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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긋 Sep 30. 2023

21.06.11 오늘의 풀무질

얼마 전, 집에서 혼자 한국 8-90년대 음악을 정주행했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기지만, 촉촉하게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잔잔한 분위기에 젖기에는 충분했다. 이상한 일이지. 기억하지도, 할수도 없는 시기를 추억하다니. 미디어에 의해 윤색된, 만들어진 이미지에 취할 뿐이더라도, 기록되고 저장된 매체들을 통해 이렇게라도 느낄 수 있다는게 감사하다고 해야하나, 어째야하나.


풀무질도 과거와 현재의 어드메 즈음에서 열려있다. 과거의 풀무질을 추억하시는 분들과, 현재의 풀무질에 매력을 느끼는 분들이 섞여있다. 나역시 과거의 풀무질을 알지 못하지만 당시 풀무질의 의미가 풀무질에 대한 애정의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때로는 어느정도는 희미해진 추억을 아쉬워하는 분들도 계시고, 풀무질에 쌓인 무거운 시간의 무게를 부담스러워 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한편으로는 풀무질의 새로운 모습을 신기해 하시는 분, 풀무질에 남아있는 추억의 흔적을 더듬으며 즐거워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풀무질이 수행하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로서의 역할을 고민한다.


풀무질에서 나의 모습을 본다. 나는 너무 자주, 지난 시간을 마르고 닳도록 곱씹고 삼킨다. 시간은 과거를 소화시킬 여유따위 주지 않는데도, 어쨌든 욕심을 부린다. 풀무질을 지키는 일도 비슷하다. 하지만 추억을 보존하는 공간으로만 존재하기에는 살아남을 수 없을 뿐더러 심지어 우리가 희망하는 우리의 모습도 아니다. 아무리 과거를 끌어안고 있어도 결국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걸 매일 되새긴다. 모든 추억을 다 끌어안고 가기에는 벅차다. 항상 끝까지 들고갈 무엇을 고르느라 고심한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지만 길은 돌고 돌더라. 내가 혜화를 벗어나고자 했지만 결국은 다시 여기 서있는 것처럼. 예전에 뛰어다니던 혜화와 지금 거니는 혜화가 다르기야 하지만 때로 그 때 그 자리와 나의 발자국이 느껴져 섬칫한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너무 달라서, 출근하는 걸음마다 남아있던 과거 위에 또 다른 지금을 겹친다. 내 길의 종착지가 혜화가 아니라면, 그래도 제대로 된 무언가는 남기고 떠나야지. 내 길의 종착지가 혜화라면, 이번에는 다른 이들이 무언가를 남기기 좋은 그릇이 되어야지. 그리고 그게 꼭 풀무질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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