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2일 낮. 눈앞에 놓여있는 시험지에는 동그라미와 빗금이 무질서하게 그려져 있었고, 나는 ‘동그라미 개수를 세어야 하나 빗금 개수를 세어야 하나’하는 고민을 잠시 했다. 국어 90, 영어 85 한국사 95 행정법 55 행정학 80, 총점 405점 평균 81점. 합격은 택도 없는 점수였다.(성적 발표 후 공개된 22년도 9급 국가직 일반행정직 합격선은 평균 91점이었다) 심장이 조금 뛰기는 했지만 크게 당황하지도 좌절하지도 않았다. 2018년부터 4년 가까이 입고 있던 공시생 신분이라는 옷을 벗을 용기가 현재 남아있는지 궁금했을 뿐.
나는 대한민국의 前 공시족, 現 공시 포기족이다. 약 4년 가까이 수험 생활을 했음에도 합격 목걸이를 목에 걸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나이 앞자리는 바뀌었고, 어느 드라마 대사처럼 나는 ‘아무것도 되지 못한’ 인간이 되어있었다. 취업지원센터 상담사 선생님은 나의 이야기를 듣고 시험이라는 게 참 늪 같다며 위로해주셨다. 최근 2년 동안 직업 훈련 경험이나 취득한 자격증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 기어가는 목소리로 ‘아니요….’, ‘없어요….’만 뱉을 수밖에 없었던 내가 안쓰러웠는지도.
나의 지난 3, 4년을 복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나의 실패를 직면해야 하면서도 자기혐오를 절제해야 하는 활동이다. 내 실패를 보면서 자기혐오를 하지 않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를 늘어놓으려는 이유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좀처럼 보이지는 않는 공시 장수생들이 어디서 어떻게 고립되어가고 있고 현재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어떠한지 알려줄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前 장수생으로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장수생은 분명히 위험한 신분이다. 미리 말하건대, 모든 장수생이 이렇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환경에 처해있다는 의미다. 수험 생활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수험생들은 열등감과 수치심으로 인간관계를 점차 축소한다. 건강하지 못한 정신으로 한정된 인간관계만을 맺다가 결국에는 사회성이 떨어져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마저 어려워진다(는 내 이야기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수험생들에 관한 속상한 뉴스 기사들도 그렇고, 그런 극단적인 사례까지는 아니더라도 육신은 멀쩡하나 정신만 곪아가는 가엾은 청년들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보아도 인력 낭비 아니겠는가.
조금 더 욕심을 내자면, 지금도 어디선가 고립 중인 그들에게 감히 용기를 선사하고 싶다. 나는 비록 공시포기족이지만 인생포기족은 아니다. 장수생들의 가장 치명적 착각, 공시 실패가 곧 인생 실패라는 이 우울하고도 견고히 자리 잡은 생각. 이 생각이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싶다. 서른 살 무경력 공시실패자인 내가 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며 비슷한 상황의 많은 이들도 조금이나마 용기를 낸다면 정말 뿌듯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