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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노트 Oct 07. 2022

시큰둥해지지 않는 어른

엄마와 외식을 하겠다고 나서면 나는 긴장부터 한다. 우리 엄마는 어떤 음식을 만나든 기분 좋게 맛있다고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엄마가 직접적으로 나를 향해 타박을 하는 건 아니지만 식당과 메뉴를 정하는 사람은 주로 나이기 때문에 나는 괜히 엄마의 반응을 살피고 눈치를 본다. 아무거나 다 잘 먹는 내가 맛있어 죽겠다며 코를 박고 먹고 있을 때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그렇게 맛있니?’하며 물을 때는 이죽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빈정거리는 것 같으면서 김이 팍 샌다. 그럴 때는 나도 지지 않고 엄마를 노려보며 하나하나 다 검사하겠다는 태도로 먹지 말고 마음을 활짝 열고 먹어보라며 쏘아붙이지만 엄마는 그렇게 쉽게 바뀔 사람이 아니다. 최근에는 내가 하도 나무라니까 나를 위한다고 하는 행동이, 괜히 더 과장해서 양손 엄지를 치켜들고서는 ‘짱! 맛있어!’하는 거다. 결국 나는 포기했다. 도대체 무엇이 와야 우리 엄마를 백 퍼센트 만족시킬 수 있을까. 비단 외식뿐만이 아니다. 영화를 봐도 ‘나쁘지 않네.’, 드라마를 봐도 ‘그냥 뭐. 저냥 뭐.’. 내가 인터넷 어디선가 주워들은 감동적인 일화를 들려주면 엄마는 ‘말도 안 돼. 그짓말 같아. 꾸며낸 말 같아.’한다. 엄마는 만사 시큰둥한 사람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엄마의 비밀을 안다. 엄마는 고등학생 때 식빵 한 줄을 앉은자리에서 다 먹고, 5개 들이 라면을 한꺼번에 끓여서 먹던 사람이다. 당시에 살림을 도맡았던 외숙모 말씀에 의하면 식구들 먹을 밑반찬을 몇 가지 해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다음날 아침에 먹으려고 하면 모두 사라져 있었다고 한다. 음식뿐만이 아니다. 글도 아직 못 뗀 아주 어릴 적 내가 좋아하던 동화 Top 2는 <혹부리 영감>과 <플란더스의 개>였는데,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임에도 매일 책을 꺼내와 엄마에게 읽어달라고 하곤 했다. 그중 <플란더스의 개>는 내가 엄마에게 읽어달라고 하면 엄마는 열 번이면 열 번 모두 눈물을 흘리며 읽어주었다. 그게 신기해서 나는 책 등이 까질 정도로 <플란더스의 개>를 읽어 달라고 했다. 조금 사이코 같아 보일 수 있겠으나 엄마의 눈물은 아이들에게는 충격적인 광경이지 않나.  


나는 엄마와 많은 구석이 닮았다. 어릴 때는 ‘첫째 딸은 아빠 닮는다’는 비과학적인 법칙에 아주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아빠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며 자랐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내게서 엄마가 많이 보인다. 성질 급하고 욱하고 괄괄하고 눈물 많고. 이렇게 엄마의 어린 시절을 들여다보니 거기엔 내가 많이 보인다. 곳곳의 맛집을 찾아다니는 나처럼 엄마도 맛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었고, 담담한 산문집을 읽으면서도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나처럼 엄마도 누가 울면 따라 우는 마음 여린 사람이었다. 


엄마는 왜 변했을까. 무엇이 엄마를 변하게 했을까. 이삼십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실, 이기적인 나는 나도 저렇게 나이 먹게 될까? 하는 생각부터 든다. 나는 감수성이 풍부한 내가 좋다. 쉽게 기뻐하고 쉽게 슬퍼하는 것이 가장 인간다운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엄마를 보며 나는 저렇게 나이 먹지 말아야지. 할머니가 되어서도 작은 일에 기뻐하고 감사해야지. 무던해지지 말아야지. 슬플 땐 슬퍼해야지. 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무뎌지는 내가 보인다. 술이 없이는 흥이 오르지 않아 신나기 위해 일부러 술을 마시고, 안타까운 사연을 보면서도 ‘그래, 인생은 원래 녹록지 않지….’ 하며 차갑게 치워버리는 나를 발견한다. 감정의 파고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 나는 시큰둥해지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문득 ‘감수성’이라는 단어와 ‘어른’이라는 단어는 한 문장에 쓰일 수 없는 단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내가 싼 똥을 치울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나뿐이라는 진리의 명제를 실감에, 절감에, 체감까지 하는(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왔다는 것인데, 저 명제는 곱씹을수록 무섭다. 이런 와중에 기쁘고 감사하고 슬프고 마음 아플 여유가 있겠는가. 어른이 되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면 시큰둥해지는 것도 자연의 섭리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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