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8월 1일 자 주호민 작가와 특수교사 이슈 관련하여, 재판 결과가 나오기 전 썼던 글입니다.
중학생 때 특수학급이 있는 학교를 다녔고, 시스템과 기준을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특수반 아이들도 하루 중 몇 시간 정도는 일반학급에 머무르게 해 거의 모든 반에 한두 명씩 장애학생들이 있었다. (이게 통학학급의 개념이었나 보다.) 보통 돌아가며 그 애들과 짝을 하거나, 혹은 또래에 비해 심성이 깊은 친구들이 도맡아 케어하기도 했다. 특수반 아이들의 양상은 다양했다. 상동행동을 하는 아이, 수업 중 뜬금없는 문장을 외치는 아이, 1층 창문너머 교실밖으로 뛰쳐나가는 아이 등등.
그중 중3 때 같은 반이었던 A는 폭력적이었다. 여자애들에게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재워달라고 말한다거나 종종 통제불능 상태가 되어 책상을 엎어버린다거나. 나이도 한두 살 많아 남자애들 두셋이 붙어야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럴 때면 A의 엄마가 학교에 오곤 했는데, 늘 그 아들만큼이나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반 친구들에게 사과는커녕 본인보다 덩치가 훨씬 큰 아들의 손목을 붙잡고 신음에 가까운 한숨을 뱉으며 도망치듯 황급히 교실을 빠져나가곤 했다.
최근의 어떤 일을 보며 말 그대로 '도망치듯 황급했던' 그 뒷모습과 십수 년 전 중3 때의 교실이 떠올라 어느 한쪽에 성급한 적개심이 들기보단 안타깝고 슬프다.
대립하는 양측 의견이 첨예하게 갈릴 땐 의외로 진실이 두 개인 경우도 있더라. 입장에 따라 그 미묘한 것들이 달리 보일 뿐. 그 복잡하게 놓인 이상동몽의 교집합을 찾아 연결해야 할 시스템이 망가져 작동하지 않았다면, 군중은 타겟팅을 정말 세밀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버리니까. 쉽게 '요약'하지 않고 양쪽 모두의 입장을 면밀히 살피는 자에게만 돌을 던지든 방패를 쥐어주든 한마디 얹을 권리가 겨우 있다.
옆자리 친구 요약본만 훑어본 애들은 대개 많은 문제를 틀렸다.
어떤 부부가 아무 잘못이 없다는 이야기도 어떤 교사가 잘못했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이야기 역시 아니다. 적어도 나는, '현재의' 정보만으로 성급히 판단할 수 없다.
판단할 수 없는 일을 절대적 선악구도로 착각해 주머니에 돌을 넣는 것보단 입을 다물고 보류하는 편이 덜 비겁하다. 전자는 그저 쉽고 그저 빠르고 그저 편할 뿐이다.
오히려 지금껏 괴상한 절차를 외면하다 이제와 직위해제를 취소하고 마치 악을 처단하기 위해 칼을 뽑은 '우리 편'인 양 생색내는 기관의 시스템에 먼저 돌을 던지는 게 옳다.
(잘못되었더라도) 10살짜리 장애가 있는 아이의 행동을 '성추행'으로 쉽게도 요약해 연일 헤드라인을 뽑아대고, 또 다음 날엔 "특수교사, '나도 너 싫어' "한마디로 쉽게 퉁치며 콜로세움을 열어주는 똥파리들에게 돌을 던지는 게 옳다.
그 뒤엔 특수학급과 교사들이 처한 열악한 상황을, 그 열악함에 늘 눈치 보며 노심초사할 장애아동 가정의 마음들을 헤아려보고 그래도 잘못한 게 있다면 그 잘못만큼만 질타받으면 된다. 그게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계량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직위해제나 국민역적 취급은 과하다.
고백하건대,
중학생일 당시 난 폐만 끼치는 듯한 그 모자가 싫었다. 싫어서 종종 그의 말투와 행동을 따라 하며 나무라기도 했다. 사실 꽤 많은 아이들이 그랬다. 나와 그 몇몇의 행동은 A의 폭력성에 대응한 것이니 정당한 일이었을까. 정당하다 말한다면 그럼에도 모두에게 큰 일 없이 지낼 수 있도록 노력했던, 우리가 몰랐던 특수교사의 헌신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
그 어머니를 보자.
그는 십수 년간 과연 얼마나 많은 사과를 하며 살아왔을까. 상대의 찌푸린 미간보다 발끝에 시선을 두며 버텨온 세월이 나 같은 아이들을 만나 이상과 현실 사이 벽을 도저히 뚫을 수 없다고 느끼면, 사과보다 더 재빨리 사라져 주는 편이 모두에게 낫다고 느끼진 않았을까.
또 나와는 달리 마음씨 착했던, A의 행동을 이해해 주었던 더 많은 아이들을 보자. 그들이 인내로 감당했던 시간은 당연한 것이었을까.
쉽게 불붙여 금세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기엔 좀 더 복잡한 문제다.
어떤 드라마에서 사랑하는 여자에게 장애인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갑자기 대면한 뒤 당황하는 남자에게 여자는 말한다.
"거봐 너도 결국 다르지 않잖아."
남자는 답한다.
"몰랐으니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어 몰랐으니까."
중학생인 우리 교실에 우격다짐 식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섞어놓기 전에 나처럼 그릇 작고 못난 애들을 위해 '장애인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그 흔한 강의라도 선행되었다면 조금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때보단 더 각자의 마음이 각자의 상황에서 상호 이해받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각자의 진실은 한 교사의 20여 년, 한 가정의 10여 년간의 크게 다르지 않을 인고의 세월이 세심하지 못한 시스템 사이에 끼이고 꼬이는 바람에 생긴 '마음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한 사람 혹은 둘셋의 개인에게 모든 원인과 책임을 전가하는 건 너무 슬프고 가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