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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물맨 Mar 11. 2024

메뉴판


난 태국을 여러 번 다녀왔고 다녀본 나라 중 손에 꼽게 좋아하는데, 여자인 지인들에게 해맑게 태국 여행을 예찬할 때면 종종 예기치 못한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내가 좋아하는 발 마사지가 가 생각하는 그것과 명백히 다르다고 해명하는 건 매번 골이 아프다.) 게다가 이런 의심들은 대부분 맥락 없이 갑작스레 튀어나와 날 당황시키는데, 대개 이런 식이다.


- 그때 내가 푸껫에서 스쿠터를 타고..

- 그거 받으러 갔어?

- 아니 코코넛 커리 먹으러 가ㄴ..

- 좋디? 너도 거기 가니까 별 수없지? 방콕보다 싸디?

- 아아니 씨ㅂ..


진짜 안 다녀왔어? 한 번도? 진짜? 정말? 진짜? 남자들은 백 프로 간다던데. 너 매번 남자애들이랑 갔잖아. 근데 한 번을 안 갔다고? 진짜? 정말? 어떻게 믿어? 안 다녀온 거 증명할 수 있어?


증명 못한다 C발. 당최 하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았다고 증명할 방법이 어디 있겠으며, 대체

내가 그걸 왜 증명까지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짜로 X 같은 건, 저런 맥락 없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질문들이 몇 발자국 떨어져 거시적 - 현미경(근데 이게 말이 되나?)으로 들여다보면 사실 맥락도, 밑도, 끝도 있는 꽤 합리적 의심이 될 수 있다는 걸 나도 알고 있다는 거다.


태국을 네 번이나 다녀와서 더욱 잘 알고 있다. 저이들의 의심의 근원지가 결국 내 동족의 동포의 동성의 가랑이 사이 어디쯤이라는 것을. 스무 살 무렵 처음 카오산 로드에 방문했을 때, 외면하고픈 핸드사인을 보내며 입으론 연신 붐붐! 붐붐! 을 외쳐대던 남자가 은밀히 건넨 메뉴판(이라 표현하고 싶지 않지만 너무나 그렇게 보이도록 디자인된)에는 눈에 담기 싫은 한국어들이 또박또박 빼곡히 적혀있었다. 진정한 펀치라인은 맨 마지막 줄에 가장 크게 적혀있었는데, 잊고 싶지만 도무지 잊을 수가 없다.


' 보  X  어  택 '


이 무슨 해괴한 합성어인가 고민할 틈도 없이 남자는 내 귀에 대고 직접 저 문구를 비밀스레 속삭여줬다. 마치 무협지의 은둔고수가 꽁꽁 숨겨둔 비기를 나에게만 전수해 준다는 듯이.

당시까지만 해도 저런 메뉴판들은 한국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딜 가나 있었다. 뚝뚝을 타도, 식당엘 가도.


저런 단어는 대체 누가 알려줬을까?

 자식은 왜 이런 단어를 알아야 할까?


집단주의와 애국심 강요에 알러지가 있지만,  많이 쪽팔렸다. 떠올리면 지금도 수치스럽다. 며칠 뒤 파타야에서 중년의 한국인 부부를 만났고 남편은 여행 내내 굉장히 스윗한 배우자처럼 보였는데, 해변을 떠나기 전 우리에게 다가와 정말 뜬금없이 이런 말을 했다.


-남자라면, 태국은 계속 오게 될 거예요. 장담한다니까?


물론 그저 순수한 작별 멘트였을지도 모르지만 악센트는 '남자라면'에 미심쩍게 찍혀있었고, 남자라면에 해당되는 나에게 뭔지 모를 찝찝함을 남겼다. 몇 년 전 쇼킹한 사진을 봤는데,

아동청소년 성매매를 금한다는 캄보디아 공익광고판의 문구가 세 가지 언어로 적혀있었다.


캄보디아어 영어 한국어 




싫든 좋든 영어가 세계 공용어인 건 다들 알겠지. 이거 한국만 특별대우다. 물론 이리저리 늘어놔도 결백한 나에게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건 일종의 파시즘이다. 짜증 난다. 결백한 당신을 붙잡고 화를 내는 것 역시 불편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불신과 불편함의 근원이 무엇인지 따져보고 지속적으로 꺼내서 이야기하고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내가 그렇지 않다고 그게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외면하기로 마음먹는 순간 모두가 불편하고 쪽팔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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