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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Ch Kim 김현철 Aug 08. 2022

캐번디시-빈 전쟁 4

반전

빈의 상황은 이렇게 어수선했지만 1927년 12월 7일에 채드윅은 아내와 함께 빈에 도착했다. 그는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밖으로 나왔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라듐 연구소로 향해 걸어가면서 마음속으로 전의를 다졌다. 이번에는 두 그룹 사이의 불일치를 반드시 해결해야만 했다. 라듐 연구소는 호텔에서부터 걸어서 십 분 거리에 있었다. 연구소에 도착하자 소장인 마이어가 반갑게 그를 맞았다. 채드윅은 우선 마이어에게 좋은 소식부터 전했다. 마이어가 러더퍼드에게 부탁했던 라듐이 곧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그야말로 마이어에게는 기쁜 소식이었다. 오늘날 돈으로 환산하면, 러더퍼드가 라듐 연구소에 보내기로 한 라듐의 가격은 3억 원이 넘었다. 러더퍼드는 자신이 어려웠을 때 도와줬던 마이어를 잊지 않았다.


라듐 연구소에서의 첫날은 채드윅에게 별 소득 없이 지나갔다. 그곳에 있는 물리학자들을 만나 이야기는 나눴지만, 아직 공격의 칼날을 날카롭게 세울 만한 기회가 없었다. 다음날인 12월 8일은 성탄절 전에 있는 중요한 휴일이었다. 그날은 성모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한 걸 기리는 날이었다. 이날부터 크리스마스까지 성탄절 시장이 열렸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거리마다 한껏 무르익어 가는 날이기도 했다. 12월 9일이 되어서야 채드윅은 페테르손을 만나 제대로 된 토론을 시작할 수 있었다. 토론은 바로 뜨겁게 달궈졌다. 두 사람 사이에 날 선 공방이 오고 갔다. 두 사람의 목소리는 연구실 바깥까지 크게 들릴 정도였다. 채드윅은 이곳에서 자신이 직접 실험하고 싶다는 의향을 페테르손에게 전했다. 물론 페테르손은 그 요청을 거절했다. 채드윅은 자신의 방문이 허사로 돌아갈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12월 12일이 되어서야 채드윅은 실험해도 좋다는 허락을 겨우 받아낼 수 있었다.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실험은 폴로늄에서 나오는 알파 입자를 탄소에 충돌시켜 탄소가 다른 핵으로 변하는지 확인하는 실험이었다. 러더퍼드와 채드윅의 실험에서 탄소는 가벼운 핵임에도 불구하고 알파 입자를 때려도 양성자가 튀어나오지 않은 핵이었다. 반면에 페테르손과 키르시의 실험에서는 탄소도 핵변환을 한다는 게 결론이었다. 만약에 채드윅이 캐번디시에서 한 실험에서처럼 여기서도 탄소는 핵변환을 하지 않는다는 걸 보이기만 하면, 상황은 급반전될 터였다. 페테르손은 명절을 맞아 빈을 방문한 가족들을 챙기느라 연구소에 없었다. 그가 연구소에 없다는 사실은 채드윅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실험을 준비하면서 채드윅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라듐 연구소에서 실험을 직접 하는 사람은 페테르손도 키르시도 아니고 세 명의 여성 물리학자들이었다. 세 사람의 이름은 엘리자벳 카라-미하일로바, 엘리자벳 로나, 마리에타 블라우였다. 카라-미하일로바는 황화아연 형광판에 일가견이 있는 학자였고, 나중에 불가리아에서 첫 번째 여성 교수가 되었다. 로나는 “폴로늄 여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폴로늄 전문가였다. 훗날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오크리지 연구소와 관련 있는 대학의 연구원이 되었다. 그리고 블라우는 사진 건판을 개발해서 훗날 세실 파월이 파이온을 발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뛰어난 실험 물리학자였다. 그들은 이렇게 잘 훈련받은 과학자들이었지만, 채드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 번은 라듐 연구소에서는 왜 여자들만 측정하는지 페테르손이 그 이유를 설명했다. 

“남자들은 실험하다가 금방 지루해져서 형광판에서 이는 불꽃을 제대로 측정하지 못하지만, 여자들은 지치지 않고 불꽃을 관찰할 수 있어요.”

이유야 어찌 되었든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러더퍼드와 채드윅이 직접 실험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실험을 하기 전에 채드윅과 세 명의 여성 물리학자들은 어둠에 익숙해지려고 함께 암실에 들어갔다. 암실 안은 정적에 잠겼다. 채드윅이 만지작거리는 열쇠뭉치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함께 들어간 로나는 계속되는 침묵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채드윅이 자기들을 무시하는 것 같은 인상도 받았다. 그녀는 채드윅이 내내 굳은 얼굴로 여성 연구원들을 대했던 걸 떠올렸다. 


