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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Ch Kim 김현철 Aug 03. 2022

캐번디시-빈 전쟁 3

전쟁의 서막 

빈 라듐 연구소에는 외국에서 온 방문 연구자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한스 페테르손이라는 스웨덴 물리학자가 있었다. 스톡홀름에서 박사학위를 한 그는 스웨덴 예테보리 대학교의 강사였다. 1921년 페테르손은 해양학에 깊은 관심이 있는 모나코의 왕자 알베르 1세의 초청을 받아 지중해 해저의 라듐을 측정하고 있었다. 1922년 2월, 그는 자신의 실험을 좀 더 정교하게 하고 싶어서 마이어의 허락을 받아 빈 라듐 연구소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게르하르트 키르시와 공동 연구를 시작했다. 키르시는 오스트리아가 나치에 병합될 때 빈 라듐 연구소를 휘어잡은 나치 삼인방의 한 사람으로 기억될 인물이었다. 페테르손은 진취적이었고 야망이 넘치는 젊은 물리학자였다. 게다가 연구비를 끌어오는 데도 남다른 면이 있었다. 1925년 말, 록펠러 재단에서 주는 연구비를 받아 1926년부터 1927년까지 빈 라듐 연구소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소장이었던 마이어도 연구할 돈이 없어 쩔쩔매고 있었는데, 페테르손이 가져온 연구비는 가뭄의 단비 같은 것이었다. 페테르손은 그 당시 물리학계를 뜨겁게 달군 인공 핵변환에 관심이 생겼다. 라듐 연구소를 방문하는 동안 키르시와 함께 러더퍼드와 채드윅이 했던 실험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건 단순히 학문적 관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명해지려면, 가장 유명한 사람을 과녁으로 삼을 필요가 있었다. 페테르손에게 러더퍼드는 유명한 물리학자가 되기 위해서 넘어야 할 첫 번째 산이었다.      

한스 페테르손

1923년, 페테르손과 키르시는 러더퍼드와 채드윅을 향하여 포문을 열었다. 1923년 9월 15일, 네이처에 실은 두 사람의 논문은 캐번디시-빈 전쟁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두 사람의 장비는 러더퍼드와 채드윅이 제작한 것과 사뭇 달랐다. 알파 입자의 원천은 러더퍼드가 썼던 것과 같은 라듐-C, 바로 비스무트 214였고, 거기에 더해 얇은 관에는 라돈-222를 채워 넣었다. 라돈도 비스무트와 마찬가지로 알파 입자를 내놓았다. 페테르손과 키르시가 한 실험에서는 러더퍼드와 채드윅이 얻은 결과와는 달리 알파 입자와 충돌한 규소에서도 양성자가 튀어나왔다. 그뿐만 아니었다. 베릴륨에서도 마그네슘에서도 리튬에서도 양성자가 튀어나왔다. 이 결과는 러더퍼드와 채드윅이 1922년에 구한 결과와 완전히 어긋났다. 물론 리튬의 경우에는 결과가 불분명하다는 말을 덧붙였지만, 페테르손과 키르시의 결과는 캐번디시 연구소에 던진 도전장이자 선전포고였다.      

곧바로 캐번디시 연구소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재미있게도 반격을 가한 사람은 러더퍼드도 채드윅도 아니었다. 러더퍼드의 학생이었던 레슬리 베이츠와 제이 스탠리 로저스는 페테르손과 키르시의 결과를 반박하는 논문을 네이처에 투고하였다. 베이츠와 로저스는 빈 라듐 연구소의 사람들이 관측한 것은 양성자가 아니라 비스무트 214에서 나오는 알파 입자였을 거라고 주장하였다. 페테르손은 두 사람의 주장은 말이 안 되는 소리라며 일축했다. 물론 러더퍼드는 자기 학생이 주장한 게 옳다고 여겼다. 베이츠와 로저스는 그해 12월 5일에 왕립학회지에 페테르손과 키르시의 결과를 반박할 수 있는 실험 결과를 투고하였다. 두 사람의 주장은 비스무트 214에서 나온 알파 입자가 형광판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논문에서 페테르손과 키르시의 논문을 직접 인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격의 칼날이 무뎌져 보일 수도 있었지만 두 사람이 빈 그룹의 논문을 인용하지 않았던 건 어쩌면 의도적으로 페테르손과 키르시의 결과를 무시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페테르손의 부인이 반격에 나섰다. 다그마 벤델-페테르손(Dagmar Wendel-Petersson)은 화학자였고, 틈이 날 때마다 남편의 실험을 도왔다. 그녀는 이듬해 5월 3일, 네이처에 출판한 논문에서 좀 더 정교하게 실험해보면 비스무트 214에서 나오는 알파 입자는 형광판에 도달할 정도로 충분한 거리를 날아가지 못한다며 베이츠와 로저스의 결과를 반박했다. 양측은 8개월 동안 공방을 계속했다. 이 싸움은 마치 어른 싸움이 아이들 싸움으로 번진 것처럼 보였다.    

