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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니킴 Aug 23. 2023

6 아이와 영국에 한 달 다녀올게요.

6. 여행 계획에 관한 고찰.

  이래저래 어찌어찌 살다 보니 계획적인(?) 사람이 되어버린 나는, 극도의 치밀함으로 아이와 함께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대비, 런던에 무료 화장실은 어디 있나..? 까지 확인하던 중이었다.

  ‘엄마, 근데 런던이 어디 있어요?‘

… 음 그렇다.

난 아이에게 영국에 가자고만 했지, 런던에 대해 설명을 안 했다. (난 이렇게나 철두철미한 사람이다.)


  아이 학교에서 체험 학습 계획서를 제출하란다.

  ‘우리 영국 갈까?’

  ’ 엄마 가고 싶으면 가고요.’

  이것이 우리의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덤덤한 대화였다. 9살의 아이는 아무 계획이 없다, 엄마의 계획만 있을 뿐. 아이의 이름을 빙자한 나의 여행 계획서를 써 내려간다. 육하원칙에 기술해 그럴싸한 단어들을 조합한 종이를 아이를 통해 제출하고 나니, 내가 학교를 다니는 건가 싶다.

 

  세상에 계획적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계획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하려고 한 것도 계획이고, 무계획을 계획한 것도 계획이다. 시간이 미래 방향으로 흐르는 한, 한 치 앞의 모든 순간이 다 계획이다. (이 모든 건 사실 뇌의 계획)

   그렇다면, 이렇게 계획적인 우리 모두가, 잘 세운 여행 계획을 가지고 여행을 하던 중, 계획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 온다고 치자. 그 상황에 대한 계획이 없다면 그것은 다시 무계획인가?

… 계획이 무계획이 되고, 무계획이 계획이 되는…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 세상살이 규정하는 모든 것은 어찌보면 사실 다 무용지물이라는 결론.

  그럼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애송이 승무원 시절, 마닐라행 비행이었다. 손님에게 레드 와인을 전달하려던 찰나, 그 와인병이 데굴데굴 굴러 손님 무릎에 쏟아졌다. 망했다. 손님의 하얀 바지 위로 뚝뚝 흐르는 와인 방울이 혹시 내 피눈물?… 순간 정신이 혼미해져 고개도 못 들고 사과하는데, 손님이 웃으며 말한다. ‘나 지금 여행무드라서 괜찮아. 아니었으면 화났겠지만.‘ (당신은 천사?)

  계획에 없이 굴러버린 와인병처럼 세상만사는 참 뜻하지 않게 일어난다.(혹시, 지구가 어지럽게 자전해서 그런건 아닐까 싶기도..^^;) 계획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문제는 태도다. 상황이 이래도 다 괜찮아 할 수 있는 내 태도. 그 여유.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은 또 얼마나 많은 변수가 있을까. 상황이 어찌 되든 그때 그 손님처럼, 조금은 느~긋한 여행무드를 유지하는 게 이번 나의 한달살이 여행 계획이다. 그러고 보니 이걸 또 계획하다니, 난 참 지독히도 계획적인 사람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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