암실 밖으로 나온 채드윅은 황화아연 형광판에 알파 입자를 흡수하는 판의 두께를 바꿔가며 알파 입자가 얼마나 투과하는지 확인했다. 그 외에도 여성 연구원들에게 몇 가지를 더 확인시켰다. 실험 장치는 잘 작동하였다. 그러나 폴로늄에서 나오는 알파 입자를 탄소에 충돌시켜도 거기서 양성자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형광판에 이는 불꽃이 알파 입자 때문인지 양성자 때문인지 구분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채드윅은 혹시 실험을 오후 늦게 해서 측정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니 다음 날 아침에 실험을 계속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결과는 전날 실험에서 얻은 것과 똑같았다. 탄소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세 명의 여성 물리학자들은 당황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던 걸까. 세 사람이 실험했을 때는 분명히 탄소에서 나오는 양성자를 측정하였는데, 채드윅과 함께한 실험에서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채드윅은 세 사람이 실험 결과를 속였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아마도 세 사람이 보고 싶은 것만 본 것인지도 몰랐다. 페테르손과 키르시가 어떤 결과를 원하는지 알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세 사람은 실험하면서 이미 편향되어 있었다는 게 가장 적절한 설명일 것이다.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한 번씩 일어난다. 실험하면서 결과를 미리 추측하거나 예상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편향 없이 실험하는 걸 암맹 실험(blind experiment)라고 한다. 모든 실험은 암맹 실험이어야만 했다. 라듐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이미 선입견으로 편향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이 실험 결과가 몰고 온 후폭풍은 대단했다. 지금까지 페테르손과 키르시가 주장했던 모든 걸 무위로 돌리는 결과였다. 이 결과에 페테르손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그로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골리앗에게 도전한 다윗의 처절한 패배였다. 넘어서야 할 산은 여전히 자신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캐번디시와 빈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의 끝이 보였다. 다음 날 아침, 라듐 연구소 소장 마이어는 채드윅에게 실험 결과를 전해 들었다. 온화한 마이어마저 엄청나게 화를 냈다. 결국, 마이어는 러더퍼드에게 빈 라듐 연구소와 캐번디시 사이에 있었던 불일치를 우호적으로 해결했으면 바란다고 편지를 썼다. 이건 그냥 덮을 일이 아니었다. 마이어는 두 연구소 사이에 있었던 일을 공개적으로 해결하길 바랐다. 그러나 채드윅과 러더퍼드의 생각은 달랐다. 이런 문제는 외부에 공개하는 것보다 조용히 해결하는 게 더 낫다고 여겼다. 더구나 러더퍼드는 마이어와 개인적인 친분도 깊은데, 이번 일로 친구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이 일이 공개되면, 라듐 연구소의 명성이 땅에 떨어지는 건 자명해 보였다. 그러나 과학에서 일어난 일을 그저 덮어두는 건 온당한 처사가 아니었다. 


비록 채드윅과 러더퍼드가 페테르손과 키르시가 얻었던 잘못된 결과를 그냥 덮어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지만, 이런 일을 비밀에 부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채드윅과 러더퍼드가 라듐 연구소의 젊은 친구들에 대해 앙금을 다 털어버리지도 않았다. 1928년 7월 23일에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방사선 국제 학술대회가 열렸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처음 열린 국제학회였다. 그래서 독일, 프랑스, 소련, 캐나다, 오스트리아에 있는 저명한 물리학자들이 대거 참가했지만, 라듐 연구소에 있는 학자 중에서 이 학회에 초대받은 사람은 없었다. 러더퍼드와 채드윅에게 페테르손과 키르시에 대한 앙금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학회가 열리는 동안 라듐 연구소에서 측정을 잘못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라듐 연구소의 명성은 서서히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차라리 라듐 연구소의 실험 결과가 틀렸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지금까지 출판된 논문을 철회했더라면, 상황이 훨씬 나았을는지도 모른다. 페테르손과 키르시는 곤란에 처했을지 몰라도 적어도 라듐 연구소는 학문적인 진지함을 올곧게 세웠다는 평을 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일로 가장 크게 타격을 입은 사람은 페테르손이었다. 러더퍼드에게 용감하게 도전장을 던졌지만, 설익고 잘못된 결과를 발표하면서 날을 세웠던 공격은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무모한 도전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 일로 학문적 명성은 고사하고 신중하지 못하다는 악평을 들어야만 했다. 게다가 록펠러 재단에서 주는 연구비가 끊기면서 더는 빈에 머물 수 없어 스웨덴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페테르손이 스웨덴으로 돌아가면서 라듐 연구소도 큰 곤란에 처했다. 페테르손이 가져온 연구비 덕에 여성 물리학자들은 돈 걱정하지 않고 실험에 집중할 수 있었지만, 그가 떠나면서 더는 임금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논문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지만, 그에 대한 소문은 암암리에 퍼져나갔다. 스웨덴으로 돌아간 페테르손은 스톡홀름 대학교에 새로 생긴 교수 자리에 지원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화학자이자 해양학자였던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예테보리 대학교의 해양학 교수가 될 수 있었지만, 그가 타격을 입은 것만은 분명했다. 젊은 페테르손의 도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가속기와 검출기

캐번디시-빈 전쟁은 두 가지 숙제를 남겼다. 새로운 기술이 필요했다. 맨눈으로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황화아연 형광판에 이는 불꽃을 세는 건, 정확한 결과를 얻는 데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형광판에 이는 불꽃의 세기에 따라 거기에 충돌한 입자가 양성자인지 알파 입자인지 구분해 내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극도로 숙련된 실험 물리학자가 아닌 이상,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좀 더 새로운 검출기가 필요했다. 러더퍼드도 황화아연 형광판으로 양성자나 알파 입자를 측정하는 방법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으리라. 1912년에 이미 안개상자가 세상에 나왔고, 1928년에는 가이거-뮐러 계수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캐번디시-빈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은 진공관을 이용해서 입자들을 더 정확하게 검출해내기 시작했다. 누가 측정하더라도 결과가 크게 달라질 일이 없어야 했다. 


방사성 물질에서 나오는 알파 입자는 핵변환 실험을 마음껏 하기에는 에너지가 부족했다. 양성자나 알파 입자를 좀 더 높은 에너지로 가속할 수 있는 장치인 가속기가 필요했다. 캐번디시-빈 전쟁이 끝난 지 5년 이 지난 1932년,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그리고 미국 버클리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가속기가 만들어진다. 이 가속기는 핵물리학과 입자물리학의 지평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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