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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르미 Dec 27. 2022

6화, 단일한 이야기는 없다

우울증과 성인 ADHD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날까지 - [정신독립일기]

“누구나 여러 개의 삶을 산다. 어떤 삶들은 동시에 닥치고, 어떤 삶들은 시간을 두고 차례대로 찾아온다. 하지만 하나의 몸을 가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여러 개의 삶을 내 안에서 '납득이 되게' 하나로 구성하려 한다. 동시에 두 개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그 고민은 현재형이고, 지나고 보니 여러 개의 삶을 보내야 했던 사람에게는 과거형일 것이다. 그와 상관없이 '납득이 되게 하나로 구성하는 행위'가 바로 이야기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하려는 욕망은 하나의 몸을 가진 개인으로서 버릴 수 없는 욕망이다.” - < 타인을 듣는 시간>, (김현우, 2021), 173쪽



상상력이 풍부한 나에게 '이야기 구성력'은 내 삶을 풍요롭게 해 주지만, 때때로 내 삶을 비극으로 이끌기도 했다. 성급한 일반화일 수 있지만, 주변에 떠도는 이야기를 수집하면 모든 사람은 모순을 안고 살아간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가 아내에게 어떤 남편이었는지와 제자들에게 어떤 스승이었는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몸이 하나인 사람일지라도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개인이 분화하기도 한다. 즉 어떤 환경에서 어떤 사람들과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우리는 모두 여러 개의 삶을 살아간다.


손녀의 삶, 딸의 삶, 동생의 삶, 여자의 삶, 여성의 삶, 20대의 삶, 백수의 삶, 지방러의 삶, 블로거의 삶, 글쓴이의 삶, 성인 ADHD의 삶, 친구의 삶, 리스너의 삶 등등. 나는 여러 개의 삶을 살아간다. 그 삶 안에서도 순간에 따라 바뀌는 '사소한 삶'도 있다. 그러다 보니 '단일한 나', '일정한 나'의 모습은 매번 달성하지 못할 문제처럼 여겨진다. 때론 삶이 바뀌고, 사라지고, 생겨나고, 멀어지고, 가까워진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니 나의 '이야기 구성력'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야만 한다.


이야기는 하나의 서사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이 계속해서 변하니 이야기도 변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인물이 건강한 내면을 가졌다면, 분명 이야기를 바꾸는 과정이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어긋난 내면이라면, 그 과정 자체가 버겁고 어쩔 땐 스스로를 혐오하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분명 나는 친구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했지만, 대학생으로서의 삶에서 옳은 말을 한다는 빌미로 누군가에겐 상처가 되는 말을 해버려 악역을 맡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야 마는 것이다.


그뿐이랴,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나는 꽤나 달라서 가끔씩 떠오르는 흑역사로 아파하고 힘들어한다. 여전히 나의 어긋나는 여러 개의 삶으로 인해 나는 고통스러워한다. 단일한 서사로 이어지는 나를 버리지 못한 것이다. 우울함을 버렸다고 해서, 예전에 내가 우울했다는 이유로 했던 행동들을 잊지는 못 했다. 내가 감내해야 할 몫을 자꾸 타인에게 이전했다는 죄책감 또한 여전하다. 우울감에서 벗어났지만, 괴리감과 죄책감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이 또한 인생의 대가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지만, 속 시원하게 어딘가에 떠들어댈 명분이 없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읽게 된 <타인을 듣는 시간>이란 책에서 인상 깊은 구절을 발견하고서는, 이번 주 주간일기에는 이 내용으로 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망, 여러 개의 삶을 살아내는 하나의 개인이 납득이 될 수 있게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하려고 하는 욕망에 대해서 말이다. 그 욕망으로 인해 자꾸만 단절되고, 가까워졌다 싶으면 다시 멀어지는 여러 개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마 내 삶은 앞으로 살아갈수록 더 많은 삶으로 분화할 것이고, 생길 것이며, 그러다 사라지기도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도 할 것이다.


하나의 개인이 겪어내기엔 인생은 넓고 길다. 그 안에서 단일한 서사로 이야기를 꾀어내려는 욕망은 어디서든 실패하고야 만다. 어찌 되었든 그 욕망의 존재를, 그리고 그 욕망의 필연적 실패와 좌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욕망은 실현해야 할 대상도, 굴복시켜야 할 대상도 아니다. 욕망은 다스려야 할 대상이다. 이제까지 살아왔던 여러 개의 삶과 앞으로 살아낼 여러 개의 삶. 과거형과 현재형의 고민들이 가져오는 괴리감과 죄책감으로부터 온전한 책임과 적당한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 때로는 모순을 사랑해야 한다. 내가 겪어낼 이야기의 모순에 애써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내야 한다.


고마웠어, 미안했어. 그리고 사실 모두 사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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