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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바로가 Oct 29. 2024

타인은 지옥이다?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라

"지옥은 바로 타인이다"


장 폴 샤르트르는 그의 희곡, 『닫힌 방』에서 주인공 가르생을 통해 말한다. 이 말은 나에게 오랜동안 내 인생의 화두가 된 말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대학교때부터, 아니 국민학교때부터 "집단따돌림"을 당했다. 국민학교 4학년때 4학년 학생 중 가장 모범생이고 예쁘고 총명한 모 여학생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나를 계속 괴롭혔다. 같이 다니던 무리 여학생들에게 나를 경계하게 하고, 내가 글쓰기 대회에 나갔을 때 내 물건을 마음대로 가져다 쓰고, 내가 점심을 먹는데 내 밥에 김칫물을 붓기도 했다. 어린 마음에 서럽고 속상하고 무서웠는데,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선생님도 그 예쁜 모범생 여학생의 만행을 알지 못했다. 나중에 학력고사를 볼 때,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서 그 아이가 나한테 아는 채를 하자, 나는 모르는 척하며 나도 모르게 몸을 돌렸다. 중학교때는 노는 아이들의 표적이 되었다. 내 행동 중에서 무엇인가 그들을 거스르게 했는지, 노는 아이들이 나를 경계하면서 고의적으로 나를 마음에 안든다고 행동으로 표현했다. 소위 어깨빵도 시전하고, 자기들끼리 이야기 하다가 내가 지나가면 말을 멈추고 나를 노려보기도 했다. 나중에 그 무리의 리더인 친구가 중학교 3학년때는 친구가 되긴 했지만 나의 중학교 2학년 생활은 지옥이었다. 고등학교때는 다행히 무사히 넘어갔다. 그냥 재수없는 실장정도로 여기고 나를 대해줬다.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그리고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 그 때는 은따와 왕따를 경험했다. 이유인즉슨 내가 자신들을 무시하고 낮춰본다는 것이었다. 그 상황에 나를 보호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요즘 청소년이 겪는, 높은 수위의 집단 따돌림보다는 낮은 정도를 경험했다고 볼 수 있다.


  단지 어린 마음에 자신을 피해자로 의식했던 나는 우연히 들은 가르생의 외침에 주목했다. "지옥은 바로 타인이다"라는 말이 그냥 큰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랜동안 살아왔다.


  그러나 최근 여러 일들을 겪어오면서 느낀 것은 "지옥은 남에 맞추려는 내 자신이다"라는 점이다. 내가 아무리 내 자신을 뜯어 고쳐서 남들에게 맞추려고 노력하면서 살아도 그들은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바쁜 와중에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돈과 시간을 최대한 쏟았다. 그 동안은 내가 부족해서, 사회성이 부족하고 덤벙대고 잘난 체 하기 때문에 나만 바뀌면 그들이 나의 진실을 알아주리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이 나를 진심으로 좋아해 줄 수 없었다. 그런 임시방편으로 근본적인 문제까지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와 욕망에 충실하다



이 간단한 사실을 항상 잊고 살아온 것 같다.  군집 생활을 하는 동물들은 저 나름의 사정이 있다. 인간 사회는 더 복잡하다. 개개인의 욕망이 사회적 구조와 얽혀서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 근본은 항상 같다. 내 욕망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남을 판단하고 상대하는 기준은 순수하게 나의 욕망에 맞춰진다. 개인 모두 목표의 끝은 있겠지만, 욕망이 원하는 끝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나의 욕망이 다른 사람의 욕망에 걸리적 거릴 수 있다. 아마 어쩌면 내 존재 자체가 다른 사람의 욕망 앞에서는 무척 거슬릴 수도 있다. 원하는 목표가 같으면 경쟁자가 된다. 더 흥미로운 건 남이 잘되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기분이 아닌 모양이다. 아닌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의 좁은 경험에서는 내가 잘되는 것을 응원해준 사람이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젠 그것조차 원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생존의 방식인 것 같다.


  물론 마음이 어려, 남 탓을 해봤다. 최근까지도 여러 사람 탓을 해봤다. 그러나 그것은 몇 초의 위로일 뿐이다. 결국 돌아오는 것은 씁쓸한 마음이다. 남을 깎아 내려봤자 자신의 위치가 서러울 수 밖에 없다. 예전에는 실력보다 운이 좋은 사람들을 비난했지만, 그것도 그들의 능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정말 치열하게 목표를 향해 어떤 일을 열심히 했으리 라고 생각된다. 부모 잘 만나서 일수도 있고, 인맥이 좋아서 그럴 수도 있고, 그들의 숨은 노력이기도 하고, 남을 잘 견제하면서 자신을 잘 어필해서 일 수도 있고, 뜻밖의 조력자가 그들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서 일 수도 있다. 그 외에도 많은 여러가지 요소가 그들을 높이 올라가게 도와주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건 내가 잘 모르는 일이고 내가 경험한 일이 아니니 함부로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고 사회 부조리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좋든 나쁘든 그들의 목표를  향한 뚜렷한 한결같음을  놀랍다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나쁜 사람이 잘되고 있는 것을 두둔하는 것에 있지 않고 그들의 집념이 몹시 집중되어 있고 놀라울 정도로 강하다는 것이다. 성공에 관한 욕망, 명예에 관한 욕망은 내게 조금 부족한 부분이어서 그들을 지켜봤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목표에 대한 집중" 그들에게 사람은 그 다음 문제인 것 같다. 


  그들은 그들의 사정이 있다. 이제 나는 그들에 연연하고 싶지 않다. 그냥 내 자신에 집중하려고 한다. 나는 앞으로 현명하게 거절하려고 노력하려고 한다. 그 동안 나는 그냥 소위 성공한 그들의 매력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무엇이든 능숙하게 해내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뭔가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것이, 나는 그들보다 사회성이 무척 부족하고 아첨도 잘 못하고, 분위기 파악 못하고, 내 지식을 허영스럽게 뽐내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 작은 허영심은 나에게 독으로 돌아왔다. 처음엔 그들이 유목적성을 가지고 나를 회유할 때 나의 메말라 있던 인정욕구에 단비를 정성스레 내려주었다. 그때는 내 잘난 체가 그들에게 애교로 통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자신들과 대등하게 성공하지도 못한 내가 말하는 것이 몹시 맘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내가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그들의 눈을 마주보며 자신들을 지적하는 모습이 우수워보였던 것 같다. 고개를 쉽게 숙이지 않는 내가 매우 불손하고 예의없이 교만하게 굴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들에게 미천하게 보였던 내가 스스로 그들과 친구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제 생각해보니... 참으로 재수 없었겠구나 생각된다. 알게 모르게 나는 민폐를 참 많이 끼쳤구나 (자조)


  그러나 이제 나는 남을 위해 나를 바꾸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나를 바꿀 수 없다. 아무리 바꾸려해도 부자연스럽다.  아마 그들은 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 어색함과 불균형을 간파하고 불편했을 수도 있다. 열심히 흉내를 내보려한 것도 무색하게 “그냥 나는 나였구나” 생각이 든다. 물론 잘난 체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인생은 쐐기풀로 옷을 지어 백조가 된 오빠를 구해냈던 그 일화처럼 묵묵히 행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 욕망, 존재의 생존을 위해 각색하여 편리한대로 들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겨우 인간관계에서 말이 가지는 자의적인 해석에 대해 이해했다. 남 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내 주변에 의외로 선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내 마음도 혐오감, 증오심, 복수심으로 들끓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괴롭히지 않도록 내 자신을 보호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민폐를 끼치지 않고 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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