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재개발 허가지역
당장 내일이 될지
아니면 몇 년이 될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 끝을 알고 있다.
하루가 지나면 공포 영화에서 흔히 쓰이는 클리셰처럼 매일 보던 사람들이 하나 둘 보이지 않는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떠난 그 자리에는 더 이상 사람냄새나 음식냄새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이 없는 곳이 많아질수록 을씨년스러워질 뿐이다. 서울 어느 곳을 가봐도 프랜차이즈 매장이 없는 동네는 찾아보기 힘든데 이 동네는 신기하게도 그 흔한 프랜차이즈 매장 하나 없고 프랜차이즈 기업들 역시 들어올 생각도 하지 않는다. 분명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지만 말이다.
스산한 기운을 내뿜는 이 지역에 두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고 있는데,
그중 한 부류로 박힌 돌이라며 불리는 이들이 살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이 동네에서 오랜 추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 오랫동안 그들의 터를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불모지나 다름없던 이곳을 가꾸며 한평생을 살아왔고 가족을 일군 사람들이며, 자식들이 출가할 때까지 온갖 역경들을 스스로 억척같이 이겨내며 버티며 살아왔다. 이 부류의 사람들 얼굴에는 우리의 인생을 알아봐 달라는 듯 깊은 주름들이 자리잡혀 있다. 그래서인지 웬만해서는 자신이 확신하는 것에는 절대 굽히지 않고,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 것에 있어 항상 적대감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다른 부류로는 굴러온 돌이라며 불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이곳에서 꿈을 좇거나 무언가를 찾기 위해 온 사람들로 동네에서 떠나간 이들보다는 그 수가 적으며, 대부분 이 동네에 산지 오래된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 대부분이 이곳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로는 동일 조건대비 다른 지역들보다 저렴하기 때문에 들어온 이유가 가장 크다. 서울에 살 수 있고 위치도 나쁘지 않으며 비용도 다른 곳보다 저렴하다. 굴러온 돌들이 마다할 이유 없는 매력적인 조건들이 너무나 많아 누구나가 이 동네를 좋아할 것 같지만, 단점이라면 딱 하나... 이곳에서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이 동네 부동산과 계약을 할 때 계약서 조건에 일반적인 부동산 계약과는 다르게 한 가지 조약이 추가되는데 그 조약에 조건이 발동되는 순간, 계약자는 그 즉시 이유 불문하고 공간을 비워줘야 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이곳에서 꿈을 키울 수 있을 거라 믿기에 불합리하게 생각되는 계약 조건을 그저 감내하고 살아간다.
이 동네에 살다 보면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있다.
그건 바로 박힌 돌들끼리 자주 다투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재개발에 찬성인 소수의 박힌 돌들이 오래된 지역이니 얼른 재개발을 하자며 재개발을 원하지 않는 박힌 돌들에게 동의서를 요구하면서 실랑이가 벌어지며 다투는 일이다. 동의서를 자꾸 들이밀다 보면 결국 써주는 박힌 돌들도 있지만, 생각이 다른 박힌 돌들은 여기에 우리의 모든 청춘과 추억이 남아 있는데 새로운 곳에 정 붙이고 어떻게 남은 생을 살 수 있겠냐며 재개발을 원하는 박힌 돌들과 자주 실랑이를 벌일 때가 있다. 그래서 이 동네에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곳저곳에서 실랑이가 벌어져 이따금 동네가 시끄러울 때가 더러 있다.
이 동네는 워낙 오랜 시간 동안 양쪽 의견이 합의되지 않고 재개발도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면서부터, 이 실랑이에 어느 쪽에도 의견을 내지 않고 있던 박힌 돌들은 이 동네에 진절머리가 났는지 수십 년을 알고 지냈던 이웃들에게 어떤 말도 없이 떠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여전히 남은 돌들도 있지만, 그렇게 떠난 자리들이 하나둘 늘어갈 때마다 이 동네는 지독한 바이러스에 퍼진 것처럼 자체격리하듯 이웃사람들과 더 이상 교류도 하지 않고 그저 이 끝이 다가오기만을 각자의 사연과 함께 조용히 묻고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고 이웃들에게 동의서를 악착같이 받으려고 하는 박힌 돌들이라고 수십년을 알고 지낸 이웃들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하고 싶겠나? 그들도 수십년을 이 동네에 정을 붙이고 살았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오랜시간 자신들이 힘들게 일구어 놓은 것들이 허무하게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자기방어적 행동을 자기합리화하며 그들과의 관계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감내하고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다.
이런 실랑이가 벌어질 때마다 굴러온 돌들 역시 이런 상황에 어쩔줄 몰라한다. 굴러온 돌들도 이 동네에 정착해 저마다의 미래를 상상하며 박힌 돌들과 좋든 싫든 부대껴 살고 싶지만, 언제 갑작스레 떠나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골치 아픈 일이라 생각되면 외면부터 한다. 혹시나 문제가 생겨 나비효과로 벌어지지 않은 일들이 자신들에게 벌어질까 박힌 돌들 눈치만 살핀다. 그래서 굴러온 돌들도 박힌 돌들과 살갑게 왕래하지는 않는다. 굴러온 돌들은 그저 이 상황이 조금 더 지속되기를... 그래서 우리가 이곳에 더 살 수 있기를 바라며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끝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이 동네는 분명 언젠가는 끝에 마주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동네엔 모두가 행복한 결말 따위는 없다. 각자의 뿐인 상황들이 저변에 뿌리박혀 이 동네를 아슬아슬하게 유지시켜줄 뿐이다.
서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 흔한 프랜차이즈 한 곳 이 동네엔 없다.
