비밀 코드명으로만 두 원소를 불러야만 했다.
오크리지 연구소 내에는 Y-12라고 부르는 극비 부서가 만들어졌다. 이곳에서는 우라늄 238에서 우라늄 235를 추출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칼루트론은 원래 사이클로트론에 쓰려고 만들어 둔 전자석이었지만, 전쟁 중에는 우라늄 235를 추출하는 질량분석기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Y-12 부서에서는 버클리에서 개발한 칼루트론과 똑같이 생긴 전자석을 500대나 제작해서 가동했다. 이 칼루트론을 조작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자였다. 전쟁 중이라서 남자들이 부족했던 터라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자들을 고용해서 칼루트론을 조작하게 했다. 이들에게는 “칼루트론 소녀”라는 명칭이 붙었는데, 재미있게도 물리학자들보다 이 칼루트론의 소녀들이 훨씬 잘 다뤘다. 그렇게 우라늄 235는 조금씩 추출되어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 충분할 정도로 쌓여갔다.
농축된 우라늄과 플루토늄은 로스앨러모스 연구소로 옮겨졌다. 그리고 두 개의 원자폭탄이 만들어졌다. 로버트 서버(Robert Serber)는 우라늄폭탄에는 “작은 소년(Little Boy)”, 플루토늄폭탄에는 그 생김새를 따라 “팻 맨(Fat Man)”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작은 소년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를 한 줌의 재로 바꿔 버렸고, 그로부터 사흘 후 뚱뚱이는 나가사키를 흔적도 없이 파괴했다.
러더퍼드는 물리학자들이 핵에서 에너지를 꺼내 쓸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훨씬 전에 이런 말을 했다.
“물론 과학의 진보 중 일부가 때때로 부도덕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건 사실이지만 이는 과학자의 잘못이 아니라 과학의 매춘을 통제하지 못하는 공동체의 잘못입니다. 과학자들이 자신의 발견이 잘못 사용되는 것을 통제하는 데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상력이 아무리 뛰어난 과학자라도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발견이 끼칠 궁극적인 영향력을 예측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그러나 러더퍼드 말처럼 단순히 사회가 과학자들을 통제하지 못해서 원자폭탄이 만들어진 건 아니었다. 과학자 중에서도 공포를 이용해 자신의 연구 목적을 이루려던 사람들도 있었다. 많은 과학자가 핵물리학에서 발견한 자연의 법칙이 인류를 송두리째 멸절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했지만, 어떤 과학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원자폭탄을 넘어 수소폭탄을 개발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단 몇 발만으로도 지구를 멸망에 이르게 할 폭탄이었지만, 그런 파괴적인 무기를 만들기 위해 거침없이 자기 뜻을 펼친 물리학자들이 있었다. 로런스도 그런 물리학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관심은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오직 더 큰 가속기, 더 큰 연구소에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로런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라는 연구소 이름에 붙어 영원히 남게 되었다. 이 연구소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무기를 생산하는 연구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