 

캐번디시-빈 전쟁

1923년 11월 8일 런던 물리학회지에 투고한 논문에서 페테르손은 러더퍼드로 향한 공격의 수위를 최고조로 올렸다. 이건 마치 캐번디시를 다연장로켓으로 포격하는 것에 비교할 만했다. 그것은 전방위 공격이었다. 그는 러더퍼드의 위성 모형에 대해 맹공을 퍼부었다. 그 모형보다는 자신이 세운 폭발 가설(explosion hypothesis)이 훨씬 낫다고 주장했다. 위성 모형의 설명과는 달리 핵변환은 가벼운 원자핵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원자핵에서 일어난다는 것이 페테르손의 폭발 가설이었다. 그의 가설은 러더퍼드의 위성 모형보다 단순했고, 더 직관적이었다. 러더퍼드 역시 페테르손의 공격에도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세운 원자핵의 위성 모형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는 이미 여러 곳에서 자신의 가설을 강의하였다. 그러나 페테르손과 키르시의 공격에 답을 내놓아야만 했다. 그는 채드윅과 함께 좀 더 치밀하게 실험하기로 마음먹었다. 

러더퍼드와 채드윅은 좀 더 정밀한 현미경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빛을 좀 더 잘 볼 수 있도록 형광판도 더 민감하고 크게 만들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알파 입자와 충돌한 네온, 마그네슘, 실리콘, 황, 염소, 아르곤, 칼륨에서도 양성자가 튀어나왔다. 1922년에 자신들이 얻은 결론을 뒤집는 결과였다. 게다가 러더퍼드의 학생이었던 베이츠와 로저스가 주장했던 것과도 배치되는 결과였다. 러더퍼드와 채드윅의 결과가 실린 논문을 읽으며 페테르손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러더퍼드를 무너뜨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과는 페테르손과 키르시의 해석이 틀렸음을 암시하는 부분도 있었다. 페테르손과 키르시는 비행거리가 9.3cm인 입자는 과녁에서 튀어나오는 양성자라고 가정했다. 그건 틀린 가정이었다.      

러더퍼드는 페테르손과 키르시의 결과를 여전히 믿지 않았다. 1924년 7월, 페테르손이 닐스 보어를 만나려 코펜하겐에 다녀갔다는 소식에 짜증이 치밀었다. 그래서 서둘러 보어에게 편지를 보냈다. 보어가 두 사람의 결과에 영향을 받는 것에 신경이 쓰였다. 편지에서 러더퍼드는 이렇게 썼다.

“페테르손이 똑똑한 친구임에는 분명하지만, 되지도 않는 걸 붙잡는 능력은 한마디로 끔찍해. 페테르손과 키르시가 출판한 논문은 대부분 틀렸어.”

페테르손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계속해서 비슷한 결과를 출판했다. 캐번디시와 빈의 갈등은 점점 더 증폭되어 갔다. 러더퍼드의 위성 모형과 페테르손의 폭발 모형, 둘 중 어느 것이 올바른 모형이었을까?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드러나겠지만 두 모형 다 원자핵을 설명하는 모형으로는 올바르지 않았다.      

