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치유성
제가 우연히 뵙게 된 양연화 시인님이
제가 쓴 글, “타인은 지옥이다?“를읽으시고 답글을 달아주셨습니다.
악인과 호인이라는 잣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사람관계의 어려움을 오히려 궁합으로 풀어 위로해 주셨습니다. 저는 계급주의적인 관점에서 개인욕망 불일치에 따른 마음앓이에 초점을 두고 글을 썼습니다.
그 글을 읽으신 양 시인님이 제가 혹시 악연이라는 말로 다시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릴 것을 염려하셔서인지 나쁜 궁합의 정의를 “싫다, 혐오한다, 증오한다”라는 자극적인 단어로 사용하지 않으시고 “밉다”라는 단어로 답해주셨습니다.
어쩌면 내 속상한 마음에 다른 세 가지 단어는 위로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아직 속상한 마음이 진행중이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용해주신 ”밉다“라는 말을 읽은 순간 마음이 편해졌어요.
항상 어르신들이 자주 사용하시는 말씀 중에 “밉상” “화상”이라는 말들이 있습니다. 그 단어들은 혐오를 조장하는 단어라기 보다는 싫은 대상과 화나게 만드는 대상을 익살스러운 존재로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속상한 마음으로 손쉽게 상대방을 싫어하고 증오할 수 있지만
“그냥 뭐 그런 놈이 다 있어?”
“어허, 그 놈 밉상일세.”
“으이구, 이놈의 화상아!”
하면서 자신의 속상하고 화난 감정을 해학적으로 만들어버립니다.상한 감정으로 인해 생긴 팽팽한 긴장감을 우스꽝스러운 단어를 사용해서 경쾌한 웃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지요.
삶의 여유가 없으니 화가 나거나 우울하거나 자칫 무기력해지기 쉽지요. 내가 하는 일에 만족하고 자부심을 갖다가도 어느새 일에 치여 작은 일에도 짜증이 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양 시인님이 답글에서, 바쁨을 핑계로 잊고 살고 있었던 제게 “밉다”라는 단어로 익살의 묘미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옛 어르신들이 쓰셨던 단어가 고급스럽지 않다고 치부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가끔 그 분들의 표현이 ”상투적이고 토속적인데” 하고 그 분들의 중요한 인생조언을 가볍게 치부할 때도 있어요.
그런데 화두처럼 던져진 ”밉다”라는 말에서 저는 예전에 어르신들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며 배려하고자 하는 그분들의 정감을 느꼈습니다.
그냥 그 놈은 나빠!
그냥 이해하지마!
원래부터 나쁜 놈이야!
라는 말로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보다 “밉다”라는 단어로 상대방이 한 말과 행동의 의도를 “사람이니까 잘못 말하고 행동”한 것이라는 뉘앙스로 완화시킵니다. 싸가지 없는 놈이라고 낙인을 찍는 것 대신, 그 놈도 언젠가 변할거라고 통 큰 마음으로 시간을 넉넉하게 줍니다. 죄가 미운거지 사람이 미운 건 아니라고 넌지시 지적합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쉽게 바뀌지는 않을 테지만, 그 단어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배려와 여유로움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고정된 감정과 태도는 없다는 삶의 철학을 배웁니다. 단어가 가진 ”감정의 가역성“! 그런 포용력과 관용을 가진 그 단어가 제 마음을 편하게 해줍니다.
제가 지금 미워하는 대상이 언제까지나 싫은 사람, 혐오하는 사람, 증오하는 사람으로 남는다면 제 마음도 같이 괴로울 것입니다.
그냥 단순하게 “아유, 이 밉상! 정말 밉네!”라고 속을 유쾌하게 내지르고
항상 나쁜 놈이겠냐? 상황이 그런거겠지!
그 동안 버티면서 너도 힘들었겠구나!
그냥 그런거지 하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싫어할 필요도 속상할 필요도 없지요. 오히려 마음의 긴장감을 완하시켜주는 말을 터트리면서 내 감정도 편하게 만들고 언제든지 상대방도 바뀔 수 있다는 여지도 남깁니다. 그것이 상대방과 나에 대한 존중이겠지요.
양 시인님의 답글은 제게 힘을 줍니다. 제 어리숙한 글을 최고의 어진 말씀으로 감싸 안아 주셨습니다.
사실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용기내서 다가간 사람은 한때 나에게 의미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내 마음에서 소홀히 대하는 것은 내 마음에 대한 배신행위입니다. 좋아했던 마음을 한순간에 증오심, 분노심, 복수심으로 끊어버리는 큰 업보를 자행하는 것 입니다. 상심하고 속상해 마음이 가는대로 원망한다면 아직 내가 마음이 어리다는 것이겠지요. 아마도 평생 이렇게 어린 마음과 싸우며 살아갈테지만, 양연화 어르신의 현답에서 삶의 지혜를 조금이나마 얻어 봅니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세심하게 배려해주신 답글,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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