그런데 대신...
맥도날드에서 파는 맥모닝 같은 것은 없지만, 동네에서 아침 일찍 출근하는 이들을 위해 새벽 5시부터 9시까지 딱 4시간 동안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대중교통을 타러 가는 길목에 자리해 아주머니 한분이 직접 미리 만든 토스트와 김밥 그리고 보온병에 담아온 따뜻한 물로 데운 두유와 캔커피가 자리하고 있다.
신전떡볶이 같은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분식집은 없지만, 하교하는 학생들을 위해 떡집에서 하교시간에 맞춰 잠깐이나마 떡볶이를 파는 방앗간 집주인 내외도 있다. 특이한 점이라면 점심에는 만들어 놓은 떡볶이를 일회용 컵에 담아 파시고 이후에는 즉석 떡볶이를 파신다.
동네가 한가해 차대기 좋은 택시운전기사님들 때문에 몇해전부터 장사하는 백반집도 하나 있다. 이 백반집은 간판대신 예전 식당이름 간판 위에 현수막을 걸어 놓고 장사를 하는데 그 흔한 메뉴판도 계산대도 없다. 그저 말없이 앉으면 말없이 음식을 갖다 주고 다 먹으면 손님들은 말없이 문 앞에 놓인 즉석커피 버튼을 누르고, 그사이 현금을 테이블 옆 돈통에 무심히 넣은 후 뽑아 놓은 커피와 함께 구석 한 곳에 마련된 흡연하는 장소에서 담배 한 대 태우고는 다들 말없이 떠난다. 이 백반집에서 가장 시끄러운 건 tv뉴스에서 나오는 정치인들 목소리다.
어느 동네든 퇴근하고 저녁시간에 치킨과 맥주는 국룰인 치킨공화국인 나라에서 bbq 같은 프랜차이즈 치킨집 하나 없지만, 배달이 손쉽게 가능한 요즘, 먹는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그런데 이 동네에는 배달하지 않고 직접와서 먹어야 하는 치킨집이 하나 있는데 가게 업력이 수십 년이나 되서인지 지금은 보기힘든 압력솥으로 치킨을 만들기 때문에 이 맛을 아는 동네 사람들은 불편함을 감수하고 가끔식 이 곳을 찾는다.
색다른건 식당만이 아닌데 비워있는 집들 사이로 사무실 같지만 간판이 없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수 곳들이 몇 군데가 있다. 그중 어떤 곳은 아침 일찍 문을 열고 이른 오후에는 문을 닫는 곳이 있는가 하면, 아침에는 항상 잠겨 있다 아무도 안 다니는 스산한 시간에 혼자 불빛이 켜져 있는 가게도 있다.
그리고 이 동네엔 이발소가 하나 있는데 평상시 운영을 안하는지 문이 항상 닫혀 있다가 사장님이 문을 여시면 좀 있다 손님이 들어오고, 일을 끝마친 손님이 나가면 사장님이 다시 문을 닫고 어디론가 가버리시는 특이한 이발소가 있다. 그리고 이발소 앞에는 정육점 간판이 붙어 있는 가게가 하나 있는데 정육점을 하시는 게 아니라 생닭만 파신다. 이곳도 어찌 알았는지 아침마다 사람들이 들러 닭을 사러 온다. 새벽에 열어 점심 전에 장사를 마감하면 하루종일 가게가 닫혀 있다. 그 외에도 간판에 흑염소가 대문작만 하게 붙어 있지만 정작 흑염소 판매는 안하는 한약 냄새가 베여든 바둑을 옹기종기 모여 두는 기원, 지금은 인터넷만 있으면 수많은 콘텐츠들을 볼 수 있는 세상에 비디오랑 만화책을 빌릴 수 있는 가게, 24시간 편의점은 아니지만 가게 주인이신 할머니가 지내시는 방이 있어 가끔 늦은 시간에도 문이 열려 있는 오래된 식료품 가게도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다 떠나가는 이 동네에 집을 알아볼 수 있는 방한칸짜리 크기의 부동산도 하나 있다.
그래서인지 이 동네 분위기는 지금의 잘 정돈된 서울에서 몇 십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들어온 느낌마저 준다.
그런 동네 분위기 속에서도 끝자락에 유일하게 원두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가 하나 있는데 스타벅스에서 파는 비싼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내린 다양한 사이즈의 고급지고 일정한 맛을 내는 커피까지는 아니지만, 폐업한 커피가게에서 싸게 얻어 온 머신으로 올 때마다 맛이 다른 커피를 팔고 있는 카페가 하나 있다.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카페와 다른 점이라면 어디서 갖고 오는지 이 곳에 맞지 않게 특이한 외국 식자재를 한켠에 마련해 팔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날은 채소도 소분해 팔고, 또 어떤 날은 청을 만들어 팔며, 또 다른 날은 마켓을 열어 비건제품들을 팔고 있다. 또 가끔은 공연도 한다. 이 정체 모를 애매모호한 카페의 주인장은 이 동네의 박힌 돌로 평소에는 카페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다. 실질적으로 이 카페를 전담해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이 곳에 온 지 3년 차 된 굴러온 돌이자 아르바이트생이자 기획자이며, 관리자이자 아트디렉터로 모든 일을 전담해 운영하고 있다. 카페 이름도 한 글자인 ‘흡!(Heup!)'인데 이 이름 또한 카페 주인장이 지은 이름이 아니다.
이곳 연재동은 누군가에게는 그저 소멸해 가는 별 거 아닌 동네일지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는 탈출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희망의 동네일지 모른다.
백색왜성 같은 여기는 재개발 허가지역이다.