캐번디시와 빈 사이의 놓인 갈등의 골이 점점 더 깊어지던 1925년, 러더퍼드는 영국 정부로부터 남작 지위를 받았다. 러더퍼드는 이제 러더퍼드 경이라고 불렸다. 캐번디시와 빈 사이의 전쟁에서 빈 그룹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페테르손과 키르시는 계속해서 러더퍼드와 채드윅의 결과와 다른 논문을 출판했다. 페테르손은 러더퍼드의 위성 모형에 대한 공격을 이어갔다. 러더퍼드와 채드윅은 1924년에 탄소에서는 양성자가 튀어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페테르손과 키르시는 두 사람의 주장을 뒤엎었다. 양성자는 탄소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페테르손은 한술 더 떴다. 폭발 모형에서 일관되게 보여주듯이 알파 입자는 핵 안으로 침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핵 안에 부착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각주까지 달아 러더퍼드도 이제 이런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가 어떤 실험에 근거해서 그렇게 받아들이는지 모르겠지만”이라는 말까지 했다. 러더퍼드 입장에서는 조롱으로도 들릴 말이었다. 페테르손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캐번디시 연구소와 라듐 연구소 사이의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고 있을 때, 러더퍼드의 제자였던 패트릭 블래킷은 알파 입자와 질소 핵이 충동한 다음에 무엇으로 바뀌었는지 윌슨의 안개상자를 이용하여 보여주었다. 알파 입자와 충돌한 질소 핵은 알파 입자와 합쳐지면서 양성자 하나를 내놓고 수소 핵의 동위원소로 바뀌었다. 자연에 존재하는 산소의 핵은 대부분 양성자 여덟 개와 중성자 여덟 개로 이뤄져 있다. 그런데 산소 중에서 아주 미량은 양성자가 여덟 개, 중성자가 아홉 개로 되어있는 산소 핵을 지니고 있다. 블래킷이 발견한 것이 바로 산소 핵의 이 동위원소였다. 러더퍼드가 처음 추측했던 것과는 달랐다. 흥미로운 건 블래킷에 실험에 대해서는 러더퍼드도 페테르손도 이견이 없었다.      

1925년 여름, 러더퍼드가 부인과 함께 뉴질랜드로 휴가 가 있는 동안에도 페테르손은 쉬지 않고 러더퍼드와 채드윅을 비판하는 논문을 출판했다. 드디어 채드윅은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뉴질랜드에 있는 러더퍼드에게 분노에 찬 편지를 보냈다. “논문은 키르시 이름으로 나왔지만, 논문에서 페테르손의 뻔뻔함이 드러난다며 키르시와 페테르손 중에서 누가 대장인지 모르겠지만, 이끼와 벼룩 사이의 순서를 정하는 건 의미 없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모든 연구가 그렇듯이 연구가 동력을 얻으면 관성이 점점 커지고 중간에 멈추는 건 쉽지 않았다. 이제 키르시와 페테르손 논문뿐만 아니라, 빈 라듐 연구소에 있는 다른 연구원들의 논문도 속속 출판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1925년 7월에는 키르시와 페테르손이 제법 두툼한 <원자 붕괴>에 관한 책도 출판하였다. 드디어 그 이듬해에 두 사람은 핵변환에 관한 한 러더퍼드와 채드윅의 맞수로 자리매김할 정도까지 이르렀다. 더구나 주로 독일어로 써진 라듐 연구소의 논문은 유럽 대륙에서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었다. 페테르손이 처음 의도했던 바가 먹혀들어 가고 있었다.     

러더퍼드와 채드윅은 이 상황이 더는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걸 알았다. 3년 동안 두 연구소에서 나오는 결과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건 학문적으로도 심각한 문제였다. 캐번디시 연구소에서는 여전히 가벼운 핵에서만 핵변환이 일어나는 걸 관측했고, 라듐 연구소에서는 실험하는 족족 핵변환이 일어났다. 말하자면 핵의 가볍고 무거운 것과는 상관없이 핵 대부분이 알파 입자와 충돌하면, 양성자를 내놓는 것이었다. 도대체 누구의 실험이 옳고 누구의 실험이 틀린 것인가! 똑같은 과녁과 비슷한 실험 장치와 검출기를 사용한 실험 결과가 똑같을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비슷한 구석이라도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 두 실험 그룹의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건 두 그룹 중 하나는 틀렸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누가 틀렸을까?  

제임스 채드윅. 중성자를 발견한 공로로 1935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

    

러더퍼드는 황화아연 형광판을 현미경으로 측정해서 불꽃을 세는 실험에 관한 한, 오랜 경험을 축적한 노련한 실험 물리학자였다. 빈 연구소에서 사용하는 방법조차도 결국은 러더퍼드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러더퍼드와 채드윅은 실험 방법을 되짚어갔다. 형광판에서 이는 불꽃을 잘 관측하려면, 무엇보다 현미경의 배율이 높아야만 했다. 두 사람은 훨씬 좋은 현미경을 써 봐도 자신들이 얻은 실험 결과를 뒤집을 수 없었다. 비스무트 214도 황화아연 형광판도 현미경도 캐번디시에서 쓰는 거나 빈에서 쓰는 거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실험 장비와 실험 방법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남은 건 실험하는 사람들뿐이었다. 현미경을 들여다보면서 형광판에 부딪힌 불꽃이 알파 입자 때문인지 양성자 때문인지 두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건 오롯이 관찰하는 사람의 몫이었다. 한번은 채드윅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형광판에 이는 불꽃을 정확하게 세는 데 경험이 참 많긴 하지만, 그게 알파 입자 때문인지 양성자 때문인지 완벽하게 확신한 적은 없습니다.” 

황화아연 형광판에 이는 불꽃으로 거기에 부딪힌 입자가 양성자냐 알파 입자냐 정하는 건 그야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캐번디시 연구소와 라듐 연구소의 대치 상황은 1927년 초까지 지속되었다. 극단적인 대립 상태를 해결하려면, 서로 만나서 실험 결과가 왜 그토록 다르게 나오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1927년 5월 16일, 페테르손은 예테보리에서 빈으로 가는 길에 캐번디시 연구소에 들렀다. 러더퍼드는 그를 반갑게 맞이했지만, 채드윅은 그에 대한 악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페테르손을 동료가 아니라 캐번디시 연구소를 구경하러 온 사람 취급을 했다. 그래서 자신의 실험 장비도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다. 페테르손은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여러 물리학자를 만났다. 안개상자를 발명한 윌슨, 질소가 산소의 동위원소로 바뀌는 걸 확인한 블래킷, 1922년에 노벨화학상을 받은 프랜시스 애스턴을 만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4일을 머물면서 러더퍼드와 채드윅과 함께 날 선 토론을 이어갔다. 페테르손과 두 사람 사이의 간극은 여전했다. 소득이라면 그나마 묵은 감정을 조금 털어냈다는 것이고, 서로 오해했던 부분을 조금 거둬냈다는 점뿐이었다.      

두 실험 그룹 사이의 긴장은 다시 팽팽해졌다. 그해 8월, <네이처>에 페테르손과 키르시가 쓴 책 <원자 붕괴>를 찬양하는 서평이 올라왔다. 서평을 쓴 사람은 영국 물리학자 로버트 로슨이었다. 그는 라듐 연구소 소장이었던 마이어와 각별한 관계였고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신세를 졌던 적도 있었다. 그는 서평에서 페테르손과 키르시의 결과가 러더퍼드와 채드윅이 얻은 것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지난 5년 동안 핵변환에 관한 값진 결과를 얻었고, 핵변환의 주제도 공평무사하게 다뤘다고 썼다. 페테르손과 키르시는 당연히 이 서평을 뿌듯하게 여겼지만, 러더퍼드와 채드윅의 심사는 편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 서평 때문에 두 연구소 사이의 불화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페테르손은 캐번디시 연구소를 방문하는 동안, 러더퍼드와 채드윅을 빈으로 초청했다. 러더퍼드는 너무 바빠서 빈을 방문할 짬이 나지 않았지만, 채드윅은 가고 싶었다. 빈을 방문한다는 건 그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건 그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에서 당했던 고초를 떠올리는 일이었다. 게다가 1927년 1월 30일, 극우 민병대들이 좌파 조직에 속한 사람들을 공격해서 두 명이 살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7월 5일에 두 명을 살해한 극우 민병대 대원 세 명이 무죄로 풀려나면서 좌파 민병대원들과 노동자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1927년 7월 15일, 성난 군중들이 법원에 가서 항의 시위를 벌이면서 경찰과 충돌이 생겼다. 위협을 느낀 경찰은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시위는 폭동으로 변했다. 폭동의 결과는 참혹했다. 89명이 총에 맞아 죽었고, 경찰도 다섯 명이 사망했다. 600여 명이 심하게 다쳤고, 경상자만 해도 1,000명이 넘었다. 이 사건은 1934년에 일어난 오스트리아 내전의 씨앗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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